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더 폰 훔볼트 Alexander von Humboldt (프랑스, 1769~1859)

사용자 삽입 이미지

훔볼트 선생님

훔볼트의 열대 아메리카 여행은 당시 획기적인 시도였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있는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다양한 종류의 측정 기구를 휴대한 훔볼트는 여러 학문 분야의 관점이나 방법을 종합해서 열대의 자연을 내적으로 관련되어 있는 생기 넘치는 전체로서 관찰하려고 했다. 열대 아메리카 각지에서 훔볼트는 식물과 동물을 관찰하고, 천문 관측을 통해서 모든 지점의 지리적 위치를 확정하며, 지표의 경관이나 천체를 관찰함과 동시에 대기 상태나 지자기(地磁氣)에 관심을 나타냈다. 게다가 그는 열대 아메리카 스페인령 지역의 역사와 사회적 특성을 조사하고, 자연과 사회를 포괄한 종합적인 지지(地誌)를 묘사하기 위한 자료를 수집했다.

열대 아메리카 여행의 성과에 기초한 각종 보고서는 <파리에서 신대륙 열대지역으로의 여행>이라는 제목으로 차례로 간행되었으며, 오랫동안 수많은 애독자를 확보했다. 특히 독일에서 훔볼트의 ≪식물지리학 시론 및 열대지역의 자연도≫는 20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 대학의 지리학 교육에서 중요한 문헌이 되었다. 헤트너(A. Hettner)와 트롤(C. Troll) 등 20세기의 독일 지리학을 이끈 지도자들은 훔볼트의 이러한 저작에서 지리학의 정신을 찾았다. 똑같은 것을 프랑스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다. 예를 들면 20세기 전반의 프랑스 지리학을 대표하는 마르톤(E. de Martonne)은 지리학의 발전에 대한 훔볼트의 공헌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훔볼트의 공적은 아무리 높게 평가해도 지나치지 않다. 자연지리학의 거의 모든 분야에 대해서 그는 관찰 방법을 확립했다. 해발고도의 측정에 기압계를 사용하는 방법을 보급한 것은 훔볼트다. 또 그는 지형의 특성을 포착하기 위하여 단면도와 평균고도를 사용하는 방법을 보급했다. 훔볼트에 의해서 최초의 등온선도가 그려지고, 대륙 서안과 동안의 대조가 드러났다. 더욱이 식물의 생리와 토양이나 기후의 관계에 기초해서 식물지리학 분야를 창시한 것도 훔볼트다. 중앙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에서의 5년간 체재를 마친 뒤 훔볼트는 많은 자료를 가지고 돌아왔으며, 그것에 기초한 저작의 출간은 20년에 걸쳐 착착 이루어졌다.

그러나 훔볼트는 단순히 박물학자라든가 여행가에 머물지 않는다. 그는 후대에는 드물 정도로 폭넓은 시야를 갖춘 지리학자였다. 무기적 자연에 관한 과학과 유기적 자연에 관한 단순한 긁어모음이 아니라 독자적 과학으로서 지리학의 기초를 세우는 두 개의 원리를 최초로 명시하고, 또 실제로 적용한 공적은 의문의 여지 없이 훔볼트에게 돌릴 수 있다. 연구의 대상이 지형이든 기온이든 식생이든, 그들 대상을 그 자체로서 파악하는 것에 훔볼트는 결코 매몰되지 않았다. 훔볼트는 지형을 지형학자의 눈으로 포착하거나, 기온을 기상학자의 눈으로 포착하거나, 식생을 식물학자의 눈으로 포착하는 것에 결코 만족하지 않았다. 훔볼트의 고찰 시점은 그보다 훨씬 넓었다. 훔볼트는 장소에서 관찰되는 다른 사상(事象)들을 종합해서 고찰했다. 각각의 현상에 대한 원인을 고찰함과 동시에 그 결과에도 눈을 돌렸다. 이러한 인과관계의 고찰은 정치적 사상(事象)이나 역사적 사상에까지 미치고 있다. 인류가 이렇듯 토지나 기후나 식생과 결부되어 있는 존재라는 점, 식생이 무기적 자연환경과 어떻게 관련되어 있을까 하는 점, 또 무기적 자연환경 그 자체라 하더라도 구성요소 상호 간에 어떻게 관련되어 있을까 하는 점을 훔볼트만큼 정확히 나타낸 사람은 없었다.

인과의 원리로 불러야 할 이 제1의 원리에 더해서 훔볼트는 일반지리학의 원리로 이름붙일 수 있는 제2의 원리를 확립했다. 지질이든 동식물이든 인류이든 뭔가 하나의 문제를 고찰할 때 이 위대한 학자는 국지적 사상(事象)의 음미에 몰두하는 일은 없었다. 훔볼트는 항상 유사한 사상이 관찰되는 다른 지역에도 눈을 돌렸다. 어떤 경우에도 훔볼트가 밝히려고 한 것은 유사한 상황 아래서 항상 성립하는 일반 법칙이었다. 그에게는 어떤 지점의 연구도 지구 전체의 인식과 결코 무관하지 않았다. 이 제2의 원리를 적용한다고 하는 것은, 바꿔 말하면 그때까지 지지학(지역지리학)과 계통지리학(일반지리학)을 격리시켰던 벽을 허물어버리는 일이었고, 지리학이라는 하나의 과학에 속하는 이들 두 개의 분야가 서로 양보하여 주장을 접근시킴으로써 서로에게 풍성한 결실을 가져다주는 것을 의미했다. 이것이 충분히 이해되었을 때 근대지리학은 탄생한 것이다.




해설                   

이 번역은 훔볼트의 불어판을 바탕으로 한 데즈카 아키라(A. Tezuka)의 일본어판 두 권을 저본으로 삼았습니다. ≪지리학의 고전≫에서는 <식물지리학 시론>을, ≪(속)지리학의 고전≫에서는 <열대지역의 자연도>를 각각 번역하여 불어판 체재로 통합한 것입니다.

수천 년 전부터 지리학은 발견에 관한 학문이었다. 에라토스테네스(Eratosthenes)는 태양의 각도를 측정함으로써 지구가 둥글다는 것뿐만 아니라, 지구의 둘레를 매우 정확하게 측정했기 때문에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수 세기 후 지리학은 탐험과 지도 제작에 의해서 추진되었다. 이런 전통을 바탕으로 계몽의 세기에 알렉산더 폰 훔볼트(Alexander von Humboldt)는 탐험 여행과 그것에 바탕을 둔 기념비적인 작품을 지리학에 남겼다.

그 결과 훔볼트는 동서고금의 지리학자들 중에서도 지금까지 가장 높은 평가를 받아왔다. 아마도 훔볼트를 지리학자로서만 형용하는 것은 부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그는 무엇보다 먼저 박물학자였으며, 또 독일을 대표하는 대여행가였다. ≪식물지리학 시론 및 열대지역의 자연도≫는 열대 아메리카 여행의 한 산물이다. 해설에서는 탐험 여행 및 문헌들이 지리학에서 갖는 의의를 간략하게 소개했다.





본문 중에서             

Soutenus des découvertes déjà faites, nous pouvons nous élancer dans l’avenir, et, pressentant les conséquences des phénomènes, fixer à jamais les lois auxquelles la nature s’est assujettie. C’est au milieu de ces recherches que nous nous préparons une jouissance intellectuelle, une liberté morale qui nous fortifie contre les coups de la destinée, et à laquelle aucun pouvoir extérieur ne sauroit porter atteinte.

우리는 과거의 발견에 기초함으로써 미래로 발전할 수 있다. 또 현상의 관련을 예견함으로써 자연을 지배하는 법칙을 파악할 수 있다. 우리에게 지적 향유와 정신적 자유를 가져다준 것은 틀림없이 이러한 연구를 통해서이다. 운명이 계속해서 연출하는 타격에 대항하여 우리를 지탱하게 만드는 것이 이 정신적 자유이며, 또 이 자유에 대해서는 어떤 외부의 힘도 이것에 상처줄 수 있는 수단을 갖지 못할 것이다




옮긴이                   

정암(鄭巖)은 관동대에서 지리교육을 공부하고 동국대에서 지리학을 전공했다(문학박사). 동국대 지역환경연구소와 부산대 부산지리연구소에서 근무를 했으며, 관동대ㆍ동국대ㆍ부산대 등에서 강의를 했다. 현재 관동대학교 지리교육과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번역서로는 <근대지리학의 개척자들>(한울), <훔볼트의 세계>(한울), <지역과 경관>(선학사, 공동), <촌락개발의 기본성격>(민속원)이 있으며, 편저로는 <지리학을 빛낸 24인의 거장들>(한울, 공동) 등이 있다.





출판사 서평            

≪식물지리학 시론 및 열대지역의 자연도≫는 훔볼트의 열대 아메리카 여행 성과에 기초한 첫 번째 보고서다. 그의 5년간의 탐험 여행은 19세기 내륙 탐험에 자극제가 되었고, 그의 현지에서의 관찰을 바탕으로 한 저작은 훗날 헤트너, 트롤, 마르톤 등 20세기 학자들에게 지리학의 정신을 선사했다. 최초의 등온선도가 그려지고 대륙 서안과 동안의 대조가 드러나게 한 그의 눈으로 장대한 자연의 전체상을 제시한다.



별점                  

사용자 삽입 이미지




















         



목차                     

목차 보기

본 포스트의 저작권은 편역자와 출판사에 있으므로, 무단 전재나 재배포를 금지합니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zmanz

댓글을 달아 주세요

아르투어 슈니츨러 Arthur Schnitzler (오스트리아, 1862~1931) 
아르투어 슈니츨러(Arthur Schnitzler, 1862∼1931)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부유한 유태인 의학교수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그 역시 의학을 공부한 의사였다. 1886년부터 병원에서 일했으며 1893년부터 개업했으나, 생의 대부분을 작가로 활동했다. 작가 초기에는 주로 희곡을 집필했으며, 휴고 호프만슈탈(Hugo von Hofmannsthal, 1874∼1929)과 친구였고, 스스로 자신의 ‘정신적 도플갱어’라고 부르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적 기법을 많이 사용했다. 대표적인 희곡으로는 <아나톨(Anatol)>, <사랑의 유희(Liebelei)>, <윤무(Reigen)>, <광활한 땅(Das weite Land)>, <베른하르디 교수(Professor Bernhardi)>를 들 수 있다. 만년에는 희곡보다 소설을 썼으며 대표적인 단편소설로는 <구스틀 소위(Leutnant Gustl)>, <엘제 양(Fräulein Else)>, <야외로 가는 길(Der Weg ins Freie)> 등이 있다.

 그는 오랫동안 도나우 왕정의 퇴폐를 묘사하는 작가로 낙인 찍혔으며 모든 작품에서 당시 세기말 빈의 분위기를 묘사하고 있어 풍속 묘사가로, 그의 문학은 오락문학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슈니츨러의 문학에 대한 이러한 평가절하는 무대를 사회비판의 장으로 바꾸어놓기는 하지만 구체적으로 사회변혁을 추구하고 있지는 않다는 인식 때문이다. 1960년이 지나서야 슈니츨러는 사회전통의 압박, 소외, 고독, 자유와 헌신, 거짓과 실제에 대한 갈등을 예리하게 분석하는 작가로 평가되었으며 체호프처럼 위대한 인간묘사가의 한 사람으로 인식되었다.

 1914년까지 슈니츨러는 오토 브람(Otto Brahm)의 연출로 빈 부르크테아터뿐만 아니라 베를린극장에서도 가장 많이 상연된 희곡작가에 속한다. 슈니츨러는 1931년 사망할 때까지 멸망한 사회의 연대기 작가로 평가받았는데 이는 그가 뒤늦게 단편소설 쪽으로 방향을 돌렸기 때문이다. 1960년경에야 비로소 극장 감독으로 활약하고 있는 아들 하인리히 슈니츨러의 도움으로 슈니츨러의 르네상스가 시작되었다.

 

해설         
국내 최초 번역입니다.
이 작품은 원전의 분량이 많지 않으므로 발췌하지 않고 모두 번역하였습니다.

이 책은 피셔(Fischer)출판사에서 2000년에 나온 ≪Reigen, Liebelei≫ 23∼102쪽을 옮긴 것입니다.
작품해설을 위해서는 귄터 륄러(Günther Rühler)와 리하르트 알레빈(Richard Alewyn)의 글을 참조했습니다.

<윤무>는 1897년에 완성되었으며 창녀와 군인, 군인과 방 청소하는 하녀, 하녀와 젊은 남자, 젊은 남자와 젊은 여자, 젊은 여자와 남편, 남편과 귀여운 소녀, 귀여운 소녀와 작가, 작가와 여배우, 여배우와 백작, 백작과 창녀라는 10개의 대화로 구성되어 있다. 슈니츨러는 1900년에 이 작품을 자비로 200권을 인쇄하여 비매품으로 친구들에게 나누어주었고 친구들은 이 작품에 대해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한다. 루돌프 로타어(Rudolf Lothar)는 이 작품의 은밀한 매력을 열렬한 기쁨으로 읽었으며, 사랑의 헐떡거림에서 인간본성의 비꼬임을 재빨리 간파한 알프레트 케레(Alfred Kerre)는 이 작품의 ‘야릇한 힘’을 슈니츨러의 새로운 문학경향으로 보았다. 원래 이 작품은 <사랑의 윤무>였는데 케레가 <윤무>라고 하는 게 좋다고 해서 제목을 줄였다고 한다. 케레는 슈니츨러의 이 작품을 ‘소 데카메론’이라고 명명하기도 했다.

1903년 빈에 있는 한 출판사에서 이 <윤무>를 초판에 4만 부나 찍어 슈니츨러를 유명하게 만들었으나, 새로운 오해에 처하기도 했다. 펠릭스 잘텐(Felix Salten)은 ‘아르투어 슈니츨러와 윤무’라는 글을 썼는데 슈니츨러는 이 친구의 글에서 자신이 대중작가로 평가받은 사실에 분노했다. <윤무>는 1904년 독일에서 출판 금지되었으나 출판 금지 후 은밀하게 전파되어 <윤무>에 대한 패러디까지 나오면서 ‘알려지지 않은 유명한 책’이 되었다. 오스트리아 빈에서는 1908년부터 벤야민 하르츠(Benjamin Harz)출판사가 <윤무>를 다시 출판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검열 규정이 오스트리아보다 엄격한 독일에서는 어느 출판사도 이 책의 출판을 시도하지 않았다. 1931년에 와서 피셔출판사가 이 책을 출판하게 되었으며, 101번째로 출판된 이<윤무>는 작가의 서문 없이 출판하도록 압력을 받았다. 이 작품에 대한 슈니츨러의 해설이 민족사회주의로 인해 강력해진 반유태주의를 자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이는 <윤무>의 공연사와도 연관이 있었다. 비매품으로 찍어 친구들에게 준 작품에 대한 논란 때문에 1897년 슈니츨러는 자신의 <윤무>는 상연할 수 없는 것이라고 선언했다. 1903년 6월 25일 독일에서 처음으로 이 책을 공식적으로 구할 수 있게 되자 뮌헨에 있는 아카데미 드라마협회는 4·5·6장만 상연했으며, 1912년에 비로소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헝가리어로 초연을 할 수 있었다. 1918년 이후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검열이 사라졌으나 자칭 ‘도덕 방어자’라는 사람들의 반대는 사라지지 않았다.

검열의 종말과 함께 ‘은밀한 스캔들 작품’의 상연권을 얻기 위하여 지원자들이 줄을 섰는데 막스 라인하르트(Max Reinhardt)가 그들 중 한 사람이었다. 트리아노 극장, 야한 프랑스 해학극을 상연하는 극장도 이 극을 원했는데, 이는 <윤무>의 딜레마를 보여주는 점이다. 라인하르트는 1920년 초 이미 베를린을 정리하고 가을에 빈으로 갔으며, 베를린에서는 게르트루트 아이졸트(Gertrud Eysoldt)가 이 극의 상연권을 가지게 되었다. 책이 출간된 지 23년 만인 1920년 12월 23일, 베를린 국립음악대학 내의 샤우슈필하우스에서 처음으로 독일어로 공연되었다. 그러나 배우 아이졸트가 보여준 용기는 그 대가를 톡톡히 지불해야 했다. 이날 오후 대학본부는 이 건물 안에서는 “도덕적 종교적 정치적 혹은 예술적인 이유에서 자극적인 작품은 상연할 수 없다”는 대관 계약조항을 내세웠고, 대법원은 텍스트의 도덕성 때문에 공연을 금지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이날 오후 극장주인 막시밀리안 슬라데크 (Maximilian Sladek)와 여배우 아이졸트는 6주 구금이라는 위협에도 불구하고 공연을 강행했으며, 공연 자체는 방언으로 쉽게, 분위기는 안전하게, 방해자들에게는 어떤 반격의 빌미도 제공하지 않았다. 이 공연에는 국립재판소의 재판관과 지방재판소의 고문들도 참석했으나 이들조차 이 공연이 도덕성을 망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이 작품은 1921년 1월 3일 공연금지에서 풀려났으며 공연 마지막 날까지 매일 공연을 볼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이 초연이 있은 후 베를린 경찰청 음란 방지를 위한 핵심 자리에 있던 독일 민속학 교수 에밀 브루너(Emil Bruner)는 이 작품을 베를린 검찰청에 고발했다. 그는 이 상연을 하나의 스캔들로 간주했으며 이렇게 형사소송이 시작되고 ‘윤무 소송’이라는 이름과 함께 이 작품의 공연 역사가 시작되었다.

 이와 더불어 오스트리아에서도 심한 반대를 가져오게 되었다. 도덕성에 대한 염려로 인해 새로이 검열위원회가 소집되었고 시험공연이 있었다. 1921년 2월 1일 빈에서 시험공연이 있을 때 슈니츨러도 만족감을 보였고 비평가들은 비도덕성에 대해 아무런 반론도 제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집권당인 기독교사회당은 유태인 문학의 영향에 대하여 언급했으며 이 작품을 결국 ‘사창가 작품’이라고 명명했다. 가톨릭 단체는 ‘반 윤무 위원회’를 소집했으며 공연에 대해 경고했다. 2월 16일 공연에는 극장 내에서 반대파들과 이를 보려온 사람들 사이에 충돌이 있었고 마침내 공공의 안정을 위하여 공연금지라는 조치가 뒤따랐다. 1922년 3월 7일 <윤무>는 경찰청의 보호 하에 공연이 재개되었으며 6월 30일 마지막 공연을 마쳤다.

1921년 베를린의 <윤무>에 대한 형사소송은 무죄로 판결이 났으나 빈 극장에서 난투극을 직접 체험한 슈니츨러는 자신의 작품이 오해를 받는다는 사실과 반유태적 증오감을 불러일으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1922년 모든 공연을 거부했다. 저작권 때문에 그 후 <윤무>는 어느 무대에서도 공연될 수 없었다. 슈니츨러가 사망한 후 아들 하인리히는 이를 유언처럼 받아들였고 <윤무>는 1982년 1월 1일에 비로소 무대에 올려질 수 있었다. 이후 새로운 연출이 쌓이고 쌓였으며 <라 롱드(La Ronde)>라는 제목으로 프랑스에서는 영화화되기까지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2006년에 <라 롱드>라는 제목의 뮤지컬로 공연되었다.



차례         
해설
지은이에 대해

본문

옮긴이에 대해

 

본문중에서   
Der junge Herr:
Das Leben ist so leer, so nichtig―und dann,―so kurz―so entsetzlich kurz!
Es gibt nur ein Gĺück… einen Menschen finden, von dem man geliebt wird―

젊은 남자:
삶이란 이렇게 공허하고 이렇듯 허무하고 그리고 이렇듯 짧고-이렇듯 끔직하게 짧소소!
단 하나의 행복만 존재하지… 사랑해 줄 사람을 발견하는 일-

 

나오는 사람들  
창녀
군인
하녀
젊은 남자
젊은 여자
남편
귀여운 소녀
작가
여배우
백작



출판사서평   
<윤무>가 1921년 오스트리아에서 초연됐을 때 외설 혐의로 재판에 회부됐을 만큼 등장인물들은 노골적이고 원색적인 대사를 주고받는다. 하지만 이 작품이 당시에 그토록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이유는 작품의 외설시비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을 묘사하는 정확성 때문이었다. 독자들은 실낱같은 사랑의 희망을 때문에 끊임없이 다른 누군가를 찾아 헤매는 열 쌍의 연인들의 모습을 통해서 현대인이 가진 불안과 모순, 섹스로의 도피를 폭로하는 그 묘사의 정확성에 감탄하게 될 것이다.

 


옮긴이    
최석희는 대구가톨릭대학교 독어독문학과에 재직 중이다. 저서에는 ≪Die unverkaufte Braut≫, ≪그림동화의 꿈과 현실≫, ≪독일어권 여성작가≫(공저), ≪독일문학 그리고 한국문학≫이 있으며 역서에는 ≪힌체와 쿤체≫, ≪오를레앙의 처녀≫, ≪겐테의 한국기행≫, ≪메시나의 신부≫, ≪늑대가 돌아온다≫, ≪내 동생≫ 등 다수가 있다.



별점         
사용자 삽입 이미지
본 포스트의 저작권은 편역자와 출판사에 있으므로, 무단 전재나 재배포를 금지합니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zmanz

댓글을 달아 주세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芥川龍之介 (일본, 1892 ~ 1927) 
그를 부르는 명칭은 다양하다. 이지파, 국민작가, 청춘의 작가 등등. 가장 많이 듣는 칭호는 일본 근대문학의 챔피언이라는 것이리라. 하지만 그것도 관점에 따라 시비가 많을 것 같다. 아쿠타가와(芥川)는 1892년 도쿄(東京)에서 태어나 1927년 36세에 도쿄에서 자결했다. 생후 8개월 만에 생모의 정신분열증으로 외가에 맡겨져 양자로 남게 된다. 그러한 기아 및 양자 체험이 그의 예술과 인생의 전반을 결정하게 된다. 타고난 수재형에다 학자형이던 그는 소위 엘리트코스라 불리는 제일고등학교를 거쳐 도쿄대학교 영문과에서 수학했다. 청년 시절 서구 근대문학의 세례를 받게 되고, 예기치 않게 대학 재학 중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에게 극찬을 받아 습작기도 없이 작가로 화려하게 데뷔하게 된다. 그 후 작가로서의 생은 비록 10여 년에 지나지 않지만, 무려 140여 편이라는 많은 작품을 남기고 있으니 얼마나 치열하게 예술가로서의 삶을 살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장편은 물론이거니와 중편마저 쓸 수 없었던 이 단편의 명수는, 작품 대부분이 동서고금 작품들의 패러디로 지적될 정도로 창의성에 대해서는 논의의 여지가 많다. 하지만 일찍이 세계 각국에서 평가되어 있을 정도로, 박학한 지식과 스토리에 뛰어난 재기 넘치는 이야기꾼으로 문학사에 자리 잡고 있다.

아쿠타가와는 탐미주의나 자연주의나 인도주의 같은 사상적 테두리를 싫어했으며, 문학 이념의 벽을 넘어 보편에 닿고자 열망했다. 그는 일본 전통 미학과도 거리를 둔 채 인간 보편의 심리를 추구했는데, 바로 그러한 일반성에 그의 미학의 진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술과 생활의 틈바구니에서 그저 멍한 불안 때문이라는 유서만을 남기고 죽고 말았듯이, 그가 구하던 이데아란 오히려 지상에서 아득히 먼 별빛에 지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현재 그의 이름은 가장 권위 있는 신인 작가상의 타이틀로 남아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이상에게 문학적 세례를 준 것으로 유명하다.

 

해설         
이 책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대표 단편 세 편을 발췌하지 않고 모두 번역한 것입니다.
이 책은 번역의 원전으로 1987년 이와나미서점(岩波書店)판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전집(芥川龍之介全集)≫을 사용했습니다.

아쿠타가와는 그 이름뿐 아니라 작품도 우리나라에 많이 알려져 있으며 번역도 꽤 되어 있다. 그리고 근자에는 국내 아쿠타가와 연구가들이 모여 전집 번역을 시작했다. 번역을 하면서 새삼 느낀 점이지만, 문학 작품을 번역한다는 것은 그 여정이 참으로 다난하다 싶다. 운문은 두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소설 작품도 그러하다. 이렇게 말하면 엄살로 보이겠지만, 말맛을 살려야지, 생생하게 전달해야지 하는 부담감과 함께, 아쿠타가와 문학을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아쿠타가와의 그 신경질적인 언어감각에 사로잡혀 헤어날 수 없었다. 세 편의 작품 중 가장 힘들었던 것은 고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지옥변>이었다. 시대적·문화적 코드가 일치하지 않아서 왕초보 번역가인 나로서는 거듭 수정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를 들어 의복, 주거, 자연의 이름 등을 우리말에 어울리게 옮기는 작업은 매우 힘든 과정이었다.

저본으로는 1987년 이와나미서점(岩波書店)판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전집(芥川龍之介全集)≫을 사용했다. 세 편 모두 단편이라는 점과 또 서술적 특징 때문에 발췌 및 요약하지 않고 거의 그대로 축자적으로 번역했다. <지옥변>같이 시종이 상전에게 아뢰는 서술 형식이거나 <갓파>처럼 광인이 서술자인 경우, 그 서술적 말맛을 그대로 살려보고자 했다. 다만 세세한 부분에 있어서는, 아쿠타가와식의 우회적 어법이나 영문학도로서 구사한 영어식 표현 등은, 그 의도를 이해하면서도 모르는 척 간결하게 혹은 우리말에 맞게 바꿔버리기도 했다.

작품 선택에서는 나름대로 의도한 바가 있다. 즉 작가의 전·중·후기의 대표 작품을 선정한 것이다. 타고난 이야기꾼으로서, 큰 사상이라는 것도 없고 더욱이 사상적 변용이 없다고 비난받기도 하지만, 아쿠타가와 문학에도 마디는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지옥변(地獄變)>(1918)은 전기의 대표작이다. 이 시기는 일본의 고전에서 제재를 얻어와 패러디하는 작품이 대부분이다. 이 작품도 일본 중세(13세기 초) 설화집 ≪우지슈이모노가타리(宇治拾遺物語)≫에서 제재를 따왔지만, 한편으로 보면 젊은 아쿠타가와 자신의 예술가선언이라 할 수도 있다. 예술과 인생과 정치권력의 삼자 대립 구도를 설정하여, 예술적 승리를 구가하는 예술가의 장엄한 삶을 재창조하고 있다. 자연주의 전성기에 데뷔하여 기성 비평가에게 적지 않게 비판을 받기도 했던 작가의 초기 예술관이 잘 드러나 있는 작품이다. 예술의 승리인가 패배인가의 문제, 딸과 영주와 아버지의 욕망의 삼각구도에 대한 정의, 그리고 딸을 범한 자가 영주인가 아버지인가에 대한 답도 주어져 있다. 아쿠타가와는 자살 직전의 자전적 단편 <하구루마(歯車, 톱니바퀴)>에서 주인공 요시히데(良秀)를 떠올리며 다시 한 번 자신의 삶을 중첩시키고 있다.

<무도회(舞踏會)>(1920)는 중기의 대표작으로 두 가지 관점에서 읽을 수 있다. 하나는 예술과 생활의 이항대립적 구도를 지양하고자 하는 진지한 고민이 결말 부분의 찰나적 폭죽에 투영되어 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무도회장과 아키코(明子)라는 인물은 다름 아닌 서구 근대를 그대로 모방하는 일본 근대를 희화화한 것이라는 점이다. 아쿠타가와가 <지옥변>과 같은 예술지상주의적 태도를 서서히 지양하는 과도기적 작품 중 하나이자, 중기에 집중적으로 보이는 개화물(開化物)로도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프랑스 장교는 실존하는 인물로, 그의 일본 체험을 통해 나온 문장들을 참고하여 완성한 귀여운 단편 중 하나다.

<갓파(河童)>(1927)는 작가 스스로가 ‘걸리버풍 이야기’라고 고백하고 있듯이, 여러 서구 문학의 수용 양상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하지만 걸리버 유의 작품들이 가지는 풍자성을 넘어서고 있다고 생각한다. 일본 근대 지식인으로서의 고립적 삶과 죽음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었던 자의식의 도식을 상징적으로 묘출한, 자살 직전의 유서 같은 작품이다. 근대 지식인들의 예술과 인생을 일본 고유의 민속학적 모티프인 갓파(河童)에 빗대어 그리고 있다. 수직적으로 하강하는 지하세계를 이루고 있는 갓파의 나라는 근대 지식인의 인식 세계라 할 수 있으며, 그 지하세계를 모르는 표층적 인간 나라는 다름 아닌 상식을 바로미터로 하여 살아가는 일상적 세계의 상징인 것이다. 갓파를 보느냐 보지 못하느냐에 따라 광인과 동물의 대립성이 설정되는 것은, 중국 근대소설 루쉰(魯迅)의 <광인일기(狂人日記)>와 유사한 면이 있다. 갓파를 보지 못하는 자가 동물도 아니거니와 갓파를 본 자가 광인도 아니라는 이중 부정에서 상통하는 면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적인 니힐리즘으로 맺고 있다는 점에서는 상이하다. 이 작품은 인물들의 이름이나 여러 설정들을 퀴즈를 풀듯이 읽을 수 있는 재미있는 작품이다.

고백컨대, 오래전부터 문학 작품 번역에 대한 동경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경험과 요령이 부족한 실정이다 보니 어휘력과 표현력 그리고 어학 실력에 대한 깊은 반성만 남았다. 결국, 일본어와 한국어라는 양면의 화폭에 아쿠타가와라는 그림을 완성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다 극복하지 못한 채 원고를 내놓게 되었다.

 

차례         
해설
지은이에 대해

지옥변(地獄變)
무도회(舞踏會)
갓파(河童)

옮긴이에 대해



출판사서평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사상적 흐름을 읽을 수 있도록 전·중·후기의 대표 작품 세 편을 모았다. 자신의 딸이 화마에 휩싸인 순간에도 그림에만 몰두하는 지독한 열정의 화가 요시히데와, 파업을 일으킬 경우 모두 죽여 그 고기를 먹어버리는 ‘갓파’ 세상의 모습 등을 통해, 그의 뛰어난 예술적 상상력과 패러디 정신을 확인할 수 있다. 그가 일본에서 가장 권위 있는 신인 문학상의 이름으로 회자되며 여전히 사랑받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본문중에서   
其処には丁度赤と青との花火が、蜘蛛手に闇を弾きながら、将に消えようとする所であつた。明子には何故かその花火が、殆悲しい気を起させる程それ程美しく思はれた。

「私は花火の事を考へてゐたのです。我々ののやうな花火の事を。」

暫くして仏蘭西の海軍将校は、優しく明子の顔を見下しながら、教へるやうな調子でかう云つた。

거기에는 마침 빨갛고 파란 폭죽의 불꽃이 사방팔방으로 방사선처럼 어둠을 가르며 마침 꺼지려는 참이었다. 아키코는 왠지 그 불꽃이 슬플 정도로 아름답게 느껴졌다.

“나는 불꽃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들의 인생과 같은 불꽃을.”

잠시 후 프랑스 해군 장교는 아키코의 얼굴을 내려다보면서 가르치는 듯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옮긴이        
김명주(金明珠)는 경상대학교 국어국문과와 같은 대학원을 나와, 일본 나라여자대학(奈良女子大学) 국문과에서 석박사과정을 수료하고, 고베여자대학(神戸女子大学)에서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금은 경상대학교 사범대학 일어교육과에서 일문학사와 일문학개론 등을 가르치고 있다. 주로 한일 근대문학 비교연구를 하고 있다.

 

별점          

사용자 삽입 이미지

 

 

본 포스트의 저작권은 편역자와 출판사에 있으므로, 무단 전재나 재배포를 금지합니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zmanz

댓글을 달아 주세요

프리드리히 뒤렌마트Friedrich Dürenmatt (독일, 1921~1990)
프리드리히 뒤렌마트(1921∼1990)는 스위스 태생의 독일어권 작가로서 전후 가장 위대한 드라마 작가로 평가된다. 뒤렌마트의 작품은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영화화 되는 등 세계적인 성공을 거두었으며 사무엘 베케트나 오이게네 이오네스크와 더불어 현대 속의 고전 작가로 인정받는다.

뒤렌마트는 희비극의 장르를 발전, 정착시켰으며 신과 인간 구원의 문제, 자유와 정의의 문제 등 철학적 테마를 독특한 드라마 기법을 사용해서 지속적으로 분석하고 실험한 작가다. 뒤렌마트는 자신이 관찰하고 성찰한 것을 그로테스크, 패러독스, 풍자와 아이러니, 유머를 통해 희극화 함으로써 관객의 쓴 웃음과 성찰을 자아내는 데 특별한 기량을 보였다. 그는 어떤 영웅적 결단도 내릴 수 없는 현대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반성 외에는 없다는 신념의 소유자였다. 뒤렌마트는 항상 작품을 통해서 시대의 문제에 정열적으로 반응했고, 시대를 비추는 거울을 받쳐 드는 비평가적인 면모를 보여 주었다.

뒤렌마트는 매 작품마다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기발한 착상으로 관객과 독자의 흥미와 긴장을 고조시키는 데 탁월한 역량을 보였다. 로마를 멸망시키기 위해 집권한 로무르스, 장님만이 볼 수 있다고 주장하는 장님 공작, 자신이 발견한 과학 원리를 은폐하기 위해 정신 병원에 입원하는 물리학자, 자살을 기도하지만 죽지 못하는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결혼에 대해 살인죄의 형량을 내리는 검사, 정의를 돈으로 사겠다는 노부인, 환경 미화원이 되어버린 헤라클레스 등등의 역발상들은 유머와 결합되어 관객이나 독자들의 통념적 사고의 틀을 깬다.

1940년부터 뒤렌마트는 집필 활동을 시작했으나 1947년에야 본격적인 작품 활동의 소산인 드라마 <쓰여져 있느니라>를 출간했다. 그 후 <장님>(1948) <로무르스 대제>(1949), 범죄 소설 ≪판관과 형리≫(1951) ≪혐의≫(1952)를 발표했다. 1952년에는 기독교 신앙의 코메디라고 불리는 <미시시피 씨의 결혼>을 발표했다. 그가 독자들의 호응을 받은 작품들은 <로무르스 대제>나 <미시시피 씨의 결혼>과 같은 문학적 가치가 높은 작품이 아니라 그의 탐정소설이었다. 경제 사정이 악화되자 쓰기 시작한 탐정소설들은 미국과 영국에서 많은 인기를 끌었으며 교과서에 실리기까지 했다. 1953년에 <천사, 비빌론에 오다> 를 발표한 이후 1956년에 상연된 <노부인의 방문>은 뒤렌마트에게 세계적인 성공을 안겨 주었으며 영화로 만들어 지기도 했다. <프랑크 5세>(1959)이후에 발표된 <물리학자들>(1962)은 <노부인의 방문>과 더불어 세계적인 성공을 거두어 뒤렌마트에게 세계적인 작가로의 기반을 굳혀 주었다. 이후 뒤렌마트는 브레히트 이후 가장 뛰어난 독일어권 작가로 인정받게 된다. 이미 1954년 라디오 드라마로 발표되었던 <헤라클레스와 아우기아스의 외양간>을 1963년에 연극 대본으로 개작해서 무대에 올렸다. 드라마 외에도 뒤렌마트는 <이중인간>(1946) <경멸받는 인간과의 밤의 대화>(1952), <고장>(1955)등 여덟 개의 방송극을 집필했다.

1970년대에 나온 대표작으로는 <지구의 초상화>, <공범>, <유예>등의 드라마가 있다. 1977년 이후 뒤렌마트는 자신의 이념을 표현하기에 드라마가 적합한 수단이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해서 드라마 집필을 중단하고 주로 산문 작품에 몰두해서 <사법기관>(1985), <주문>(1986) <헝클어진 골짜기>(1989)등을 집필했다. 특히 1970년대에 그의 작품들은 독일어권 국가에서 베스트셀러의 자리를 꾸준히 유지했으며 특히 독일에서 무대에 가장 많이 오르는 작품으로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또한 문학계는 뒤렌마트를 현대의 고전작가로, 60세에 신화가 되어버린 존재라고 최고의 찬사를 던졌다.

작품 활동 외에도 뒤렌마트는 핵무기를 반대하고 고르바초프의 개방정책을 지지하는 등 세계 평화 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1990년 12월 14일 노이샤텔에 있는 저택에서 심장마비로 영면했다.



해설         

이 작품은 원전의 분량이 많지 않으므로 발췌하지 않고 모두 번역하였습니다.
이 책은 디오게네스 출판사가 출간한 ≪Herkules und der Stall des Augias≫(1980)을 원전으로 사용하였습니다.

뒤렌마트는 1954년 라디오 드라마로 발표했던 <헤라클레스와 아우기아스의 외양간>을 1963년에 연극 대본으로 개작해서 무대에 올리고 다시 1980년에 개작해서 발표했다. 이 책은 1980년에 개작되어 디오게네스 출판사에서 출판한 개정판을 완역한 것이다.

이 작품은 헤라클레스의 열두 개의 노역 가운데 다섯 번째에 해당하는 아우기아스의 외양간지기에 관한 패러디가 주요 내용이다. 그리스 신화의 등장 인물 중 지상에서 가장 힘이 센 영웅으로 알려진 헤라클레스는 제우스 신과 인간 알크메네 사이에서 태어난 반신반인(半神半人)이다. 헤라클레스는 그가 행한 열두 개의 노역(勞役)으로 유명한데 그가 왜 노역을 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신화학자들 사이에 이견이 있다. 그러나 헤라클레스의 노역의 배경에는 제우스의 아내인 헤라의 간계가 작용했다는 점은 신화학자들의 공통된 견해이다. 헤라는 남편인 제우스와 다른 여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헤라클레스를 용납할 수 없었다. 헤라가 헤라클레스에게 한 복수는 그녀가 제우스의 혼외자식에게 했던 복수들 중에서 가장 치열하고 집요한 방식이었다.

뒤렌마트는 이 작품에서 전 그리스인의 경탄과 찬사를 받았던 헤라클레스를 몰락한 소시민적 부르주아로 탈바꿈시킨다. 헤라클레스는 일반 시민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생업에 종사하는 직업인일 뿐이다. 이 작품 속에서 헤라클레스의 노역은 그리스의 신화와는 정반대로 하나도 성취되지 못한다. 신화에 나오는 노역은 일감, 직업과 동일시되며 헤라클레스는 사례금을 받아 아내를 부양해야 하는 가장으로 등장한다. 헤라클레스는 부채를 갚기 위해 엘리스 국의 쓰레기를 치우는 노역을 하게 된다. 쓰레기 치우는 일 따위는 수치스럽게 생각하는 헤라클레스가 외양간지기가 되기로 결심을 한 이유는 애인 데이아네이라가 빚을 갚기 위해 매춘을 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쓰레기에 매몰되기 직전인 엘리스국은 쓰레기 처리를 위해서 헤라클레스를 고용한다. 돈을 벌기 위해서 쓰레기 처리에 나선 헤라클레스는 쓰레기를 강물로 쓸어버리려고 하지만 수자원국이 제동을 건다. 헤라클레스에게 엘리스 인들이 계속 관청의 허가를 받을 것을 요구하자 의욕을 상실한 헤라클레스는 결국 쓰레기 처리에 실패한다. 이렇게 뒤렌마트는 제도와 규제에 얽매어 아무 것도 성취할 수 없게 만드는 관료주의의 병폐를 풍자한다.

이러한 풍자는 쓰레기 문제를 논의하는 시의회 장면에서 의원들이 각자 상이한 의견과 주장을 내놓자, 그 주장과 의견을 검토하기 위해서 또 다른 위원회가 구성되는 부분에서 절정을 이룬다. 또한 하나의 목표를 세웠으나 다양한 이유로 그 목표를 포기해버리는 민주 국가체제에 대한 풍자도 엿볼 수 있다. 민주주의 체제가 복지부동의 관료주의 체제로 경직되면 결국 공허한 토론과 아무런 성과도 이루지 못하는 행정체계를 존속시킬 뿐임을 보여준다. 인간이 만들어 낸 제도와 기구를 인간이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제도와 기구가 인간을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또 아우기아스를 통해 법치국가에 대한 풍자가 드러나는데 아우기아스는 목표 달성과는 상관없이 오직 민주국가의 법을 준수하는 것이 최우선임을 강조한다. 따라서 상황의 개선이나 목표 달성과는 배치되는 법치민주주의 원칙만을 고수 하려는 것이 얼마나 모순인가를 보여준다.

쓰레기 처리의 실패로 더욱 궁핍하게 된 헤라클레스는 서커스에서 힘 자랑으로 돈을 벌려고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다. 헤라클레스는 강한 육체적 힘을 가졌지만 정작 그 힘은 빚을 갚고 생계를 유지하는데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한다. 기술 자본주의 경제 체제하에서 그의 육체적 힘은 효용가치를 잃었다. 총알 하나가 헤라클레스의 힘을 대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엘리스의 대통령인 아우기아스는 여러 면에서 뒤렌마트의 또 다른 희극 <로무르스 대제>의 로무르스를 연상시키는 인물이다. 로무르스가 로마를 멸망시키기 위해 양계(養鷄) 외에는 어떤 일도 하지 않으려는 현자이듯이 아우기아스는 감춰진 영웅으로서 자신의 영토 내에서 개인이 이룰 수 있는 최상의 것을 성취하는 뒤렌마트적인 용감한 인간이다. 아우기아스는 인간으로 가능한 것을 개인적 영역에서 쓰레기 더미를 자신의 정원으로 만들면서 성취한다. 아우기아스는 쓰레기 더미가 된 국가는 더 이상 변화하거나 개선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사적인 영역에서 스스로의 노력으로 작은 파라다이스를 건설한다.

이 작품 속에는 법치국가와 관료주의에 대한 풍자 외에도 학벌, 통신 기밀, 흥행 산업 등 현대사회의 제반현상에 대한 풍자가 나온다. 헤라클레스의 비서인 포리비오스는 헤라클레스의 폭력으로 세 번이나 사지가 부러진 경험이 있지만, 헤라클레스의 곁을 떠나지 못하고 그의 비서직을 수행한다. 왜냐하면 포리비오스는 대학 졸업장이 없어서 다른 곳에 취직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생명을 잃을지언정 직장을 그만둘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를 통해 뒤렌마트는 학벌 위주의 사회를 풍자한다.

이상 언급한 모든 풍자는 결국 영웅을 풍자하기 위한 배경적인 것이고, 근본적인 풍자는 영웅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영웅에 대한 풍자를 통해 영웅이 몰락하고 소멸할 수밖에 없는 시대가 왔음을 강조한다. 힘과 영웅은 시대와 더불어 변화한다. 헤라클레스의 무서운 괴력은 기술 자본주의 산업시대의 직업인에게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헤라클레스가 물리쳐야 할 거대한 괴물들은 환경보호제도에 맡겨졌으며 도둑 기사들은 정치계에 유입되었기 때문에 헤라클레스는 직업의 근간을 잃게 되고 엘리스 국의 청소나 스팀팔리엔의 새 떼 소탕작업에 투입된다.

이 작품의 드라마적 구상은 뒤렌마트 자신의 세계관의 시적 표현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는 세계 자체를 하나의 괴물로 생각했다. 따라서 극 속에 등장하는 쓰레기, 관청, 인간들은 헤라클레스가 극복해야 할 괴물들이다. 괴물의 하나인 쓰레기를 처치하려는 헤라클레스의 노력은 또 다른 괴물인 관청과 새로운 것에 두려움을 갖는 인간들에 의해 좌초된다.

영웅은 뒤렌마트적인 용감한 인간으로 대체되고 아우기아스처럼 쓰레기 더미 위에 정원을 만드는 일이 뒤렌마트적 용감한 인간의 과업이다. 뒤렌마트는 용감한 인간형을 제시하는 것을 그의 작품의 중요한 과제로 삼아 반 영웅의 시대에 영웅을 대체하고 있다. 뒤렌마트의 용감한 인간은 무의미로부터 의미를 산출해서 인간의 가슴 속에 세계 질서를 다시 세우는 사람이다.

 

차례         
해설
지은이에 대해

헤라클레스와 아우기아스의 외양간

옮긴이에 대해

 

본문중에서   
Die Gnade, daß unsere Welt sich erhelle, kannst du nicht erzwingen, doch die Voraussetzung kannsr du schaffen, dasß die Gnade-wenn sie kommt- in dir einen reinen Spielgel finde für ihr Licht.

우리의 세계를 밝혀줄 은총을 너는 강요해 받을 수 는 없다. 하지만 은총이 내려온다면 네 속에서 빛을 위한 순수한 거울을 발견할 수 있도록 적어도 전제조건은 만들어 놓아야 한다.

 

나오는 사람들
헤라클레스: 민족 영웅
데이아네이라: 헤라클레스의 애인
포리비오스: 헤라클레스의 비서
아우기아스: 엘리스국의 대통령
필로이스: 아우기아스의 아들
이올레: 아우기아스의 딸
캄비세스: 외양간 머슴
리카스: 우편배달부
탄타로스: 서커스 단장
열 명의 의원들
두 명의 무대 인부들


출판사서평  
38만 청년 실업시대, 신화 속 영웅 헤라클레스도 취업난을 피할 수 없다. 실직자가 된 그는 빚을 갚기위해 동분서주한다. 외양간 쓰레기 치우기, 서커스에서 차력쇼 하기, 새떼 쫓기 등 가리지 않고 닥치는대로 일하지만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뒤렌마트는 신화 속 인물들을 처절하고 남루한 현실로 끌고 들어옴으로써 존재하기 위해 투쟁해야 하는 현대인의 지친 삶을 풍자한다.


옮긴이       
황혜인은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독문과를 졸업하고 독일 마인츠 대학에서 독문학마기스터 학위를 취득했다. 마인츠 대학을 졸업한 후에 독일 본 대학교에서 독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동국대학교 독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요 저서와 논문으로는 ≪뒤렌마트의 희비극≫(자연사랑, 2004), <알프레드 되플린과 헤르만 카삭 비교연구>, <그릴팔쪄 연구>, <괴테와 쉴러>, <레씽의 에밀리아 갈로티 연구>, <브레히트의 갈릴레이의 생 연구> 외 다수가 있다. 역서로는 ≪천사 바빌론에 오다≫(책세상, 2007), ≪사포≫(박이정, 2005), ≪메데아≫(박이정, 2007)가 있다.

 

별점         

사용자 삽입 이미지

 

 

 

본 포스트의 저작권은 편역자와 출판사에 있으므로, 무단 전재나 재배포를 금지합니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zmanz

댓글을 달아 주세요

프라마하몬뜨리(쌉) พระมหามนตรี(ทรัพย์) (태국, ?~1845?)    
태국에 성씨(姓氏) 제도가 도입된 시기는 라마 6세(1910∼1925) 때다. 그전에는 한두 음절로 된 이름만 있었다. 라마 3세(1824∼1851) 때 활동했던 프라마하몬뜨리(쌉)[또는 프라마하몬뜨리옹카락(쌉)]는 끌런에 매우 능했고, 싹디나 2000라이 급(級)의 당시 궁정 내 경찰이었다는 기록과 작품 두 편 외에는 알려진 바가 없다.

그 관등명으로 보아 가문은 알 수 없으나 이름과 직책은 알 수 있다. 괄호 안의 ‘쌉’이 그의 본명이고, ‘프라마하몬뜨리옹카락’은 관직명이다. 그의 관등은 ‘프라’ 급이고 관직이 ‘옹카락’인 것으로 보아 왕이나 왕실의 호위를 맡고 있는 궁정 경찰이나 근위대로 보인다. ‘옹카락’이 왕으로부터 사령장을 수여받은 관등이라는 뜻을 함유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 그는 왕궁을 지키는 경찰대나 근위대에 소속된 고위 관료였던 것 같다. ‘마하몬뜨리’는 그 직의 우두머리임을 말해준다.

관등이나 관직명 뒤의 괄호 안에 한 음절로 된 이름이 들어 있는 현상은 성이 아직 없었던 시대에 활동했던 작가 중 이름이나 관등이 겹치는 경우에 흔히 일어나는 현상이다. 라마 1세 때에 활동했던 작가 짜오프라야프라클랑(혼)은 거의 같은 시대에 활동했던 루엉써라위칫(혼)과 관등명과 이름을 함께 씀으로써 구별하고 있다.

당시 태국 관등은 맨 위로부터 쏨뎃짜오프라야, 짜오프라야, 프라야, 프라, 루엉, 쿤, 믄, 판, 타나이 9등급이었는데, 쿤 이상의 관료는 사회적으로 고급 관료로 간주되고, 왕을 알현할 수 있었다. 9등급 중 상위 2등급은 대체로 왕족이 전담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프라’ 급이 비교적 높은 관직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프라마하몬뜨리(쌉)는 라마 1세 때에 태어나 1845년경이나 그 이전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 인물로, 태국의 대문호라 일컫는 쑨턴푸−프라쑨트라워한(푸)−와 거의 동시대 인물로 평가될 뿐 더 자세한 이력이나 생활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그의 작품으로는 라마 2세의 작품인 ≪극본 이나오≫를 패러디한 작품이라 평가되는 ≪라덴 란다이≫ 외에 경찰의 권력 남용 사실을 고발한 ≪플렝야우ᐨ밧쏜테≫가 있다. 나중 작품은 그가 왕궁 경찰의 검을 보관해 두는 무기고에 숨겨두었으나, 그의 생존 시 다른 동료에 의해 발견되어 공개되었다고 하는데, 이 고발 작품으로 인해 그의 문학적 명성이 알려졌고 동료들은 앞을 다투어 그 작품을 베꼈다고 전한다. 그의 두 작품의 성격으로 보아 그는 시대성에 민감하였음을, 특히 비윤리적이거나 부도덕한 사건에는 그 대상이 누구건 간에 가만히 있지 못하는 정의감이 강한 성격의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해설         

국내 최초 번역입니다.

이 책은 ≪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