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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부지   王夫之(중국, 1619~1692)


왕부지(王夫之, 1619~1692)는 자(字)가 이농(而農), 호(號)는 강재(薑齋)이며, 호남(湖南) 형양(衡陽) 사람이다. 만년에 형양 석선산(石船山)에 은거하여 후인들은 그를 선산선생(船山先生)이라 불렀다. 명말청초(明末淸初)의 위대한 사상가, 애국주의자, 유물주의자이다. 명말청초의 시대적 격변 속에서, 왕부지는 청(淸)에 저항하여 형산(衡山)에서 기의(起義) 하였고, 청(淸)의 체포를 피해 여러 지역을 유랑하였다. 남명(南明)의 영력(永曆) 정권에서 명(明)의 부흥을 꿈꾸었지만, 당시 정치현실에서 환멸과 분노만을 느꼈다. 만년에 석선산으로 돌아와 모옥(茅屋)을 지어 은거하며 생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학문연구에 몰두하여 100여 종 400여 권에 달하는 고귀한 정신유산을 역사상에 남겼다. 그 중 ≪주역내·외전(周易內·外傳)≫, ≪상서인의(尙書引義)≫, ≪독사서대전설(讀四書大全說)≫, ≪독통감론(讀通鑑論)≫, ≪장자정몽주(張子正蒙註)≫등은 그의 사상을 대변하는 것이다.

내용 소개

☑ 국내 최초 소개

이 작품은 축자(逐字: 글자 하나하나를 따라) 번역을 한 것으로 원전의 조사 한 글자라도 그대로 살렸습니다. 대명사 등은 전후문맥을 읽어 수비게 짐작할 수 있는 것은 그대로 두었고 짐작하기 어려운 것은 괄호 안에 보충하였습니다.
이 책은 <시역>, <석당영일서론내편>, <석당영일서론외편>, <남창만기> 4권의 150조 중 54조를 실었습니다(약 36% 발췌).

동서고금의 시론 연구가들은 ≪강재시화≫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졌다. 우선 왕부지는 ≪강재시화≫를 통하여 중국 시론에서 핵심 문제인 ‘정경교융(情景交融)’의 이론과 실천 체계를 완성하였다. 때문에 중국 시론 연구가들은 ‘정경교융’의 문제를 탐구하는 데 있어서 왕부지의 ≪강재시화≫의 ‘정경교융’에 관한 논술을 그들 논의의 입론과 결론으로 삼았다. 또한 ≪강재시화≫는 공자(孔子)의 ‘흥관군원(興觀群怨)’에
한 해석에서 주목을 받았다. 왕부지는 공자의 ‘흥관군원’을 심미적으로 해석하고 참신하게 운용하고 독창적으로 발휘시킴으로써 그것이 시가의 창작, 비평, 감상 원리가 되게 하였다. 공자의 ‘흥관군원’은 실로 왕부지에 의하여 하나의 새로운 시론 유산이 되었다. 그리고 ≪강재시화≫는 유가 전통을 대전제로 하면서 도(道), 불(佛)로부터 사상적, 미학적 요소를 흡수하고 또한 서화(書畵) 등 각종 예술 영역에서 예술 관점을 수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색을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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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평점은 출판사의 주관적인 의견으로 작품의 가치와는 무관합니다.

 

머리말 중에서

왕부지(王夫之)의 100여 종 400여 권에 이르는 저작은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오랫동안 매몰되었다. 왕부지는 만년에 궁핍한 생활을 하여 서적은 물론 저술에 필요한 종이나 붓마저도 살 수가 없어서 친한 친구나 문생들에게 빌려야만 했다. 저작이 완성되면 그들에게 주어버렸기 때문에 그의 후손에 남겨진 것은 없게 되었다. 또한 어떠한 유명인사와도 교분이 없이 오로지 학문 연구에만 몰두하여 그의 이름이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그리고 왕부지는 청조(淸朝)에 끝까지 저항하였기 때문에 그의 저작들은 대부분 금서(禁書)로 지목되었다.

왕부지 사후 10여 년 만에 아들 왕어(王敔)가 친지의 도움을 받아서 10종의 유저를 정리, 간각하였지만 전파의 범위가 넓지는 못하였다. 그 뒤 왕부지의 저작들이 수집되고, 세인들의 관심이 높아지자 몇 차례 간각이 진행되었다. 1842년에 왕부지 후손의 수장본이 《선산유서(船山遺書)》로 간각되었는데 모두 18종이었다. 1865년에 증국번(曾國藩)ㆍ증국전(曾國筌) 형제가 금릉(金陵)에서《선산유서》를 간각하였는데 56종 288권이었다. 1933년에 상해(上海) 태평양서점(太平洋書店)에서 70종에 이르는 《선산유서》를 출판하였다. 최근 중국(中國) 호남(湖南) 악록서사(嶽麓書社)에서는 1988년에서 1996년까지 장기간의 계획을 세워 그동안의 각종 판본들을 참고, 대조하여 엄밀한 교열과 정확한 표점작업을 하여 획기적인 전 16책의 《선산전서(船山全書)》를 출간하였다.

왕부지의 저작 가운데 ≪강재시화(薑齋詩話)≫란 명칭은 본래 왕부지에 의하여 명명된 것이 아니다. 1843년에 추한훈(鄒漢勛) 등이 편찬, 교열하고 등현학(鄧顯鶴) 등이 교감하여 18종 150권의《선산유서》를 간각하였는데, 등현학이 왕부지의 저작 중에서《시역(詩譯)》,《석당영일서론내편(夕堂永日緖論內篇)》,《남창만기(南窓漫記)》를 각각 권일(卷一) 《시역》, 권이(卷二) 《석당영일서론내편》, 권삼(卷三) 《남창만기》라 하여 이를《강재시화》 삼권이라 한 데서 유래되었다. 그러나 정복보(丁福保)의 《청시화(淸詩話)》에서는 《시역》과 《석당영일서론내편》 2권만을 《강재시화》에 포함시켰다. 대홍삼(戴鴻三)의 《강재시화전주(薑齋詩話箋注)》(이하《전주(箋注)》로 약칭)에는 이상의 4권 모두를 전주(箋注)의 대상으로 하였지만, 《석당영일서론외편》을 부록(附錄)으로 처리하였다. 악록서사(嶽麓書社)의 《선산전서(船山全書)》 15책의 《강재시화》에는 이상의 4권 모두를 포괄하였다. 이처럼 왕부지의 《강재시화》는 편자의 시각에 따라 달리 편제되었다.

차례

해설
지은이에 대해


≪시역(詩譯)≫

第2條: “시(詩)로 흥기할 수, 관찰할 수, 함께할 수, 원망할 수 있다는 것”은 지극한 것이다

第3條: 뜻이 먼저 가슴 속에 온양되고, 작품이 완성된 뒤에도 흘러 퍼져야

第4條: 즐거운 경물(景物)로 슬픔을, 슬픈 경물(景物)로 즐거움을 표현하면, 그 감정은 배가되어 드러나

第7條: 간결한 언어의 극치

第8條: 경물의 본질까지 묘사해야

第10條: 시구(詩句)는 끝났지만 시어(詩語)는 이어지고, 시운(詩韻)은 변했지만 시의(詩意)는 변하지
           않아야

第12條: 시가 역사가 되지 못하는 것은 입과 눈이 서로를 대신하지 못하는 것과 같아

第14條: 사리(思理)가 있어야 시를 이해할 수 있어

第16條: 경(景)은 정(情)을 낳고, 정(情)은 경(景)을 낳아


≪석당영일서론내편(夕堂永日緖論內編)≫

第2條: 시가나 문장은 모두 ‘표현하고자 하는 뜻(意)’이 주가 되어야

第3條: ‘세(勢)’를 취해서 ‘의(意)’를 표현해야

第4條: 고아하고 초탈한 ‘가슴’이 있어야 훌륭한 작품이 나와

第5條: ‘정(情)’에 따르고 ‘경(景)’에 따르면 자연 영묘(靈妙)해져

第6條: ‘빈(賓)’과 ‘주(主)’가 하나로 융합되어야

第7條: 몸으로 경험하고 눈으로 목도하여 솟아나는 형상을 표현해야

第9條: 고시(古詩)에는 천연의 뛰어넘을 수 없는 법도가 있어

第13條: 사법(死法)이 세워지는 것은 식량(識量)이 협소하기 때문

第14條: ‘정(情)’ 속에 ‘경(景)’이 있고 ‘경(景)’ 속에 ‘정(情)’이 있어야

第16條: 마음으로 느끼고 눈으로 보는 가운데서 뛰어난 시구가 나와

第18條: ‘장법(章法)’으로 시법을 삼아야

第20條: 음률은 귀에 감미롭고 마음에 화합을 이루어야

第24條: 경(景)을 묘사한 말이라도 정(情)이 깃들어 있어야                                       

第27條: 경물에 직면 감흥(感興)을 일으키고, 경물을 체험 신리(神理)를 얻어야

第29條: 문파가 세워지면 예술 생명은 사라져

第30條: 문파의 건립은 ‘건안(建安)’에서 시작

第31條: 문파가 세워지면, ‘재자(才子)’, ‘명가(名家)’로 일컬어지는 것은 까닭이 있어

第35條: 창작에서 출처를 구하는 것은 가소로운 짓

第38條: 칠언절구는 솔직담백하게 필치를 운용하고 자연스럽게 써야

第42條: 지척(咫尺)에 만리(萬里)의 기세가 있어야

第43條: 오언, 칠언절구의 이상적인 작법

第45條: 여러 종류의 ‘악시(惡詩)’

第47條: ‘악시(惡詩)’보다 더욱 천한 것은 고용 시인의 시


≪석당영일서론외편(夕堂永日緖論外編)≫

第2條: 이백(李白)과 두보(杜甫)가 대가(大家)가 된 것은 까닭이 있어

第6條: 경의(經義)의 이상 작법

第7條: 한 글자라도 생사와 관련된 것처럼 사용해야

第9條: 대우(對偶)는 뜻으로 주인을 삼아 영활(靈活)하게

第11條: 한 편에는 하나의 뜻을 표현해야

第12條: 경의(經義)는 그 고유의 체제가 있어

第14條: 대가(大家)는 ‘사법(死法)’을 묵수(墨守)하지 않아 

第23條: 생동적인 글자를 죽은 글자로 대신할 수 없어

第25條: 고인의 문장은 자신의 마음으로 읽고 그 정수를 얻어야

第32條: 뜻을 충분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라면 어려운 글자라도 피하지는 않아

第33條: 글을 짓는 사람은 말을 반드시 신중하게 가리고 골라서 써야

第34條: 고금 서적을 섭렵하여 속루(俗陋)를 제거하고, 심령이 발동하여 예술미를 추구해야

第36條: 이지(李贄)는 말재주로 천하를 현혹

第37條: 문장은 본래 청정한 선업(善業)

第44條: 글도 반드시 충직하고 신실한 행위를 바탕으로 해서 나와야

第54條: 천직(天職)을 끝맺지 못했는데, 하늘이 무너지고 문장이 끊어지니 목이 메어


≪남창만기(南窗漫記)≫

第1條: 나의 부친에 대한 감회

第3條: 양동명(梁東銘) 선생의 시는 청아하고 빼어나

第4條: 망우(亡友) 문소용(文小勇)의 유유자적한 생활

第5條: 대련(對聯)은 간명(簡明)함을 위주로 하기 때문에 공교하기 어려워

第6條: 임오(壬午)년 초가을에 벗들과 회동

第10條: 고휘전(高彙旃)선생의 귀감이 되는 말


역주자에 대해

같이 읽으면 더 좋은 지만지 작품
공자와 그의 제자들 《시경》

역자 조성천 을지대 중문과 

조성천(趙成千)은 고려대학교 중어중문학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대학원 중어중문학과에서 <왕선산시론연구(王船山詩論硏究)>로 석사학위를, <왕부지(王夫之) 시학(詩學)의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경성고등학교, 홍익대학교사범대부속여고 교사, 고려대학교, 홍익대학교 강사 등을 거쳐 현재 을지대학교 조교수로 재직 중이다. 왕부지(王夫之) 시론 연구 논문으로 <왕부지 시론상의 ‘흥회(興會)’ 개념에 대한 고찰>, <왕부지 시론상의 ‘현량(現量)’에 대한 시가 미학적 고찰>, <왕부지 시론상의 ‘의세(意勢)’론>, <중국 시론상 ‘흥회(興會)’의 역사성과 문예미학적 의의>, <왕부지 ‘흥관군원(興觀群怨)’에 대한 해석과 운용>, <왕부지 시론상의 ‘온유돈후(溫柔敦厚)’론>, <왕부지 ≪시역(詩譯)≫의 ‘간지(簡至)’·‘운의불쌍전(韻意不雙轉)’론 고찰>, <왕부지 시론의 형성배경(1)-부형(父兄)과 스승의 영향을 중심으로> 등이 있다.


분류 중국 시론

편집 후기

아아, 안녕하세요. ≪강재시화≫의 독자 여러분.

≪강재시화≫, 열심히 읽고 계신가요? ≪유림외사≫ 3회에 보면 주 학도가 범진이라는 늙은 인재를 선발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유림외사≫의 홍보가 아닙니다. 오해 없으시길. 하지만 ≪유림외사≫도 재밌다는 거~) 흠흠, 어쨌든 다시 돌아가서, 요즘으로 치면 장수로도 다 표현하지 못할 최장수생인 범진이 불쌍하여 범진의 답안을 읽어보지만 당췌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주 학도는 범진의 글을 다시 한 번 읽고는 무릎을 치며 감탄해마지 않습니다. 쉽고 재밌는 글, 너무도 많습니다. 어디 글 뿐인가요. 책장넘기는 수고도 덜어주는 영상도 많습니다. 하지만 때로 곱씹는 책이 더 맛있다는 것, ≪강재시화≫의 독자들은 잘 아시지요? ≪강재시화≫는 시론집으로 옛 사람들의 문학관을 엿볼 수 있는 책이지만, 시간의 괴리만큼 언어의 장벽이 높습니다. 물론 저희도 열심히 읽어가며 만들었습니다. 조성천 선생님이요? 아유, 선생님께서는 토요일에도 직접 편집실에 방문하시어 꼼꼼히 수정, 보완하시는 열정으로 저희를 감동케 하셨답니다. 여러분, 꼭꼭 씹어 잘 소화하시면 틀림없이 든든한 마음의 양식이 될 것입니다.

2008년 1월 15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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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zman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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