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무 Reigen

분류없음 2008/07/10 08:29

아르투어 슈니츨러 Arthur Schnitzler (오스트리아, 1862~1931) 
아르투어 슈니츨러(Arthur Schnitzler, 1862∼1931)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부유한 유태인 의학교수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그 역시 의학을 공부한 의사였다. 1886년부터 병원에서 일했으며 1893년부터 개업했으나, 생의 대부분을 작가로 활동했다. 작가 초기에는 주로 희곡을 집필했으며, 휴고 호프만슈탈(Hugo von Hofmannsthal, 1874∼1929)과 친구였고, 스스로 자신의 ‘정신적 도플갱어’라고 부르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적 기법을 많이 사용했다. 대표적인 희곡으로는 <아나톨(Anatol)>, <사랑의 유희(Liebelei)>, <윤무(Reigen)>, <광활한 땅(Das weite Land)>, <베른하르디 교수(Professor Bernhardi)>를 들 수 있다. 만년에는 희곡보다 소설을 썼으며 대표적인 단편소설로는 <구스틀 소위(Leutnant Gustl)>, <엘제 양(Fräulein Else)>, <야외로 가는 길(Der Weg ins Freie)> 등이 있다.

 그는 오랫동안 도나우 왕정의 퇴폐를 묘사하는 작가로 낙인 찍혔으며 모든 작품에서 당시 세기말 빈의 분위기를 묘사하고 있어 풍속 묘사가로, 그의 문학은 오락문학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슈니츨러의 문학에 대한 이러한 평가절하는 무대를 사회비판의 장으로 바꾸어놓기는 하지만 구체적으로 사회변혁을 추구하고 있지는 않다는 인식 때문이다. 1960년이 지나서야 슈니츨러는 사회전통의 압박, 소외, 고독, 자유와 헌신, 거짓과 실제에 대한 갈등을 예리하게 분석하는 작가로 평가되었으며 체호프처럼 위대한 인간묘사가의 한 사람으로 인식되었다.

 1914년까지 슈니츨러는 오토 브람(Otto Brahm)의 연출로 빈 부르크테아터뿐만 아니라 베를린극장에서도 가장 많이 상연된 희곡작가에 속한다. 슈니츨러는 1931년 사망할 때까지 멸망한 사회의 연대기 작가로 평가받았는데 이는 그가 뒤늦게 단편소설 쪽으로 방향을 돌렸기 때문이다. 1960년경에야 비로소 극장 감독으로 활약하고 있는 아들 하인리히 슈니츨러의 도움으로 슈니츨러의 르네상스가 시작되었다.

 

해설         
국내 최초 번역입니다.
이 작품은 원전의 분량이 많지 않으므로 발췌하지 않고 모두 번역하였습니다.

이 책은 피셔(Fischer)출판사에서 2000년에 나온 ≪Reigen, Liebelei≫ 23∼102쪽을 옮긴 것입니다.
작품해설을 위해서는 귄터 륄러(Günther Rühler)와 리하르트 알레빈(Richard Alewyn)의 글을 참조했습니다.

<윤무>는 1897년에 완성되었으며 창녀와 군인, 군인과 방 청소하는 하녀, 하녀와 젊은 남자, 젊은 남자와 젊은 여자, 젊은 여자와 남편, 남편과 귀여운 소녀, 귀여운 소녀와 작가, 작가와 여배우, 여배우와 백작, 백작과 창녀라는 10개의 대화로 구성되어 있다. 슈니츨러는 1900년에 이 작품을 자비로 200권을 인쇄하여 비매품으로 친구들에게 나누어주었고 친구들은 이 작품에 대해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한다. 루돌프 로타어(Rudolf Lothar)는 이 작품의 은밀한 매력을 열렬한 기쁨으로 읽었으며, 사랑의 헐떡거림에서 인간본성의 비꼬임을 재빨리 간파한 알프레트 케레(Alfred Kerre)는 이 작품의 ‘야릇한 힘’을 슈니츨러의 새로운 문학경향으로 보았다. 원래 이 작품은 <사랑의 윤무>였는데 케레가 <윤무>라고 하는 게 좋다고 해서 제목을 줄였다고 한다. 케레는 슈니츨러의 이 작품을 ‘소 데카메론’이라고 명명하기도 했다.

1903년 빈에 있는 한 출판사에서 이 <윤무>를 초판에 4만 부나 찍어 슈니츨러를 유명하게 만들었으나, 새로운 오해에 처하기도 했다. 펠릭스 잘텐(Felix Salten)은 ‘아르투어 슈니츨러와 윤무’라는 글을 썼는데 슈니츨러는 이 친구의 글에서 자신이 대중작가로 평가받은 사실에 분노했다. <윤무>는 1904년 독일에서 출판 금지되었으나 출판 금지 후 은밀하게 전파되어 <윤무>에 대한 패러디까지 나오면서 ‘알려지지 않은 유명한 책’이 되었다. 오스트리아 빈에서는 1908년부터 벤야민 하르츠(Benjamin Harz)출판사가 <윤무>를 다시 출판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검열 규정이 오스트리아보다 엄격한 독일에서는 어느 출판사도 이 책의 출판을 시도하지 않았다. 1931년에 와서 피셔출판사가 이 책을 출판하게 되었으며, 101번째로 출판된 이<윤무>는 작가의 서문 없이 출판하도록 압력을 받았다. 이 작품에 대한 슈니츨러의 해설이 민족사회주의로 인해 강력해진 반유태주의를 자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이는 <윤무>의 공연사와도 연관이 있었다. 비매품으로 찍어 친구들에게 준 작품에 대한 논란 때문에 1897년 슈니츨러는 자신의 <윤무>는 상연할 수 없는 것이라고 선언했다. 1903년 6월 25일 독일에서 처음으로 이 책을 공식적으로 구할 수 있게 되자 뮌헨에 있는 아카데미 드라마협회는 4·5·6장만 상연했으며, 1912년에 비로소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헝가리어로 초연을 할 수 있었다. 1918년 이후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검열이 사라졌으나 자칭 ‘도덕 방어자’라는 사람들의 반대는 사라지지 않았다.

검열의 종말과 함께 ‘은밀한 스캔들 작품’의 상연권을 얻기 위하여 지원자들이 줄을 섰는데 막스 라인하르트(Max Reinhardt)가 그들 중 한 사람이었다. 트리아노 극장, 야한 프랑스 해학극을 상연하는 극장도 이 극을 원했는데, 이는 <윤무>의 딜레마를 보여주는 점이다. 라인하르트는 1920년 초 이미 베를린을 정리하고 가을에 빈으로 갔으며, 베를린에서는 게르트루트 아이졸트(Gertrud Eysoldt)가 이 극의 상연권을 가지게 되었다. 책이 출간된 지 23년 만인 1920년 12월 23일, 베를린 국립음악대학 내의 샤우슈필하우스에서 처음으로 독일어로 공연되었다. 그러나 배우 아이졸트가 보여준 용기는 그 대가를 톡톡히 지불해야 했다. 이날 오후 대학본부는 이 건물 안에서는 “도덕적 종교적 정치적 혹은 예술적인 이유에서 자극적인 작품은 상연할 수 없다”는 대관 계약조항을 내세웠고, 대법원은 텍스트의 도덕성 때문에 공연을 금지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이날 오후 극장주인 막시밀리안 슬라데크 (Maximilian Sladek)와 여배우 아이졸트는 6주 구금이라는 위협에도 불구하고 공연을 강행했으며, 공연 자체는 방언으로 쉽게, 분위기는 안전하게, 방해자들에게는 어떤 반격의 빌미도 제공하지 않았다. 이 공연에는 국립재판소의 재판관과 지방재판소의 고문들도 참석했으나 이들조차 이 공연이 도덕성을 망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이 작품은 1921년 1월 3일 공연금지에서 풀려났으며 공연 마지막 날까지 매일 공연을 볼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이 초연이 있은 후 베를린 경찰청 음란 방지를 위한 핵심 자리에 있던 독일 민속학 교수 에밀 브루너(Emil Bruner)는 이 작품을 베를린 검찰청에 고발했다. 그는 이 상연을 하나의 스캔들로 간주했으며 이렇게 형사소송이 시작되고 ‘윤무 소송’이라는 이름과 함께 이 작품의 공연 역사가 시작되었다.

 이와 더불어 오스트리아에서도 심한 반대를 가져오게 되었다. 도덕성에 대한 염려로 인해 새로이 검열위원회가 소집되었고 시험공연이 있었다. 1921년 2월 1일 빈에서 시험공연이 있을 때 슈니츨러도 만족감을 보였고 비평가들은 비도덕성에 대해 아무런 반론도 제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집권당인 기독교사회당은 유태인 문학의 영향에 대하여 언급했으며 이 작품을 결국 ‘사창가 작품’이라고 명명했다. 가톨릭 단체는 ‘반 윤무 위원회’를 소집했으며 공연에 대해 경고했다. 2월 16일 공연에는 극장 내에서 반대파들과 이를 보려온 사람들 사이에 충돌이 있었고 마침내 공공의 안정을 위하여 공연금지라는 조치가 뒤따랐다. 1922년 3월 7일 <윤무>는 경찰청의 보호 하에 공연이 재개되었으며 6월 30일 마지막 공연을 마쳤다.

1921년 베를린의 <윤무>에 대한 형사소송은 무죄로 판결이 났으나 빈 극장에서 난투극을 직접 체험한 슈니츨러는 자신의 작품이 오해를 받는다는 사실과 반유태적 증오감을 불러일으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1922년 모든 공연을 거부했다. 저작권 때문에 그 후 <윤무>는 어느 무대에서도 공연될 수 없었다. 슈니츨러가 사망한 후 아들 하인리히는 이를 유언처럼 받아들였고 <윤무>는 1982년 1월 1일에 비로소 무대에 올려질 수 있었다. 이후 새로운 연출이 쌓이고 쌓였으며 <라 롱드(La Ronde)>라는 제목으로 프랑스에서는 영화화되기까지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2006년에 <라 롱드>라는 제목의 뮤지컬로 공연되었다.



차례         
해설
지은이에 대해

본문

옮긴이에 대해

 

본문중에서   
Der junge Herr:
Das Leben ist so leer, so nichtig―und dann,―so kurz―so entsetzlich kurz!
Es gibt nur ein Gĺück… einen Menschen finden, von dem man geliebt wird―

젊은 남자:
삶이란 이렇게 공허하고 이렇듯 허무하고 그리고 이렇듯 짧고-이렇듯 끔직하게 짧소소!
단 하나의 행복만 존재하지… 사랑해 줄 사람을 발견하는 일-

 

나오는 사람들  
창녀
군인
하녀
젊은 남자
젊은 여자
남편
귀여운 소녀
작가
여배우
백작



출판사서평   
<윤무>가 1921년 오스트리아에서 초연됐을 때 외설 혐의로 재판에 회부됐을 만큼 등장인물들은 노골적이고 원색적인 대사를 주고받는다. 하지만 이 작품이 당시에 그토록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이유는 작품의 외설시비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을 묘사하는 정확성 때문이었다. 독자들은 실낱같은 사랑의 희망을 때문에 끊임없이 다른 누군가를 찾아 헤매는 열 쌍의 연인들의 모습을 통해서 현대인이 가진 불안과 모순, 섹스로의 도피를 폭로하는 그 묘사의 정확성에 감탄하게 될 것이다.

 


옮긴이    
최석희는 대구가톨릭대학교 독어독문학과에 재직 중이다. 저서에는 ≪Die unverkaufte Braut≫, ≪그림동화의 꿈과 현실≫, ≪독일어권 여성작가≫(공저), ≪독일문학 그리고 한국문학≫이 있으며 역서에는 ≪힌체와 쿤체≫, ≪오를레앙의 처녀≫, ≪겐테의 한국기행≫, ≪메시나의 신부≫, ≪늑대가 돌아온다≫, ≪내 동생≫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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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zman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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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헬름 딜타이 Wilhelm Dilthey(독일, 1833~1911)

빌헬름 딜타이는 1833년 11월 19일 목사의 아들로 비스바덴 주의 소도시 비브리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신학을 택했으나 칸트, 레싱, 게르비누스의 철학과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대학에서는 교회사, 원시 기독교에 대해 관심을 가졌으며 그의 스승인 트렌델렌부르크에게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뵈크에게서는 문헌학을 수강했다. 신학 분야 국가 시험을 수석으로 졸업했으나 지속적 학문과 생활의 안정을 위하여 김나지움 교사로 진로를 바꾸게 되었다. 1859년 슐라이어마허 재단의 현상 논문에 선정되면서 교사직을 사임하고 본격적으로 해석학과 철학 연구에 몰두하게 된다. 그 후 해석학, 철학, 윤리학에 관한 지속적 연구 결과 1864년 <슐라이어마허의 윤리학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1865년 <도덕의식의 분석 시도>라는 연구로 교수 자격을 얻었다.

대학 교수로서 첫발을 내디딘 것은 1866년 스위스 바젤 대학교에서였다. 이후 킬 대학교과 브레슬라우 대학교를 거쳐 1882년 헤르만 로체(Lotze)의 후임으로 베를린 대학교에서 교수직을 수행했다. 1883년 ≪정신과학 입문≫을 출간하면서 정신적으로 가장 생산적인 순간을 맞게 된 딜타이는 브레슬라우 시절부터 교제해 오던 요르크 백작(Grafen Yorck)과의 우정을 더욱 돈독히 하게 되었다. 새로운 학문으로서 정신과학을 기획함으로써, 딜타이는 역사이성 비판의 학문으로서 철학을 혁신하고자 했다. 나아가 역사적 세계에 대한 학문들의 이론, 사회적 체계와 그것의 연구에 대한 이론을 총체적으로 정립하고자 했다. 칸트, 헤겔, 슐라이어마허를 넘어 딜타이는 진정한 계몽이 역사적 이성으로 완성된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딜타이가 가장 강조했던 부분은 바로 삶은 그 자체로부터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삶은 하나의 이해의 대상으로 주어져 있고, 지각 가능하며, 이해될 수 있고, 규정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삶에 관한 학문으로서 정신과학은 따라서 삶의 자기 이해를 확장하고, 심화하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이해와 이해를 토대로 성립된 학문의 원천은 바로 내적 경험이다. 그 경험이란 내 자신의 고유한 삶의 연관에서 나오며, 언어와 전승을 매개로 역사적으로 형성된 그런 경험을 의미한다. 이런 전제 하에서 딜타이는 인간의 삶이 전통 철학에서 말하는 이성(Vernunft)에 의해서만 활성화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감성, 기분, 정서와 같은 요소들이 오히려 ‘원하고, 느끼는’ 인간존재의 본질 규명에 더 부합한다는 것이다. 딜타이의 창작 활동이 이성적 학문인 철학에 국한되지 않고, 예술, 시학, 음악에까지 두루 미치고 있는 점은 인간의 삶을 총체적으로 파악해야 한다는 그의 철학적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딜타이의 정신과학이 왜 ‘삶의 철학’으로 명명되는지를 알 수 있다.

베를린 대학교에 정착한 후 딜타이의 삶에서 학자로서의 학문적 강의와 저술 이외에 그다지 특이한 점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1887년 베를린 학술원 회원으로 임명된 후 칸트 전집의 출간에 공헌했다는 점이 눈에 띈다. 이후 딜타이의 대표적인 저술로는 ≪체험과 문학≫(1906), ≪철학의 본질≫(1907), ≪정신과학에서 정신세계의 구축≫(1910) 등을 꼽을 수 있다. 딜타이는 1911년 10월 1일 루르 강 인근 남 티롤 지방의 소도시 자이스에서 사망했다.



해설          

국내 최초 소개

∙ 이 책의 제1부는 빌헬름 딜타이(Wilhelm Dilthey)의 ≪전집(Gesammelte Schriften)≫ 제Ⅵ권 ≪정신적 세계. 삶의 철학 입문(Die Geistige Welt. Einleitung in die Philosophie des Lebens)≫ 제2부 <시학, 정치학, 교육학 논문집(Abhandlun gen zur Poetik, Politik und Pädagogik)>(Stuttgart: B. G. Teubner; Goettingen: Vandenoeck & Ruprecht, 1958; 1962) 중 <보편타당한 교육학의 가능성에 관하여(Über die Möglichkeit einer allgemeingültigen pädagogischen Wissen schaft)>(1888), 제2부와 제3부는 그루토프(Groothoff)와 헤르만(Herrmann)이 간행한 딜타이의 ≪교육학 선집(Schriften zur Pädagogik)≫(Paderborn: Schöningh, 1971) 중 108∼133쪽을 번역한 것이며, 제4부는 그의 ≪전집(Gesammelte Schriften)≫제Ⅲ권 ≪독일 정신의 역사에 관한 연구(Studien zur Geschichte des deutschen Geistes)≫의 두 번째 연구인<프리드리히 대제와 독일 계몽주의(Friedrich der Grosse und die deutsche Aufklärung)>(Stuttgart: B. G. Teubner, 1959; 1962) 중 일부에 해당되는 158∼175쪽을 번역한 것입니다.

이 책은 딜타이 ≪전집(Gesammelte Schriften)≫ 중에서 교육학 관련 부분을 발췌·번역한 것이다. 철학, 역사학, 문학 등 인문학의 모든 분야를 자유롭게 넘나들었던 딜타이의 경우 교육학을 따로 분리해서 고찰하는 일이 쉽지는 않다. 이 책에서 교육학을 주제로 설정한 것은 표면적으로 교육 혹은 교육학과 관련된 딜타이의 글을 한데 묶은 것에 불과하다. 그의 교육과 교육학을 좀 더 심층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배경이 되는 정신과학과 심리학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딜타이에 의하면 정신과학은 역사 및 사회적 실재를 대상으로 하는 모든 학문으로 규정된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정신과학은 인문학과 사회과학을 아우르는 복합적 학문 개념으로 볼 수 있다. 그 당시 딜타이는 자연과학으로부터 정신과학을 구분하기 위하여 이 개념을 쓰기 시작했다. 그는 인과율이 지배하는 자연의 세계를 인식하는 방법과 다른 방식으로 인간의 세계를 파악하고자 했다. 인류가 존재하는 정신의 세계에는 도처에 가치들, 삶의 목적, 행위의 목표들이 자리하고 있으므로 자연과학과는 다른 학문이 절실하다는 것을 인식한 것이다. 자연의 세계에서는 기계적인, 공허한 반복의 성격을 갖는 자연 흐름의 객관적 필연성이 존재한다. 자연과학의 과제는 자연 변화 속에 내재하는 규칙성과 자연현상의 인과적 법칙을 밝히고 입증하는 것이다. 딜타이에 의하면 외적 자연을 연구 대상으로 하는 자연과학과는 달리 인간의 삶 속에서 역사적으로 발전하는 정신적 사실들이 정신과학의 대상이 된다. 즉 정신과학은 인간, 역사 및 사회 전반에 관한 학문인 것이다. 인간의 정신을 다루는 이러한 학문의 범주는 인간의 삶과 관련된 모든 영역을 포괄하게 된다. 역사, 국민경제, 법학, 국가학, 종교학, 문학이나 시 연구, 미술과 음악, 철학적 세계관의 연구들은 물론 심리학도 정신과학의 범주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교육학에 관해서 딜타이는 직접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인간의 삶을 대상으로 하며, 그 당시 응용심리학의 하나로 교육학을 보려던 경향성에 비추어보면 교육학 또한 이 범주에 포함시켜서 보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이처럼 정신과학에서는 인간이 삶의 통일체로서 그 기초를 이룬다. 인간이 삶의 통일체로서 존재한다는 것은 인간이 두 가지 관점에서 파악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한편 인간을 정신적 사실들의 총화로, 다른 한편 육체적인 사실들의 종합으로 볼 수 있다. 인간은 하나의 정신적이고 육체적인 존재로서 두 가지 사실들의 생동적인 관계를 포함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인간의 두 가지 존재 방식을 결코 동시에 파악할 수 없다. 따라서 정신적 사실들은 육체적인 사실들과의 구분 속에 파악될 필연성이 생긴다.(중략)

(중략)우리 독자들에게 딜타이는 교육학자로서보다는 철학자, 역사학자로 더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독일 교육학을 접해본 사람은 딜타이가 교육학의 발전에 얼마나 커다란 공헌을 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18세기 헤르바르트와 슐라이어마허에 의해 교육학이 하나의 학문으로 정립될 수 있었지만 경험과 사변, 연역과 귀납의 조화를 보다 정교화할 수 있었던 것은 딜타이의 공으로 돌릴 수 있다. 딜타이 생존 당시 그의 교육학은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오히려 딜타이 사후 그의 전집이 발간되면서 1920년과 1930년대 놀(Nohl, 1879∼1960), 리트(Litt, 1880∼1962), 슈프랑거(Spranger, 1882∼1963)와 같은 독일의 학문적 교육학의 대표학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놀이 주로 딜타이의 역사적 해석학적 방법론에 관심을 가진 반면 리트는 딜타이의 정신과학 이론과 역사적 세계에, 슈프랑거는 딜타이의 심리학을 계승하여 발전시켰다. 딜타이의 교육 사상을 정신과학적 교육학으로 승화시키는 데 공헌한 학자들은 주로 놀과 사승 관계에 있었던 베니거(Weniger, 1893∼1961), 플리트너(Wilhelm Flitner, 1889∼1990), 볼노(Bollnow, 1903∼1991) 등이다. 1960년대 이후 적어도 1990년대까지 베니거의 제자들로서 독일 교육학을 주도했던 블랑케르츠, 클라프키, 몰렌하우어 등도 딜타이의 정신과학적 교육학에 기반을 두고 비판 이론을 수용하였던 점을 보더라도 사상적 원류로서 딜타이가 차지하는 비중을 짐작하고 남음이 있을 것이다. 딜타이의 교육학에 관한 중요한 문헌들이 번역됨으로써 지금까지 딜타이 학파나 그 계승자들에 의한 간접적 이해를 넘어 사상적 원류에 직접 다가설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Dilthey 해석학과 정신과학적 교육학의 전개과정>(손승남, <교육사상연구> 제21권 제1호, 121∼138, 2007)은 딜타이 교육학의 계승과 발전 과정을 조망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줄 것이다. 이 연구는 독일 현대 교육학의 기저를 이루고 있는 정신과학적 교육학을 ‘해석학적 전환’이라는 최근 학문적 경향성에 비추어 재조명하고 있다. 이 논문을 통해 독자들은 정신과학적 교육학의 사상적 기반을 제공해 주는 딜타이 해석학과 소위 ‘딜타이 학파’로 일컬어지는 일군의 학자들에 의해서 전개된 정신과학적 교육학의 다양한 입장들을 이론과 실천, 상대적 자율성, 역사성과 해석학과 같은 핵심 개념을 통해 좀 더 심층적으로 이해하게 될 것이다. 경험적 교육과학과 비판적 교육학의 비판을 받은 후 정신과학적 교육학은 질적 교육 연구의 확산과 함께 교육해석학, 교육학적 전기 연구, 객관적 해석학, 생활 세계 연구 등으로 진화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무엇보다도 교육적 ‘경험’이 풍부하게 살아 있는 교육실제에서 출발하면서도 그 경험의 배후에 있는 삶의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는 딜타이의 정신과학적 교육학의 기본 사고를 다시금 정당화해 주는 것이다.

물론 ≪딜타이 전집≫과 ≪교육학 선집≫에 산재된 교육학 관련 글들을 한데 모으다 보니 사상 자체에서 중복된 부분이나 아직 영글지 않은 모습들이 간간이 눈에 띈다. 사상적 흐름을 시대적으로 구분하지 않아서 전후가 매끄럽지 않은 대목도 있다. 독자들은 이런 점들을 특히 유의해야 할 것이다. 아직 국내에선 딜타이에 관한 전기물 하나 우리말로 번역된 것이 없다. 다행히도 한스 쇼이얼(Scheuerl, 1919∼2004)이 엮은 글을 번역한 ≪교육학의 거장들 2≫(정영근 외, 한길사, 2004)에 딜타이의 삶과 저술 등이 소개되어 있으니 이 책과 함께 읽으면 도움이 될 것이다. 그 안에 딜타이 학파에 해당하는 일군의 학자들, 가령 놀, 리트, 슈프랑거, 플리트너 등이 교육학의 거장 반열에 올라 있으므로 계통적으로 읽는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아울러 흔히 딜타이를 삶의 철학 혹은 생철학의 대표자로 거론하는데, 이 사상을 교육학적으로 가장 충실하게 계승한 학자 중의 한 사람이 볼노다. 그의 대표작 ≪실존철학과 교육학≫(윤재흥 역,학지사, 2008)이 다시 번역되었으니 딜타이 생철학이 교육학에서 어떻게 결실을 맺고 있는지를 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이다.



차례           

해설 ····················11
지은이에 대해 ················40

제1부 보편타당한 교육학의 가능성에 관하여···45
1. 기존 교육학 체계의 학문적 낙후성 ······46
2. 교육의 규칙 체계를 가능케 하는 정신적 삶의 고유성 ·····················56
3. 이러한 조건하에서의 교육학적 전체 연관 ···68

제2부 빌헬름 딜타이의 교육학적 기본 사고
1. 빌헬름 딜타이의 정신과학적 교육학의 기본 사고 과정
1) 교육학의 진리 ·············93
2) 공교육 체제 ··············94
3) 교육의 역사성 ·············94
4) 개인주의적 독일 교육의 특성 ·······95
5) 개별 교육과 공교육의 조화 ·······95
6) 귀납과 실험 ··············96
7) 수업 실천가 ··············96
8) 연역 ·················97
9) 귀납과 연역의 총합으로서 교육학 ·····97
10) 교육학의 현재적 상황 ·········98
11) 교육 실천가의 교육학 체계 ·······99
2. 베를린 강의 유고로부터의 선집
1) 옮긴이 해설: 텍스트 이해를 위한 전제 조건들···················100
2) 머리말 ···············104
3) 서론 ················106
4) 심리학을 교육학에 적하는 단계 ····115

제3부 교육기관의 조직과 개혁에 관하여
1. 학교 개혁과 학교 교실 ··········123
2. 학교 개혁
1) 진정한 개혁의 의미 ··········135
2) 개혁의 급진성을 경계함 ········136
3) 프로이센의 관료제와 국가 의식 ·····137
4) 역사의식 ··············139
3. 최상의 수업에 관한 물음과 교육학 ·····142
1) 보편타당한 교육학에 관하여 ······144
2) 교육의 의미 ·············146
3) 교육의 실현 과정  ···········147
(1) 문제 ················147
(2) 이념 혹은 학문에서의 완전성 개념 ····148
(3) 목적론적 삶의 연관 ··········149
(4) 형식 이념과 그 이념의 추상적 성격 ···150
(5) 교육의 본질 ·············151

제4부 프리드리히 대제와 독일 계몽주의 시대의 교육
1. 교육자로서 국가
1) 17세기와 18세기의 교육학적 운동 ····155
2) 루소와 독일 계몽주의 시대의 교육학자들 ·159
3) 프로이센 국가의 교육 제도 ·······163
4) 프리드리히 대제의 문화 및 국가교육학적 저술 ···················167
5) 체드리츠와 그의 협력자들 ·······173
2. 대중적 문필가 ·············182
1) 빌란트 ···············182
2) 프리드리히 대제 ···········185
3) 레싱 ················185
4) 칸트 ················187
5) 계몽주의 후기의 문필가들 ·······190

참고문헌 ··················196
옮긴이에 대해 ···············199



본문 중에서    

Unter Erziehung verstehen wir die planmäßige Tätigkeit, durch welche die Erwachsenen das Seelenleben von Heranwachsenden bilden. Der Ausdruck wird in einem weiteren Verstande gebraucht, wenn die einem anderen Ziel zugewandte Tätigkeit Erziehung als Nebenerfolg erreicht. So erzieht der Vorgesetzte in dem Amtsverhältnis, oder der Geistliche in dem Gemeindeverhältnis, ja das Leben selber erzieht den Menschen.

교육이란 기성세대가 성장세대의 정신적 삶을 형성하는 계획적인 활동이다. 이 개념은 어느 다른 목적과 관련된 활동이 부수적으로 교육적 성취를 가져오는 경우를 포함하는 넓은 의미로 사용된다. 공무관련 규정이나 공동체 생활에서의 정신적인 요소들도 교육적인 영향을 주며, 삶 그 자체가 인간을 교육한다.

옮긴이         

손승남은 1963년 전남 화순에서 태어나 1990년 전남대학교 사범대학교 교육학과를 졸업한 후 독일로 건너가 뮌스터 대학교에서 주 전공으로 교육학을, 부전공으로 철학과 사회학을 공부했다. 교육학의 학문적 근원을 탐구하던 중 정신과학적 교육학의 커다란 흐름과 접하면서 슐라이어마허와 딜타이의 사상에 심취하게 되었다. 특히 정신과학의 정초와 관련된 딜타이의 문제의식은 교육의 실증주의화에 대한 반성과 비판의 계기를 주었다. 인간 삶의 문제를 다루는 학문, 즉 정신과학이 단순히 계량적 방법에 의하여 ‘설명’되어서는 안 되며 ‘이해’되어야 한다는 딜타이의 명제는 적지 않은 공명을 남겼다.

정신과학의 방법론으로서의 해석학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된 계기도 바로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이후 해석학의 흐름을 슐라이어마허, 딜타이, 하이데거, 가다머, 하버마스를 축으로 삼아 이해 지평을 꾸준히 넓혀왔다. 필자의 주 전공이 교육철학인 탓에 철학적 해석학과 교육의 관련성에 초점을 두고 이제까지 연구를 진행해 온 편이다.

독일에서 단행본으로 출간된 박사학위 논문 <빌헬름 딜타이-교육학적 전기 연구(WilhelmDilthey-Pädagogische Biogra phieforschung)>(1997)에서는 해석학의 방법의 하나로 전기와 자서전에 초점을 두고 딜타이를 새롭게 조명하고 있다. 논문 <딜타이의 슐라이어마허의 삶에 관한 연구>(1997)에서는 해석학적 전기 연구의 사례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주저 ≪교육 해석학≫(2004)에서는 해석학과 교육에 대한 관계를 체계적으로 서술하기 위하여 딜타이와 가다머의 해석학을 집중 조명하는 것은 물론 해석학의 발전된 형태인 전기 연구와 자서전 연구에 대해서 소개하고 있다. 아울러 해석학의 실제 적용이라는 관점에서 교육적 인간상으로서의 ‘신지식인’ 문제, 미래의 교육 내용으로서 ‘시대적 핵심 문제’ 등에 관한 해석학적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가다머 최후의 교육 관련 강연집인 ≪Erziehung ist sich erziehen≫(2000)을 우리말로 번역하여 ≪교육은 자기 교육이다≫(2004)로 펴내기도 했다. 최근 논문 <딜타이의 해석학과 정신과학적 교육학의 전개 과정>(2007)은 독일 교육철학의 뿌리를 딜타이에서 찾아 소위 ‘딜타이 학파’를 중심으로 그 계보를 추적하고 있다. 최근 <지만지고전천줄>에서 ≪해석학의 탄생≫(2008)을 번역·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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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안 라몬 히메네스 Juan Ramón Jiménez(1881~1958)

후안 라몬 히메네스(Juan Ramón Jiménez)는 1881년 스페인 남부 항구도시 모게르(Moguer)에서 출생했다. 교육을 받을 나이가 되었을 때, 당시 대부분의 부르주아 집안의 자식들이 그랬듯이 히메네스도 예수회 학교에서 교육을 받게 된다. 중·고등학교를 다닌 도시는 석회로 유명한 스페인 남부 항구도시 카디스(Cádiz)였는데, 그는 바다를 끼고 있는 도시를 운명적으로 타고난 것으로 보인다. 유년시절 그는 친구들과 놀기를 싫어하고 그림과 글쓰기를 중독에 가까울 만큼 좋아하던 병약하고 수줍은 소년이었다. 열네 살에 처음으로 시를 쓰기 시작하여, 그의 시가 고향의 문학잡지에 게재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평생 자신이 시만 쓰게 될 줄은 몰랐던 것 같다. 그는 부모의 강요로 세비야 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했고, 이 시절에는 시보다 회화 작업에 더 빠져 있었다. 시인의 초기 시에 나타나는 회화적 이미지는 이런 배경이 반영된 것이다.

1900년 마드리드로 이주했고, 얼마 후 시집 ≪슬픈 아리아≫를 발표했다. 그 이전에도 잡지에 산발적으로 시를 발표했지만 시인에게는 공식적인 첫 시집이었다. 이후 다시 건강 때문에 모게르로 귀향하게 되는데, 귀향한 지 얼마 후 아버지의 죽음을 경험한다. 이즈음 신경쇠약과 호흡장애 등으로 요양소에 입원, 장기 치료를 받았지만 다시 건강을 회복하여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여행했으며 프랑스에서는 상징주의 시를 접하게 된다.

1905년부터 1912년까지 고향 모게르에서 홀로 지내던 시기는 시인에게는 가장 외로웠던 시절로, 초기 감상적 톤의 시는 대부분 이때 쓴 것이며, 또 가장 많은 시를 쓴 시기이기도 하다. ≪봄의 발라드≫, ≪소리 나는 고독≫, ≪엘레지≫, ≪미로≫, ≪일요일≫ 등의 시집을 발표했다.

1912년에 건강을 회복한 시인은 마드리드로 돌아오게 되는데, 이번에는 당시 스페인 마드리드 국립대학 기숙사이며 전위주의 예술의 산실이었던 레시덴시아 데 에스투디안테스(Residencia de Estudiantes)에 거주하게 된다. 그는 여기서 몇 년 후배들이었던 가르시아 로르카(García Lorca),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í), 루이스 부뉴엘(Luis Buñuel) 등과 교분을 맺으며 그들에게 큰 예술적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이들은 각각 문학, 회화, 영화의 영역에서 20세기에 큰 흔적을 남기게 된다. 그러나 시인으로서는 ≪영적 소네트≫와 ≪여름≫ 같은 시집이 나온 때로, 같은 유형의 반복적인 시가 나오면서 새로운 미학을 모색하고 있던 시기였다.

1916년은 시인의 생애 중 가장 변화가 많았던 한 해였다. 생애 처음으로 미국 여행길에 올랐고, 그곳에서 세노비아 캄프루비 아이마르(Zenobia Camprubí Aymar)와 결혼하게 된다. 그녀는 아내 이상의 지적 동반자였고, 인도를 비롯한 동양세계에 관심이 높아, 인도 시인 타고르의 시를 스페인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이를 계기로 히메네스 시에 동양적 범신론이 나타나는 것은 사실이지만, 범신론적인 우주관을 자유시 형식에 담아내는 새로운 변화는, 미국 시인 월트 휘트먼(Walt Whitman)의 명시 <풀잎(The leaves of grass)>으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은 측면이 있다.

1917년 다시 마드리드로 돌아온 시인은 스페인 내란이 일어나는 1936년까지 이곳에 거주하면서 창작활동을 한다. 초기 감상적인 시어들이 철학적이고 사념적인 색채를 띠어간다. ≪신혼 시인의 일기≫, ≪돌과 하늘≫, ≪완전한 계절≫ 같은 시인의 대표적 작품들이 쏟아졌던 시기였다. 시인의 고유한 목소리가 절정에 이르고 난해하면서도 대중적인 매력을 가진 작품들이 탄생했다.

1936년 스페인 시민전쟁이 발발했다. 이 전쟁으로 수많은 지식인들, 특히 좌파적 이념과 진보적 사고를 가진 수많은 지식인이 조국을 떠나 망명길에 올랐다. 히메네스 역시 고국을 떠나 푸에르토리코와 아바나에서 망명 생활을 하게 된다. 조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한 그는 카리브 지역을 떠나 미국의 플로리다에 거주하게 된다. 망명 생활을 접고 미국에서의 영구 거주를 결심한 시기였고, 대학에서 강의를 하며 생계를 이었다. 몇 년 후 동부의 워싱턴 DC로 거주지를 옮기고, 듀크 대학과 메릴랜드 대학의 칼리지 파크(College Park) 캠퍼스에서 강의에 전념했다. 그가 강의하던 칼리지 파크 캠퍼스 스페인어문학부 건물은 현재 히메네스 빌딩으로 명명되었고, 로비에는 그의 동상이 있다. 일상적 언어를 가진 시와 지극히 관념적인 시를 동시에 썼던 시기로, ≪바다 저쪽에는≫, ≪내면적 동물≫, ≪욕망받는 신과 욕망하는 신≫ 그리고 마지막 시집 ≪떠나가는 강물≫이 출판되었다.

1952년 첫 망명지였던 푸에르토리코로 돌아간 시인은 간간이 대학에서 강연이나 강의를 했지만,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한다. 1956년 스웨덴 한림원은 그에게 노벨문학상을 수여했지만, 수상의 기쁨도 채 지나기 전에 아내 세노비아가 세상을 떠난다. 아내가 유명을 달리 한 후 급격히 건강이 악화되고 마침내 1958년 5월 29일 고국으로 끝내 돌아가지 못한 채 눈을 감는다.



해설         



국내 최초 소개

∙이 책은 히메네스의 초기 작품부터 사후에 발표된 시집들까지 중 집필 순서대로 옮긴이가 선별하여 엮은 것입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시를 몇 가지 유형으로 정리하려는 것은 무척 무모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역시 그런 시도를 자주 해본다.

내가 보기에 세상에 존재하는 시는 다음의 세 가지 유형 중 하나일 가능성이 높다.

첫 번째 유형의 시는 ‘세상을 반영’하려는 시다. 여기에서 세상은 시인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과 그 모든 것이 그에게 부여한 경험과 감정 그리고 인상들을 의미한다. 이때 시인은 명료한 관찰력으로 주변을 감지하고 그 결과물을 언어로 재현한다. 뿐만 아니라 그는 세상의 흐름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그때마다 자기가 읽어낸 삶의 형상과 굴곡을 새로운 언어로 옮겨놓는다. 그런데 이 새로움은 오래가지 못한다. 왜냐하면 곧 다른 시인이 나타나 그 새로움을 낡음으로 바꾸어놓기 때문이다. 예전에 그가 선배 시인들의 시를 시시한 것으로 만들었듯이.

두 번째 유형의 시는 ‘감상적 휴머니즘’으로 포장된 시다. 특히 이 시들은 뉴욕이나 서울 같은 대도시에서 성장했다. 월스트리트의 직장인들이 하루의 일과를 요가로 푸는 것과 비슷하다. 뉴에이지가 형태만 심오한, 허구적 종교성으로 위장된 하나의 상품인 것처럼, 이런 시는 순수와 자연, 청량함과 심오함을 전경에 배치하지만 사실 그 뒤에는 아무것도 없다. 대중매체를 타는 대부분의 시는 이런 유형에 속하는 것이다. 그것은 광고카피가 가지는 기능과 매우 흡사하다. 도시 공간은 수많은 자극들이 끊임없이 지나가는 곳이다. 자극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시 역시 자극적인 방식으로 읽게 되고, 시어도 자극적인 성향을 띠게 된다.

세 번째 유형의 시는 ‘시어로 세상을 창조’하려는 시다. 여기에서 시인은 첫 번째 유형의 시인과 상이한 지점에서 시를 바라본다. 그는 세상을 반영하고 재현하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작은 신’이 되어 자신이 주조한 언어를 가지고 새로운 의미와 이미지를 생산하려 한다. 시인은 우리가 세상에서 경험할 수 없는 이미지들의 공화국으로, 어떤 미지의 곳으로 우리를 데려가려 한다. 그래서 그의 언어는 ‘이해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런 유형의 시인은 시가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고 말한다. 우리가 이런 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시인은 우리가 경험해 보지 못한 언어를 독특한 리듬 속에 담아내서 새로운 별로 우리를 보내려 하기 때문이다. 시는 삶의 근원성과 존재의 영원성을 언어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려 한다. 우리는 이 새로운 세계를 이해하려 하지 말고 소통하고 경험하려 해야 한다. 그것이 이런 유형의 시를 제대로 읽어내는 방식이다. 시 전체가 주는 신비한 정서와 철학적 의미를 어렴풋이나마 소통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된 것이다.

스페인어권 시인 중 첫 번째 유형에 속한 대표적인 시인으로는 아마 안토니오 마차도(Antonio Machado)와 파블로 네루다(Pablo Neruda)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네루다는 스무 살의 풋풋한 나이에는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 같은 절절한 연애시에 몰두했다가, 세상에 대해 철이 들면서는 <지상의 거주지> 같은 초현실주의적인 시를 썼다. 조국인 칠레가 이데올로기 논쟁을 겪을 때는 ‘비순수시’를 주장하며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민중의 노래>를 발표했다. 이렇듯 네루다는 개인적 체험과 세상의 흐름에 적극적으로 반응하고 개입하며 시를 썼다.

세 번째 유형에 속하는 대표적인 시인으로는 멕시코의 옥타비오 파스(Octavio Paz)와, 여기에 소개하려는 히메네스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이 두 시인은 자신이 속한 상이한 역사와 문화적 배경 때문에 다른 시어를 가지고 있지만, 시를 바라보는 시선과 개념은 동일하다.

콜럼버스가 인도를 찾기 위해 출항했던 스페인의 역사적인 항구도시 모게르(Moguer)에서 1881년 시인은 태어났다. 그는 당시 비교적 현대적 도시였던 푸에르토 데 산타마리아에서 예수회 신부들이 운영하는 학교를 다니며 유년시절을 보냈다. 이후 세비야 대학에 법률을 공부하러 갈 때까지 시인은 대부분의 성장기를 남부 지중해 연안의 풍경과 함께 보내게 된다. 따라서 그의 시에 끊임없이 따라다니는 바다, 태양, 바닷새 따위의 이미지와 자연의 광활함, 순수함, 멜랑콜리 등은 유년시절에 맺어진 바다에 대한 인상과 관계가 있다 할 것이다.

열네 살에 처음 시를 쓰기 시작했던 시인은 열아홉 살이 되던 1900년 마드리드로 이주, 3년 뒤 공식적인 첫 시집 ≪슬픈 아리아(Arias tristes)≫를 내게 된다. 그의 첫 작품에서 우리는 사춘기의 감상주의와 햇과일 같은 순수함을 간직한 병약했던 한 소년과, 그로 인해 시 쓰기가 구원의 행위가 될 수밖에 없는 ‘선천적’ 시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첫 시집에서 어린 시인은 이렇게 노래했다.

사람들은 이렇게 내게 얘기하지.

인생을 즐기라고,

네 아침은 싱싱함으로 가득 차 있다고,

꽃 같은 사랑의 정념으로

상처 받은 네 영혼의 어두움을 깨어버리라고.


그러나 나는 쓰디쓴 고뇌의 손으로

삶에 대한 믿음을 접고

철 이른 꽃송이를 뿌리째 뽑아버렸어.


저녁이 되면 울어버릴 걸 알면서,

아침에 일어나 미소를 지을 수는 없었어.


<사춘기>(부분)


이 ‘이유 없는’ 슬픔에 대해 시인은 훗날 이렇게 술회하고 있다. “달콤한 나이에 나는 아이들과 거의 어울리지 못했고 내 유일한 친구는 고독이었다. 장엄한 의식(儀式)과 낯선 사람들의 방문, 교회의 모든 것이 내게는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나는 무섭게 슬픔에 젖어 있었고, 뒤로는 늘 과장된 정서를 남기고 다녔다. 비 오는 광경을 쳐다보던 정원의 창문이 그랬고, 내 집 앞 거리로 떨어지는 해가 그랬다.”

마드리드로 돌아온 후 신경쇠약과 호흡장애로 장기간 요양소에서 보냈던 시절, 시인은 독서와 작품에 몰두할 수 있었고, 이때 그는 시인으로서 최초의 절정을 경험하게 된다. 육체적 고통은 시인으로 하여금 주변 세계에 대한 영적인 교감의 세계로 인도해 주었고, 주변 사물과의 구체적인 교감의 경험을 시로 쓰게 된다. 바다와 태양처럼 장엄하고 유일한 존재에서부터 장미와 나뭇가지, 벌레에 이르는 미세한 사물, 그리고 무생물에 이르기까지 주변의 모든 사물과의 교합과 일치가 이루어진다. 아직은 감상적 톤이 지배적이고 그 교감의 세계가 정신적 합일이라기보다는 세밀한 관찰자의 자세, 그러므로 여전히 일방적이고 객관적인 자세이긴 하지만(그런 의미에서 시인은 인상주의자로 보인다), 시인의 모든 감정의 흔적 하나하나가 철저하게 주변의 사물로 인칭화되고 있는 것도 이 시기의 특징이다(그런 의미에서 시인은 낭만주의자로 보인다).


안개 속에서 물은 돌에게

자신의 오래된 노래의 고통을 보여준다.

덩굴 속에서 개똥벌레는

초록빛 비상과 은빛 비상을 꿈꾼다.


하늘을 향해 오르며 가지 사이로

별들의 향기를 머금은 재스민.

안개일까, 우물일까, 하늘일까?

그것은 낭만적인 달에 유혹된

어떤 나이팅게일… 푸른

목소리… 달에게 말을 건네는

새의 마술적 비상…


≪먼 정원들≫ 중 <안개 속에서> (전문)


이런 감각적이며 소녀 취향의 애절함은 히메네스의 초기 시를 지배하는 정서였다.

1916년은 히메네스에게는 인생에 있어 그리고 시인으로서도 결정적 시기였다. 배를 타고 처음으로 미국에 도착한 그는 인생의 반려자이자 지적 동반자인 세노비아(Zenovia)와 뉴욕에서 결혼을 하게 되고, 시 세계에도 큰 변화가 시작된다. 미국 내 일정 기간 체류와 세노비아와의 결혼은 그의 시가 라틴풍 정서에서 벗어나 영미와 북유럽 계열의 색채를 띠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그는 셸리(Shelley), 에이미 로웰(Amy Lowell)과 같은 영국 시인들, 그리고 괴테(Goethe), 횔덜린(Hölderlin), 하이네(Heine) 등의 독일 시인들,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 디킨슨(Dickinson), 로버트 브라우닝(Robert Browning) 같은 미국 시인들의 시를 읽고 매료된다. 이 시기는 또한 인도 시인 타고르의 범신론적 시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은 때이기도 하다. ≪신혼(新婚) 시인의 일기≫는 이런 변화가 반영된 제2기의 첫 작품으로, 초기 시의 특징이었던 감상성이 줄어들고 형이상학적 의미가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한편으로는 스페인 신비문학의 맥이 느껴지기도 한다.


오늘까지

‘침묵’이란 단어는

자신의 무덤을

덮개로 닫지 않았지!


그리하여

오늘까지

네가 혹시 입을 열어

내게 대답하지 않을까

헛되이 기다렸지!


≪신혼 시인의 일기≫ 중 <침묵> (부분)


1936년 시민전쟁이 발발하자 시인은 조국을 떠나 두 번째로 신대륙으로 향했다. 푸에르토리코에서의 짧은 체류 뒤, 그는 쿠바의 아바나에서 3년간 체류하게 된다. 스페인 시민전쟁이 끝나던 1939년부터는 플로리다, 마이애미, 메릴랜드, 워싱턴 DC 등에 거주하면서 대학에서의 강의로 생계를 이었다. 조국을 떠난 시인에게 조국에 대한 기억은 이제 회상의 형태로 재현되고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순수의 실낙원으로 변한다.


하얀 마을이 그곳에 있어.

불을 밝힌 채 나를 기다리며

모든 것이 멈추어 있는 마을이.


외침이 있던,

광장에 울려 퍼지던 수정 같은 외침,

정지된 날카로운 외침과

구름의 가장자리에 선 마지막 외침과

그리고 노란빛 외침을 들었어.


아이가 보았던 모든 것을

아이가 보기 원하는 모든 것을

아이가 보지 못했던 모든 것을 보았어.


아이는 모든 사람들

아이는 어린 시절의 나

아이는 늙은 시절의 나

잃었다가 다시 찾은 아이.


≪바다 저쪽에는≫ 중 <마지막 아이> (부분)


이렇듯 시대에 따라 다양하게 변모했지만, 히메네스의 시 세계를 요약할 수 있는 개념은 ‘순수시’다. 순수시의 근본적인 개념은 시를 통해 사물을 다시 태어나게 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지시물에 대한 기호체계인 언표로부터 역사성과 시간성을 제외하는 시학을 말한다. ‘언어 자체가 그 사물이 되게 하는 시’가 히메네스가 실천하려는 순수시다. 이를 통해 시어는 문명과 일상 속에서 오염되었던 의미를 지우고 사물의 본질에 도달할 수 있어야 한다. 모든 주변적이고 장식적인 자질을 제거하고 지시물의 본질에 도달할 수 있는 유일한 언어가 시어이며, 시의 기능은 언어를 초역사적이고 초시간적인 원래의 모습으로 회복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다음 시는 히메네스 자신에게 있어서 ‘순수’의 개념이 어떻게 변화되어 왔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처음에 그녀는 순결의

옷을 입고 나타났고,

나는 아이처럼 그녀를 사랑했어.


그녀가 알 수 없는

옷으로 갈아입었을 때

나는 이유도 모른 채

그녀를 증오했어.


그녀가 호사스럽게

치장한 여왕이 되어 나타났을 때

내 분노는 너무 쓰고 허무했지.


그래도 나는 그녀에게 미소 지었고

그녀가 상실했던 순결의

도포를 다시 몸에 감았을 때

나는 다시 그녀를 믿기로 했어.


그녀는 마침내 도포를 벗고

벌거숭이로 나타났어.

오, 내 삶의 열정이여!

벌거숭이 시여, 영원하라!


첫 연은 초기 시를 언급하고 있는 바, 아직 어떤 미적 양식에도 물들지 않은 단순한 상태를 가리키고 있다. 둘째 연과 셋째 연에서는 화려한 장식으로 치장된 모데르니스모(Modernismo)에 대한 혐오를 나타내고 있는데, 히메네스는 한때 지독한 모데르니스모 신봉자였지만 곧 이어 그에 대한 반감을 보여주고 있다. 모데르니스모는 히메네스가 젊은 시절 한때 광적으로 수용했던 시 현상으로, 과장된 감수성과 대리석 같은 견고한 형식성을 표방했다. 넷째 연은 모데르니스모에 대한 환멸을 느낀 시인이 다시 초기의 단순함으로 돌아갔음을 암시하고, 마지막 연에서 마침내 순수시의 세계를 만난 시인을 볼 수 있다.


히메네스가 표방했던 순수시의 한 형태를 다음에서 읽어볼 수 있다.


줄기는 아직 새벽 여명의

이슬을 머금고 뿌리에서 나온다.


향기를 내뿜는 촉촉한

대지의 수분과

이마와 두 눈으로

떨어지는 샛별들의 빗줄기!


≪돌과 하늘≫ 중 <시 2번> (부분)


순수시의 개념 안에서, 시의 기능은 눈에 보이는 세계를 재현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염원을 반영하고 불멸의 이미지를 창조하는 것이다. 동시대의 안토니오 마차도(Antonio Machado)가 역설했던 시에 대한 정의, 즉 “시는 시간 속의 말(La poesía es la palabra en el tiempo)”이라는 개념과는 너무나 상이하다. 마차도에게 있어서 시는 결코 새로운 우주를 만들어내거나 신성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거나 역사와 떨어져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시는 대리석 조각처럼 시간을 초월하여 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사실적 반영일 뿐이다. 반면 순수시 속에서 시는 시공의 한계 안에서 현상과 사물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우주를 창조하는 것이다. 따라서 시인은 소우주를 지배하는 작은 신이며, 시는 그런 창조적 능력을 가진 유일한 예술이다.


건조한 태양을 보며, 나는

내 깊은 곳에서 푸른 샘을 창조한다.


빛 없는 눈(雪)을 맞으며, 나는

가슴속에 용광로를 창조한다.


연기 같은 사랑을 보며, 나는

영혼 속에 사랑의 불멸을 창조한다.


≪완전한 계절≫ 중 <제2의 조물주> (전문)


신이 인간을 창조하고 인간에게 부여한 첫 번째 작업은 사물에 이름을 부여하는 명명(命名) 작업이었다. 그러므로 사물에 정확한−그로 인해 아름다운−이름을 부여하는 작업은 인간에게 최초의 노동이자 예술이었다. 시는 어쩌면 애초부터 그런 창조적이고 순수한 행위를 위해 태어났을 것이다. 보르헤스도 그의 단편 <타인(El otro)>에서 “시는 실현되었거나 실현될 수 있는 가능성과 관계없이 하고 싶은 것을 표현하는 문학적 장르”라고 했듯이, 시가 꿈꾸기를 포기하지 않는 시대의 시는 행복하다. 전후(戰後), 사회시, 참여시의 등장으로 시의 모든 환상은 부서졌고 우리는 시가 꿈꾸기를 기대할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지 않은가? 히메네스 시에 등장하는 자연의 제 요소들과 그것들의 관계, 시인과 맺는 관계는 늘 비현실적이고 관념적이며 때로는 철저한 욕망의 환상으로 나타난다.

초기 시에서는, 시적 분위기가 떨어지는 나뭇잎에도 눈물을 짜낼 만큼 다분히 소녀 취향의 감상주의를 보이기도 하지만, 그의 문체가 나름의 형태를 보이기 시작할 때쯤이면 사념적이고 철학적인 주제들이 등장하면서 사물과 존재, 타자와의 합일 등의 메시지로 발전한다.

또한 그의 순수시에는 현실과 관계없는 먼 시간과 공간을 무대로 하는 일종의 엑소티즘(exotismo)적인 분위기가 있는가 하면 아래의 시처럼 인간 사이의 휴머니즘적 결합을 다루고 있는 것도 있다.


어떻게 우리가 하나가 아닐 수 있는가!

감정의 피를 섞어 서로가 서로의

내부를 보고 있지 않은가!

어떻게 웃고 어떻게 울고 있는가를!


가느다란 실들,

가닥가닥 풀어헤쳐진 우리를

서로 묶어주기 위해, 우리가 결코

혼자일 수 없도록,

웃음, 키스 그리고 눈물로…


히메네스의 순수시는 마지막으로 가장 거룩하고 신비한 단계에 이르게 된다. 그것은 정적인(emocional) 자세에서 보다 지적인(intelectual) 자세로의 전환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