프리드리히 실러 Friedrich Schiller (독일, 1759.11.10 ~ 1805.5.9)

프리드리히 실러(Friedrich Schiller)는 1759년 11월 10일, 슈투트가르트 근교에 있는 마르바흐에서 태어났다. 실러는 신학 공부를 하려 했으나 카를 오이겐(Karl Eugen) 공작의 명령에 따라 마지못해 카를 사관학교에 입학한다. 엄격한 사관학교 생활에 만족하지 못한 그는 몰래 레싱(Lessing)과 클롭스토크(Klopstock)의 책을 읽으면서 당시의 ‘질풍노도’ 문학에 심취했다. 사관학교 법학부에서 법학 공부를 시작했으나 의학부가 설립되면서 의학으로 전공을 바꾸었으며, 1780년에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군의관으로 임명되었다.

1777년에 <도적 떼(Die Räuber)>를 집필하기 시작해 1781년에 자비로 출판했으나 이 때문에 오이겐 공작으로부터 집필 금지령과 구금령을 받게 되자 몰래 만하임으로 도망친다. 1782년에 실러는 만하임 극장에서 <도적 떼>를 초연해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 후 그는 튀링겐 주 바우어바흐(Bauerbach)에 있는 볼초겐(Wolzogen) 여사의 별장에서 머물면서 <루이제 뮐러린(Luise Müllerin)>을 완성하고, 1783년 만하임 극장의 전속 극작가로 임명되어 다시 만하임으로 돌아온다. 1784년에 평정관인 쾨르너(Körner)와의 우정이 시작되었으며, 쾨르너의 초대를 받아 오랫동안 라이프치히와 드레스덴에 머물렀다. 1787년에 당시 유럽 문화의 중심지였던 바이마르에서 빌란트(Wieland)와 헤르더(Herder)를 만났으며, 당시 괴테는 이탈리아 여행 중이어서 괴테와의 사적인 만남은 1788년에 이루어졌다. 1794년부터 바이마르를 떠나 예나(Jena) 대학 역사학 교수가 된 실러는 1799년 바이마르로 돌아올 때까지 괴테와 서신교환을 했으며 바이마르에 와서는 가끔 괴테를 대신해서 바이마르 궁중극장에서 감독을 맡기도 했다. 18세기 말 바이마르 궁중극장의 전성기는 괴테와 실러의 협력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실러는 창작기의 절정인 46세의 나이에 집필 중이던 <데메트리우스>를 완성하지 못한 채 바이마르에서 사망한다.

실러는 괴테와 더불어 독일 고전주의의 대표자이며, 열정적인 무대 언어에 대한 그의 특별한 재능과 ‘연극 효과’ 에 대한 정확한 지식은 독일 희곡문학에 중대한 기여를 했다. 특히 미학서 ≪도덕적인 기관으로 본 연극무대(Die Schaubühne als eine moralische Anstalt betrachtet)≫(1784)는 연극 무대에 종교와 법을 지지해야 한다는 높은 과제를 부여했다. 실러의 거의 모든 드라마의 주요 모티브와 핵심주제는 ‘자유’의 이념이다. 그러나 이 ‘자유’의 이념은 개체의 자유 의지가 아니라 인간 품위의 도덕적인 요구로 이해된다. 실러의 창작은 청년시절의 ‘질풍과 노도’에서 시작해서 마지막 바이마르 시절의 성숙된 고전주의 운문형식드라마까지 이어진다.

천재적인 극작가인 그가 남긴 작품으로는 <도적 떼> 외에 <게누아에서 피에스코의 반란 (Verschwörung des Fiesco zu Genua)>(1782), <간계와 사랑(Kabale und Liebe)>(1784), <돈 카를로스(Don Carlos)>(1787), <발렌슈타인 삼부작(WallensteinᐨTrilogie)>(1799), <마리아 스튜어트(Maria Stuart)>(1800), <오를레앙의 처녀(Die Jungfrau von Orleans)>(1801), <메시나의 신부(Die Braut von Messina)>(1803), <빌헬름 텔(Wilhelm Tell)>(1804)이 있다. 미학서로는 앞서 언급한 ≪도덕적인 기관으로 본 연극무대≫ 외에 ≪인간의 미적 교육론(Über die ästhetische Erziehung des Menschen in einer Reihe von Briefen)≫, ≪소박문학과 감상문학(Über naive und sentimentalische Dichtung)≫, ≪우미와 품위에 관하여(Über Anmut und Würde)≫가 있으며 자신의 작품에 대한 서문과 코멘트, 괴테와 교환한 서신 등이 남아 있다.


해설                  

1805년 실러의 죽음으로 인해 등장인물도 전부 표기되지 않은 채 2막 3장의 미완성으로 끝납니다.
작품의 분량이 많지 않아 전문을 번역했습니다.
이 책의 번역 텍스트는 1980년 카를 한저(Karl Hanser) 출판사에서 출간한 ≪실러 전집≫ 제3권입니다.

러시아의 전제군주와는 반대로 폴란드 사람들은 공화국의 자유를 원하며, 모든 관직을 수여하는 왕도 의회의 허락 없이는 폴란드 귀족에게서도 관직을 빼앗을 수 없었다. 의원들은 의회에서 왕에게 진실을 알리는 역할도 했지만, 간혹 가난하고 미천한 처지의 귀족들은 무슨 사안인지도 모르고 자신을 고용한 귀족의 편에 서기도 했다. 의회에서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안건을 승인받으려면 미천한 처지의 귀족들에게 재정적인 지원을 해야 했다. 그 때문에 귀족들은 자기들이 고용한 귀족들을 ‘친애하는 형제’라고까지 불렀다. 실러는 이러한 기초 자료 조사를 거쳐 <데메트리우스>를 비극으로 구상했다.

<데메트리우스>에 대한 실러의 사전 준비, 메모, 원래 계획했던 1막(잠보어 장면)이 남아있으며, 실러의 구상에 의하면 5막으로 구성된 이 작품에서 데메트리우스는 결국 처형을 당하는 비극적인 종말을 맞는다.



옮긴이                  

최석희는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독어독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Die unverkaufte Braut≫, ≪그림동화의 꿈과 현실≫, ≪독일어권 여성작가≫(공저), ≪독일문학 그리고 한국문학≫이 있으며 역서로는 ≪힌체와 쿤체≫, ≪겐테의 한국기행≫, ≪오를레앙의 처녀≫, ≪메시나의 신부≫, ≪늑대가 돌아온다≫, ≪내 동생≫, ≪윤무≫ 등 다수가 있다.


본문 중에서                

SAPIEA
Mehrheit?
Was ist die Mehrheit? Mehrheit ist der Unsinn,
Verstand ist stets bei Wengen nur gewesen.
Bekümmert sich ums Ganze, wer nichts hat
Hat der Bettler eine Freiheit, eine Wahl?
Er muß dem Mächtigen, der ihn bezahlt,
Um Brot und Stiefel seine Stimme verkaufen.
Man soll die Stimmen wägen und nicht zählen,
Der Staat muß untergehen, früh oder spät,
Wo Mehrheit siegt, und Unverstand entscheidet.́

사피아
다수라고?
다수가 무엇인가? 다수란 말도 안 되는 것이오.
오성 은 늘 소수의 사람에게만 있었소.
아무 것도 가지지 않은 자가 어떻게 전체를 걱정한단 말이오?
거지가 자유가 있습니까, 선택이 있는지요?

거지는 돈을 지불하는 힘있는 자에게 빵과 장화를 위하여 자신의 표를 팝니다.
표의 무게를 달아 보아야 합니다. 표를 헤아려서는 안되오.
국가는 빠르든 늦든 언젠가는 반드시 다수가 승리하는 곳에서, 무분 별이 결정권을 갖는 곳에서는 멸망하오.




출판사 서평       

국내에 소개된 적 없는 실러의 미완성 유고작 <데메트리우스>가 출간됐다. 미완성된 작품임에도 실러가 야심을 품고 집필했음을 짐작할 수 있을 만한 작품이다.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자 생전에 그가 미처 원고에 옮기지 못한 대사들은 그의 작품구상 기록에서 해당 부분을 찾아내어 삽입했다.

 


별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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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한경 關漢卿 (중국, 1241~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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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셰익스피어라 불리는 관한경(關漢卿, 13세기 중반에 활동)은 원대(元代)의 희곡작가로 호가 기재수(己齋瘦)이며 대도(大都, 지금의 北京)사람으로 알려져 있으나 불행히도 자세한 삶의 역정은 알 수 없다. 중국 역사상 한족(漢族) 지식인이 가장 천대받았던 몽고족 치하 원나라에서 관한경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연극의 길로 들어섰던 것으로 보인다.
원대의 작가 중 가장 많은 작품을 남기고 있는 그는 극본 창작에서 무대 연출, 연기에 이르기까지 연극의 전 과정에 참여했던 진정한 전문 연극인이었으며 중국 희곡사상, 첫 번째 황금기를 주도한 대표 작가였다. <두아 이야기>를 비롯한 그의 대표작들에는 불합리한 사회에서 고통 받는 서민과 여성들에 대한 동정, 연민이 묻어나며 풍자와 해학, 기지가 넘쳐난다.



해설                             

이 책은 명대의 희곡 선집 ≪원곡선(元曲選)≫(臧晉叔)을 저본으로 하여 교주한
≪관한경전집교주(關漢卿全集校注)≫(王學奇·吳振淸·王靜竹 校注, 河北敎育出版, 1990)에 실린
<竇娥冤>과 <魯齋郞>을 번역하여 옮긴 것입니다.

이 두 작품은 원전의 분량이 많지 않으므로 발췌하지 않고 모두 번역했습니다.

<두아 이야기(竇娥冤)>와 <악한 노재랑(魯齋郞)>은 중국이 ‘중국의 셰익스피어’라 자부하는 희곡작가 관한경이 쓴 원대(元代, 1279∼1368)의 희곡이다. 원대는 중국희곡의 황금기로 중국희곡사상 최초로 우수한 작가에 의해 문학적으로 완성도 있는 극본이 나온 시기다. 이 시기의 희곡은 그 이전에 발달한 각종 공연예술, 문학의 전통을 종합해 형성된 것으로 원대를 대표하는 문학예술 장르가 될 정도로 전성기를 구가했다. 그중 잡극(雜劇)이라는 북방의 희곡 양식이 주를 이루었는데 알려진 작가만 해도 약 2백여 명이고 작품은 약 7백여 종이 있었다고 한다.

관한경은 원대를 대표하는 작가로 가장 많은 작품을 남겼으며 위의 두 극은 관한경의 대표작 중 원대 사회의 어두운 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회성이 짙은 작품이다.



본문 중에서              

沒來由犯王法, 不堤防遭刑憲, 叫聲屈動地驚天.… 天地也, 只合把淸濁分辨, 可怎生糊突了盜跖顔淵. 爲善的受貧窮更命短, 造惡的享富貴又壽延.

 “난데없이 왕법을 범했다고, 뜻밖에도 형벌을 받으니, 억울하다는 울부짖음, 온천지를 울리네, …천지여, 청탁을 분별해야 마땅한데, 어째서 도적과 선인을 헛갈리시나. 착한 이는 빈궁한데다 명까지 짧고, 악한 놈은 부귀 누리는데다 명도 길다네.”

-두아 이야기(竇娥冤) 중


這厮强賴人錢財, 莽奪人妻室… 嫌官小不爲, 嫌馬瘦不騎, 動不動挑人眼, 剔人骨, 剝人皮.

“(노재랑) 그놈은 남의 재산 강탈하고 남의 처 함부로 빼앗고… 작은 관직은 싫다고 안 하고, 마른 말은 싫다고 안 타고, 걸핏하면 사람 눈 뽑고, 뼈 발라내고, 껍질 벗겨버린다오.”

-악한 노재랑(魯齋郞) 중



 

옮긴이                          

하경심(河炅心)은 연세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로 중국 고전희곡을 전공했다. 연세대학교 중문과를 졸업한 뒤, 연세대학교 대학원에서 <맹칭순(孟稱舜) ≪교홍기(嬌紅記)≫의 비극성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역서로는 ≪중국연극사≫, ≪곽말약 희곡선≫, ≪전한 희곡선≫, ≪하연 희곡선≫, ≪진백진 희곡선≫(공역) 등이 있다. 논문으로는 <우언과 꿈−명청인들의 희곡관 탐색>, <한중(韓中) 관극시고>, <원곡에 나타난 여성형상 연구>, <반지항(潘之恒) 연극론의 이해>, <유희와 진정−유정신(劉廷信)의 산곡세계>, <산곡을 통해 본 원대 문인의 자화상>, <중국 전통극의 결말처리에 관한 소고> 등 중국 고전희곡과 산곡(散曲), 한중비교문학에 관한 논문이 있다.



출판사 서평                   

푸른 하늘 같은 고아한 성품을 지녔다 하여 포청천이라 불리는 명판관 포증이 문서를 위조하면서까지 처단하고자 했던 악한(惡漢) 노재랑의 이야기를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한다. 이와 함께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한 두아의 한 맺힌 사연도 함께 전한다고. 중국의 ‘셰익스피어’라 불리는 관한경식 비극을 감상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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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렌 키르케고르 (덴마크, 1813~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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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ko.wikipedia.org

쇠렌 키르케고르(Søren Aabye Kierkegaard, 1813∼1855)는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미카엘 키르케고르는 코펜하겐의 성공한 상인으로서 경제적으로는 남부러울 것이 없는 부자였지만, 어린 시절 유트란 황야에서 심한 추위와 배고픔에 시달린 나머지 하나님을 저주했던 일로 늘 죄책감에 시달리며 살아가는 불행한 사람이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자신의 죄를 용서받고 영혼의 구원을 받아 영원한 행복을 얻고자 했던 독실한 그리스도교 신자였다.

독실한 그리스도교 신자로서 미카엘은 막내아들 쇠렌에게 엄격한 그리스도교 교육을 베풀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되라고 말하곤 했으며, 아들이 신학교를 나와 목사가 되기를 원했다. 쇠렌은 누구보다 아버지를 따랐고, 아버지의 암울한 성격, 신앙심, 그리고 가르침에 의해 많은 영향을 받으며 자랐다. 쇠렌의 암울한 성격과 어떻게 진실한 그리스도교인 될 수 있는가라는 평생의 문제의식은 아버지로부터 고스란히 물려받은 것이다. 그가 나중에 저술한 위대한 작품들도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이러한 유산의 산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버지 미카엘과 형 페테르의 권유를 받아 키르케고르는 18세에 코펜하겐 대학 신학부에 입학한다. 대학에 들어간 이후에 키르케고르는 한동안 방탕한 생활을 하며 그리스도교는 광기라고 말할 정도로 그리스도교에서 멀어진다. 그의 아버지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슬픈 마음으로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키르케고르에게 파멸의 시기는 1836년 자살 미수 사건으로 절정에 이르지만, 이 사건 이후에 그는 점차 안정을 되찾는다.

안정을 되찾으며 아버지와 화해한 키르케고르는 그리스도교로 다시 돌아온다. 그는 그리스도교는 역설이라는 신념으로 철저히 무장하고, 레기네 올센과의 약혼을 파기하면서까지 그 당시 덴마크 지성계를 지배하고 있던 합리주의의 전형인 헤겔주의를 공격하는 데 몰두한다. 이런 공격의 일환으로 1843년에 내놓은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필두로 그는 10여 년에 걸쳐 수십 편에 달하는 작품들을 쏟아낸다.

≪반복≫, ≪두려움과 떨림≫, ≪불안의 개념≫, ≪철학적 조각들≫, ≪철학적 조각들에 대한 결론으로서의 비학문적 후서≫, ≪사랑의 역사≫, ≪그리스도교적 강화집≫, ≪죽음에 이르는 병≫ 등이 이 시기에 나온 키르케고르의 대작들이다.

그는 세속에 물든 덴마크 국교회와 싸우다 지쳐 1855년 마흔넷의 나이로 외롭게 세상을 떠난다. 그는 세상을 떠나며 폭탄이 터져 불을 지를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의 예언대로 그의 사상은 현대 실존주의 철학과 변증법적 신학에 불을 댕겼다. 이제 그의 사상을 빼고는 현대 실존주의 철학과 변증법적 신학은 말할 것도 없고, 이와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현대 철학을 논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해설         

발췌 분량은 <결혼에 관한 약간의 성찰: 반론에 대한 응답, 유부남 씀>의 전체에서 약 40% 정도입니다.

이 책은 키르케고르의 ≪인생길의 여러 단계(Stadier paa Livets Vei)≫ 중에서 실존의 윤리적 단계를 결혼에 빗대 묘사하고 있는 <결혼에 관한 약간의 성찰: 반론에 대한 응답, 유부남 씀(Adskilligt om Ægteskabet mod Indsigelser. Af en Ægtemand)> 부분을 우리말로 옮긴 것입니다.

≪인생길의 여러 단계: 다양한 사람들의 연구(Stadier paa Livets Vei: Studier af Forskjellige)≫[제책업자 힐라리우스(Hilarius Bogbinder)가 편찬하고 출판함]는 키르케고르가 인생의 주요한 단계들을 예시하기 위해서 저술한 작품이다.

≪인생길의 여러 단계≫ 중에서 실존의 윤리적 단계를 결혼에 빗대 묘사하고 있는 <결혼에 관한 약간의 성찰: 반론에 대한 응답, 유부남 씀(Adskilligt om Ægteskabet mod Indsigelser. Af en Ægtemand)>(SV. VI, 85∼161쪽)을 우리말로 옮겼다. 여기에서 화자로 등장하는 판사는 자신의 체험에 근거해서 행복한 결혼을 논증하고 있지만, 그는 자신의 독단을 통해서 우리에게 자신의 철학에서는 꿈꿀 수 없는 삼라만상의 것들이 있다는 것도 보여주고 있다.





본문 중에서         

Priset være Ægteskabet, priset Enhver, der taler til dets Ære.
결혼을 찬양할지며, 결혼에 경의를 표하는 발언을 하는 모든 이를 찬양할지어다.





출판사 서평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이 책은 키르케고르의 ≪인생길의 여러 단계≫ 중에서 실존의 윤리적 단계를 결혼에 빗대 묘사하고 있는 <결혼에 관한 약간의 성찰>을 옮긴 것이다. 화자로 등장하는 유부남 판사는 독단적이라고 할 만큼 결혼을 예찬하고, 결혼하는 것만이 최고이자 최선의 ‘결단’이라고 말한다. 즉, 결혼은 순간의 ‘결단’이라고 말하는데 결혼하지 않는 소극적인 결단을 내리는 자는 인생을 낭비하는 것이고, 결혼하는 것만이 적극적인 결단이며 행복을 보장한다는 것이다. 정말 그런 것일까? 결혼한, 혹은 결혼을 생각하는 독자들의 ‘결단’이 필요하다.





옮긴이                

임규정은 1957년 5월 9일 완주군 조셋 마을에서 출생했다. 고려대학교 철학과와 동 대학원 철학과를 졸업했으며, 1992년에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박사 학위 논문 <키르케고르의 자기의 변증법>은 키르케고르 실존철학의 핵심인 실존의 3단계의 변증법적 구조를 다루고 있다. 또한 그는 키르케고르 실존철학에 관한 논문을 여러 편 썼으며, 그의 저서로는 ≪헤겔에서 리오타르까지≫(공저, 지성의 샘, 1994), ≪공간 물질, 시간 정신, 그리고 생명 진화≫(공저, 북스힐, 2007) 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니체≫(지성의 샘, 1993), ≪반철학으로서의 철학≫(공역, 지성의 샘, 1994), ≪직업윤리≫(공역, 군산대학교 출판부, 1995), ≪하이데거≫(지성의 샘, 1996), ≪스칸디나비아 철학≫(공역, 지성의 샘, 1996), ≪라틴아메리카 철학≫(공역, 지성의 샘, 1996), ≪불안의 개념≫(한길사, 1999), ≪키르케고르≫(시공사, 2001), ≪철학의 거장들 3≫(공역, 한길사, 2001), ≪유혹자의 일기≫(공역, 한길사, 2001), ≪키르케고르, 코펜하겐의 고독한 영혼≫(한길사, 2003), ≪카사노바의 귀향≫(신아출판사, 2006), ≪죽음에 이르는 병≫(한길사, 2007)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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뤼시앵 페브르  Lucien Febvre (프랑스, 1878-1956)    

뤼시앵 페브르

뤼시앵 페브르

뤼시앵 페브르(1878∼1956)는 프랑스 동부의 낭시에서 태어나 프랑슈콩테 지방의 주도인 브장송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는 1899년 파리의 고등사범(Ecole Normale Supérieure)에서 수학했으며, 1911년 ≪펠리페 2세와 프랑슈콩테: 1567년의 위기. 기원과 결과. 정치ㆍ종교ㆍ사회적 연구≫로 소르본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20년 스트라스부르대학교 교수로 임명되어 여기에서 평생의 학문적 동지인 마르크 블로흐(1886~1944)를 만났으며, 함께 <경제사회사 아날(Annales d’Histoire économique et sociale)>을 창간했다. 1933년에는 콜레주 드 프랑스의 교수로 임명되었으며, ≪프랑스 백과사전≫의 편집자가 되어 철학자 앙리 베르와 함께 꿈꾸었던 학문적 ‘종합’을 실천했다.

페브르의 주요 저서로는 ≪펠리페 2세와 프랑슈콩테≫(1912), ≪땅과 인간의 진보≫(1922), ≪하나의 운명, 마르틴 루터≫(1928), ≪16세기의 무신앙 문제≫(1942), ≪오리게네스와 데 페리에 혹은 ‘세상의 해조(諧調)’의 수수께끼≫(1942), ≪신성한 사랑과 세속적인 사랑≫(1944) 등이 있으며, 최근에는 그가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강의한 것들을 묶은 ≪미슐레와 르네상스≫, ≪명예와 조국≫, ≪유럽. 문명의 발생≫ 등이 출판되었다. 페브르는 자기의 잡지인 <아날>에 무려 2000여 편의 글을 발표하면서 ‘새로운 역사’를 개척하고 독려했는데, 그의 주요 논문들은 ≪역사를 위한 전투≫(1953), ≪16세기의 종교적 심장에서≫(1957), ≪완전한 역사를 위하여≫(1962), ≪르네상스 프랑스에서의 삶≫(1977) 등에 수록되어 있다.

페브르는 16세기 전공자로서도 국제적으로 학문적인 권위를 인정받은 대역사가이지만, 그의 명성은 현대 역사학의 흐름을 선도한 ‘아날학파’의 창시자로서 더욱 높다. 아날학파는 구조주의 역사학을 ‘새로운 역사학’으로 제시했는데, 물질적인 구조주의 역사학이 페르낭 브로델의 역사학에서 가장 잘 나타났다면, 정신적인 구조주의 역사학은 페브르의 역사학에서 가장 잘 나타났다고 말할 수 있다. ≪16세기의 무신앙 문제≫에서, 프랑수아 라블레 같은 뛰어난 인물도 자기 시대의 정신적 한계(“믿기를 원하던 시대”)를 벗어날 수 없었다는 주장은 바로 그 같은 구조주의를 담고 있는 것이다



해설         

이 책의 초판은 1942년 알뱅 미셸(Albin Michel) 출판사에서 출판되었고,
옮긴이는 1962년에 출판된 책을 저본으로 삼았습니다. 두 책의 내용은 동일합니다.

이 책은 전체 분량의 약 15%를 발췌한 것입니다.

이 책은 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16세기의 작가인 프랑수아 라블레가 무신론자인가 하는 구체적인 ‘문제’에서부터 출발한다. 뤼시앵 페브르는 “문제를 제기한다는 것, 그것은 역사학의 시작이요 끝이다. 문제가 없으면 역사가 없다”며 ‘문제사’를 제창했는데, 랑케의 역사학에서는 “사료가 없으면 역사가 없다”는 원칙이 지배했음을 상기하면, 바야흐로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역사학도 문제를 제기하고 증명해 나가는 과학적인 방법을 도입하여 신생 사회과학과 대등한 ‘과학’의 대열에 동참하려는 의지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의 서론 제목(<문제와 방법>)에도 명시되어 있듯이, 이 책은 역사 방법론적으로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는 책이다.

우선, 이 책은 무신론 연구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페브르에 의하면 라블레의 동시대인들은 심성적 도구를 결여했기 때문에 무신론자가 될 수 없었다. 서구의 지식인들이 심성적 도구를 갖추게 되는 것은, 페브르도 이야기하고 있듯이, 데카르트 이후다. 데카르트에 의해 비로소 근대가 열리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신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지만, 그의 수학적인 방법론은 무신론을 체계화시키는 데 동원되었다. 데카르트의 과학적 방법을 동원하여 무신론을 체계화시킨 사람은 암스테르담의 스피노자다. 이 유태인 철학자는 ≪윤리학≫에서 그야말로 기하학인 방법으로 신의 존재를 증명했다. 그는 이렇게, 나름대로, 신의 존재를 증명했지만, 그가 증명한 신은 기독교의 신과는 전혀 다른 “신 즉 자연”이었다는 점에서, 그는 동시대의 극단적인 회의주의자인 피에르 벨이 말했듯이 “가장 체계적인 무신론자”였다. 라블레가 무신론자라고 비난받았지만 무신론자임을 부인했듯이, 스피노자도 무신론자라고 비난받았지만 무신론자임을 부인했다. 그러나 스피노자에게 가해진 무신론자라는 비난은 “믿기를 원하던 시대”의 라블레에게 가해진 무신론자라는 비난과 함의가 달랐다. 이미 그것은 근대적인 의미를 지니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고대의 디아고라스나 에피쿠로스, 루크레티우스 이래 역사적으로 자취를 감춘 무신론자들이 참으로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본문 중에서       

La religiosité profonde de la plupart des créateurs du monde moderne : cette formule qui vaut pour un Descartes, je voudrais avoir montré qu'elle vaut d'abord, à un siècle de distance, pour un Rabelais. Et pour ceux don’t il sut traduire, superbement, la ‘foi profonde’.

근대 세계를 만든 대다수 사람들의 깊은 종교심. 나는 데카르트 같은 사람에게 어울리는 이러한 표현이 한 세기 전의 라블레에게도, 그리고 그가 ‘깊은 신앙심’을 멋지게 표현해 준 사람들에게도 어울린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옮긴 이               

김응종은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서양사학과를 졸업했으며(1978), 프랑스 프랑슈콩테 대학교에서 뤼시앵 페브르의 역사학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1987). 1988년부터 충남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아날학파≫(1991), ≪오늘의 역사학≫(공저, 1998), ≪아날학파의 역사세계≫(2001), ≪서양의 역사에는 초야권이 없다≫(2005), ≪페르낭 브로델≫(2006)을 썼으며, 프랑수아 퓌레와 드니 리셰의 ≪프랑스혁명사≫(1990), 뤼시앵 페브르의 ≪16세기의 무신앙 문제―라블레의 종교≫(1996), 퓌스텔 드 쿨랑주의 ≪고대도시≫(2000)를 번역했다. 초기에는 ‘아날학파’에 대한 연구를 발전시켜 사학사적인 연구에 집중했으나, 최근에는 17세기의 회의주의자들과 무신론자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다. 뤼시앵 페브르의 ‘16세기의 무신앙 문제’를 계승한 ‘17세기의 무신앙 문제’라는 주제로 연구서를 쓸 계획이다.



출판사 서평      

이 책은 16세기 작가인 프랑수아 라블레가 과연 무신론자인가 하는 구체적인 질문에서 출발한다. 16세기도 21세기와 마찬가지로 ‘믿는다’ 혹은 ‘믿지 않는다’라는 모호한 명제를 가지고 고민하던 시기다. 다만 각각의 견해를 체계화할 수 있는 ‘심성적 도구’가 존재하지 않았을 뿐이다. 페브르는 16세기에 논의되던 무신론에 관한 명제들을 철학, 과학, 비학 등을 발판으로 하나하나 논증하면서 무신론의 의미와 본질이 무엇인지 구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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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zman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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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크 베데킨트 Frank Wedekind (독일, 1864 ~ 1918)
프랑크 베데킨트는 1864년 7월 24일 독일 하노버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미국 시민권을 가진 의사로 1864년까지 샌프란시스코에서 살다가 귀국했고, 어머니는 가수였다. 유럽으로 돌아온 이 가족은 1872년 스위스로 이주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아버지가 1848년 프랑크푸르트에서 시민운동에 관여한 적이 있었고, 비스마르크의 제국 건설에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스위스 아라우 주에 있는 렌츠부르크 성을 사서, 그곳에서 프랑크와 그의 다섯 형제들은 학교에 다닌다. 베데킨트는 스위스의 로잔과 독일의 뮌스터, 뮌헨에서 대학에 다니며 아버지가 원하는 법학과 독문학을 공부한다.

그는 잠시 취리히의 한 식품회사에서 광고문안 작성자로 일하기도 하나, 24세에 부친이 사망하자 그 유산을 받아 경제적으로 독립하게 되고, 그 후 베를린과 뮌헨에서 보헤미안 생활을 하며 연극에 전념한다. 1892/1895년에는 파리에서 머물기도 하고, 런던으로도 여러 차례 여행한다. 1896년 이후에는 뮌헨에서 ‘히로니무스 욥스’라는 가명으로 잡지 <짐플리치시무스>의 동인으로 일한다. 1898년에는 카를 하이네가 이끄는 입센 극장에서 비서로 일하다가, 게오르크 슈톨베르크가 이끄는 뮌헨 샤우슈필하우스(오늘날의 뮌헨 카머슈필레) 극장에서 희곡 담당 및 연출가로 일한다. 이때 베데킨트는 황제 빌헬름 2세의 팔레스티나 여행을 조롱하는 시를 써서 황제 모독죄로 고발당했기 때문에 스위스로 도주한다. 출판업자 랑겐은 망명 중이어서 수입이 없는 작가에게 더욱더 과격한 시를 쓰도록 요구하여 자신이 발행하는 신문의 판매부수를 올리려고 한다. 이 때문에 베데킨트의 작품은 극장에서 공연을 거부당한다. 그리하여 베데킨트는 출판업자 랑겐과는 결별하고 법정에 자진 출두하여 7개월 동안 구금생활을 한다. 1901년부터 뮌헨의 카바레 극장 <열한 명의 형리>에 출연하고, 자신의 작품에 배우로도 출연하며 여러 차례 순회공연을 다닌다.

베데킨트는 42세 때 그라츠의 여배우 틸리 네베스와 결혼하는데, 틸리는 남편과 함께 베데킨트 스타일을 발전시켜 빈에서 카를 크라우스의 찬사를 받는다. 1906/1908년에는 베를린의 막스 라인하르트 극장에서 함께 작업하고, 1908년부터는 뮌헨에서 지낸다. 1906년 딸 파멜라가 출생하고 파멜라는 후에 희곡작가 카를 슈테른하임과 결혼한다. 1911년에는 둘째 딸 카디디야가 태어난다. 베데킨트는 맹장 수술이 잘못 되어, 탈장 수술이 여러 번 반복되다가 1918년 결국 54세의 나이로 죽음에 이르게 된다. 뮌헨의 발트프리트호프 묘지에서 있었던 장례식은 스캔들이 된다. 왜냐하면 뮌헨의 창녀들이 ‘자유연애의 선구자’인 베데킨트에게 마지막 존경을 표시하러 몰려왔고, 아직 덮지 않은 묘 안에서 작가 하인리히 라우텐자크가 광기 발작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해설         
이 책은 발췌하지 않고 모두 완역한 것입니다.
이 책은 번역의 원전으로
Frank Wedekind, Frühlings Erwachen. In: Frank Wedekind, Dramen 1. Berlin und Weimar: Aufbau-Verlag, 1969 을 사용했습니다.

프랑크 베데킨트는 동시대인들을 놀라게 하고 시민들을 두렵게 만든 존재였다. 금기 안에서 보호받고 유지되던 사회는 베데킨트로 인해 도전과 충격을 받았다. 사회는 그를 평화를 교란하는 자로 구분하고 검열과 판결로 박해했다. 베데킨트는 성 문제를 원초적인 사건으로 묘사하며, 성을 문명과 인습의 조종으로 소외된 시민 존재 속으로 침입한 혼돈스러운 자연의 힘으로 묘사한 최초의 작가에 속한다. 그는 사회적 안전조치인 결혼과 가족제도 등 성 행동의 형식들에 대비해서 플레이보이들이 감행하는 순간적 외도의 독특한 매력에서 성의 악마성을 그려 보인다. 타부의 강요가 다른 영역으로 옮겨가고 성 문제가 사실적이고 객관적인 형태로 표현되고부터 베데킨트의 성의 신화화는 무리하고 희극적이라는 인상을 주기도 했으나, 중요한 것은 그가 선입견과 위선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성 문제를 다룬 선구자였다는 점이다. 그에 의하면, “자연에서는 예의 없는 사건이란 전혀 없고, 오직 이롭거나 해로운 사건, 이성적이거나 비이성적인 사건이 있을 뿐이다”.

 베데킨트는 이미 인문계 고교인 김나지움 시절에 성을 “생 의지의 초점”으로 여긴 쇼펜하우어의 허무주의 세계관의 영향을 받았다. 니체의 글에서부터 에고이즘만이 모든 사회적 행동의 동기가 된다는 유물론적 확신을 전개시켜, “좋은 사회란 그곳에서 사업이 잘되는 사회”(≪슐로스 베터슈타인≫)라고 생각하고, ≪카이트 후작≫은 “죄악이란 잘못된 사업에 대한 신화적 명칭이고… 이 세상에서 가장 번창한 사업이 도덕이다”라고 조롱한다. 사랑, 결혼, 명예와 같은 시민계급의 이상을 베데킨트는 냉정하게 사업관계라고 여긴다. 베데킨트는 결혼을 부양과 사회적 체면으로 지불한 사랑이라고 보는 반면에, ≪룰루≫, ≪슐로스 베터슈타인≫, ≪프란치스카≫에서처럼 돈으로 살 수 있는 사랑이 원래 자유롭고 자발적인 사랑이라고 보여준다.

 성 문제와 사회의 갈등 다음으로 베데킨트에게 중요한 두 번째 주제는 당시 세기 전환기 문학에서 유행 현상이기도 했던, 예술가와 사회의 대립이다. 때때로 자신이 세상에서 인정받지 못한다고 생각했던 베데킨트에게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예술가는 저항과 거부의 상징이 된다. ≪니콜로 왕≫, ≪사랑의 묘약≫, ≪슐로스 베터슈타인≫에서처럼 예술가도 속물이 될 수 있다. ≪캄머쟁거≫, ≪지령≫의 화가 슈바르츠, 또는 ≪음악≫의 장애인 여가수 휘너발트와 같이 자신의 재능을 팔기 위해서 노력하기 때문이다. 여성 파우스트라고 할 수 있는 ≪프란치스카≫ 역시 성전환을 하여 자신의 존재를 예술작품으로 만들고, ≪헤라클레스≫는 세상을 가지고 실험을 하는데, 이러한 작품들이 베데킨트의 예술가 드라마들이다.

 베데킨트는 카를 슈테른하임과 게오르크 카이저 같은 표현주의 드라마 작가들의 본보기가 된다. 베르톨트 브레히트도, 룰루처럼 광적으로 생을 탐하는≪바알≫(1922)을 보여준 바 있고, 베데킨트의 사실적이고 간결한 발라드 어조를 자신의 서정시에서도 계속 이어가고 있다. 베데킨트에 대한 브레히트의 고백은 매우 열렬하다. “그것은 이 사람의 대단한 활기였다. 폭소와 조소가 깔린, 인간성에 대한 불굴의 찬가를 만들어낼 수 있었던 에너지 말이다…. 그는 톨스토이와 스트린드베리와 함께 신 유럽의 위대한 교육자에 속한다. 가장 위대한 걸작품은 그 자신의 개성이다.” 뒤렌마트의 그로테스크한 비유극들에서도 비극성은 씁쓸한 소극으로 변하는데, 이 역시 베데킨트의 극작론이 계속 발전된 것이라 볼 수 있다.

 ≪눈뜨는 봄≫은 청소년들 사이에 성의식이 깨어남을 보여준다. 빌헬름 2세가 지배하는 권위주의 국가에서 청소년들은 학교의 억압에 시달리고 있다. 그들은 부모들이 점잔 빼는 것에 대해 반기를 들고, 항상 같은 질문과 요구로 스스로 괴로워하고, 부모 세대들부터 거부당한 채, 죄의식과 억압 아래서 혼란스러워한다. 14세 되는 소녀 벤들라 베르크만은 “열네 살 된 저보고 아직도 황새를 믿으라고 진지하게 요구하실 수는 없어요”라고 하면서 어머니로부터 성에 대한 것을 알려고 한다. 어머니 베르크만 부인은 난처한 딸의 물음을 회피하며 뿌리친다. 김나지움 학생들인 멜히오어 가보어와 모리츠 슈티펠도 생식과 출산에 관한 터부에 대해 추적하려고 한다. 생각이 자유로운 어머니 밑에서 자란 멜히오어는 친구를 위하여 성교육적인 글을 <동침>이라는 제목으로 써준다. 모리츠는 몽상적이고 겁 많은 친구로 학교에서 낙제하게 되자 부모의 압력을 피해 미국으로 도주하려고 꿈꾸지만 실패하고 권총으로 자살한다. 그가 자살 직전에 만난 소녀 일제는 시민사회에서 타락한 여자아이로 낙인 찍혔으나, 술집이나 예술가들의 세계에서 나름대로 자신의 삶과 사랑의 욕구를 충족시키며 인생을 즐긴다. 일제의 유혹도 모리츠의 불안과 자살을 막을 수 없다.

 멜히오어와 벤들라는 건초 창고에서 우연히 만나 사랑을 경험하고, 벤들라는 임신하게 된다. 스캔들을 막기 위해 어머니는 벤들라가 ‘빈혈증’에 걸렸다고 설득하고, 돌팔이 산파에게 임신중절을 맡겨 벤들라는 죽게 된다. 그 사이에 멜히오어는 모리츠에게서 발견된 <동침>이라는 글의 작성자임이 밝혀져서 학교로부터 퇴학당하고 감화원에 수감된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내면 깊은 곳에서 썩었다”고 생각한다. 멜히오어의 퇴학을 결정하는 교사회의는 그로테스크한 인물들이 모여서 마치 동물 우화처럼 보인다. 교사들의 이름은 ‘조넨슈티히(=일사병)’, ‘훙거구르트(=주린 띠)’, ‘아펜슈말츠(=원숭이 비계)’ 등 심술궂게 지어졌다. 학생이 자살한 후 열린 교무회의의 큰 걱정은 교육문화청이 불행의 책임을 교사들에게 전가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결국 교사회의는 멜히오어를 희생양으로 삼는다. 감화원에서 탈출한 멜히오어는 한밤중에 벤들라와 모리츠가 묻힌 지 얼마 안 되는 묘지에 숨어든다. 묘지의 환상적인 장면에서 죽은 친구 모리츠가 그의 앞에 나타난다. 자신의 머리를 팔에 낀 모리츠는, 멜히오어에게 삶을 마감하라고 권하며 손을 내민다. 그때 우아한 정장과 실크해트를 쓴 복면의 신사가 나타나 둘 사이에 끼어들고 그는 멜히오어를 삶의 세계, 어른의 세계로 이끌고 간다.

이 연극은 초연에서 스캔들이 되었다. 어른들의 케케묵은 속물 세계에 대한 선전포고로서, 갈피를 못 잡는 청소년과 경직된 아버지들 사이의 금기시되던 것에 대한 토론으로서 말이다. 이 작품은 시대를 초월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청소년들이 자신들의 동경과 열망과 문제 때문에 얼마나 혼자서 자신을 파괴하고 소모하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1890/1891년에 씌어졌지만 1906년 막스 라인하르트가 공연할 때까지 초연을 할 수 없었다. 1912년에야 비로소 이 연극은 법원의 최종 결정으로 자유로운 공연 허가를 얻게 되었다.

 잇따라 일어나는 사건의 직접적인 장면들이 느슨하게 연결되는 극형식으로, 렌츠와 뷔히너를 이은 개방적 극형식을 발전시키며, 베데킨트는 이 극에서 사춘기 성 경험의 여러 가지 다른 양상들을 끌어들인다. 즉 포도밭에서의 핸셴 릴로와 에른스트 뢰벨의 동성애 성향이라든가, 자위행위, 또 절망적 소외감에서 벗어나기 위한 사내아이들의 싸움질 등이 그것이다.

 ≪눈뜨는 봄≫은 20세기 초와 독일 표현주의 시대의 많은 청소년 비극들의 모범이 되었다. 세대 간의 갈등이라든가 잘못된 사회에 의한 그릇된 청소년 교육은 19세기 말 20세기 초 이후 문학과 연극에서 활발하게 논의되던 중심 주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