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리의 평민 가정에서 출생한 그의 본명은 프랑수와 마리 아루에(F. M. Arouet)이고, 볼떼르라는 이름은 1718년에 비극 ≪오이디푸스≫를 발표하며 사용하기 시작한 필명이다. 젊은 나이에 일찍 사교계에 진출하였고, 당시의 많은 젊은이들이 그랬듯이, 희곡으로 명성을 얻고자 하는 야심에 들떠 있던 그는 주로 희곡 집필에 몰두하였다. 그의 첫 소설 ≪쟈디그≫를 발표한 것이 1747년이니, 나이 오십이 넘어서이다. 또한 기지 발랄한 사람들이 대개 그러하듯, 그가 처한 사회에서 비방의 대상이 되고 박해를 받기도 하던 그는 잠시 영국으로 피신하기도 하는데(1726∼1729년), 그 시절이 그에게는 영국에서 이미 자리 잡은 정치적 자유주의나 존 로크(J. Lock, 1632∼1704년) 같은 학자의 경험론을 접할 수 있게 된 호기(好機)였던 것 같다. 영국에서 돌아온 후에도, 당시의 정치체제 및 지배 종교와 끊임없는 갈등 관계에 있던 그는, 고향인 빠리에 머물지 못하고, 샤뜰레 부인이나 프러시아의 후레데릭 II세 등과 같은 후원자(지지자)들에게 의지하며 전전하다가, 나이 육십이 넘어서야 스위스와의 국경 근처에 있는 작은 산골 마을 훼르네(Ferney, Gex 지방)에 정착한다. 그는 황량한 그 마을에 토지를 일구어 경작지를 넓히는 한편 산업을 일으켜, 그곳에 머문 이십여 년의 세월 동안에 그 마을의 면모를 완전히 바꾸어놓았으며, 오늘날까지도 그 일은 그 고장의 전설이 되었다. 또한 ≪철학 사전≫을 비롯한 그의 가장 원숙한 작품들이 발표된 것도 그 시절이며, 영원한 기하학자이며 절대적으로 완벽한 조물주에 대한 신앙(le culte de l'Etre Suprême)이라는 그의 새로운 종교가 확립된 것도 그곳에서이다. 1778년 고향 빠리에 돌아와 타계하였다.
해설
국내 최초 소개
∙이 책은 볼떼르의 5개의 작품을 싣고 있습니다.
≪쟈디그≫와 ≪깡디드≫ 등, 볼떼르의 대표적인 작품들뿐만 아니라, 그의 여타 단편들 속에서도 첫눈에 발견되는 것은, 이 세상의 모든 일이 절대자의 뜻에 따라 이미 치밀하게 기획되어 있다는 인식이다. 그러한 숙명론 내지 예정설이 그의 작품 세계에서 가장 선명하게 포착되는 라이트모티프이다. 따라서 어찌 보면 그를 가리켜 운명론자 내지 비관주의자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한 세계관을 가진 사람에게는 어떠한 사유(思惟)나 행위도, 나아가 존재니 비존재니 하는 구분조차도, 모두 무의미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에 대한 그의 관심은 지극히 첨예하고 집요하다. 기이한 현상이다. 특히, 선별적 구원론 내지 낙관주의에서 배태된 종교현상 및 그것의 폐해 등에 대한 그의 날카로운 관찰에서는(≪깡디드≫), 근본주의적인 혁신 의지마저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그가 인식하고 있는 인간과, 그 인간이 깃들이고 있는 지구의 실체는 비참하리만큼 초라하다. 지구라는 이 행성은 기껏 하나의 ‘진흙덩이’ 혹은 ‘진흙 원자’에 불과하다. 또는 하나의 ‘개미탑’이나 ‘두더지 흙두둑’일 뿐이다. 그리고, 광막한 우주 공간에서 그 ‘먼지 알갱이’ 표면에 기생하며 꺼떡거리는 우리 인간의 모습은 ‘벌레’나 ‘좀’의 꼴과 다름없다(≪쟈디그≫, ≪미크로메가스≫). 그렇건만, 그 무한히 작은 것이 무한히 거만하다. 심지어, 그 보잘것없는 주제에, 유독 자기들에게만 ‘영혼’이라는 것이 있다는 점을 무슨 특권처럼, 혹은 절대자가 내린 신표(信標)처럼 자랑스러워한다. 하지만 그 영혼이라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아무도 시원스러운 대답을 하지 못한다. 영혼이란, 소크라테스의 다이몬(daimon)이나 플라톤의 이데아 등이 그렇듯이, 그 실체가 규명되지도 정의되지도 않은, 순전한 몽상 내지 망상의 소산일 뿐이다. 물론 망상의 소산이라고 하여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우주에 존재하는 무한수의 생명체들 중 유독 자기들에게만 영혼이라는 그 입증되지도 않은 신표가 있다고 주장하는 일부 인간 집단의 몽상은, 또 하나의 불가사의이며 경이로운 현상이다. 물론 그 현상 역시, 소크라테스나 플라톤과 같은 몽상가들의 유산일 수 있으며, 그것이 아마 미신의 굴레를 완전히 벗어던지지 못한 ‘형이상학’이라는 아귀다툼의 실마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없는 성 아우구스티누스를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예수교의 존속을 가능케 한 자양을 공급한 이들이 그 두 몽상꾼 아닌가? 델포이를 비롯한 여러 곳 신전들의 신탁(信託, 점괘)과 ‘선지자’란 말은 무관한 것일까? 델포이 신전과 바티칸 신전이 전혀 이질적인 유물일까? 나아가, 프로메테우스와 크리스토스(메샤의 그리스식 명칭)는 전혀 무관한 존재들일까?
그 초라하고 우스꽝스러운 존재가, ‘느끼고 사유하며 말하는 피조물’이며, 상황의 변덕에 따라 일희일비하는(≪백과 흑≫) 덧없는 부유물이고, 그 ‘좀’ 속에 선과 악이 혼재(混在)한다는 볼떼르의 인간관이, 자신을 우주의 중심적 존재라고 믿는 ‘사각모 쓴 미물’(쏘르본느의 신학자, ≪미크로메가스≫)의 인간관보다는 더 그럴듯해 보인다. 그러나, 인간 속에 선과 악이 공존한다든지, 혹은 ‘하나의 선이나마 태어나게 하지 않는 악은 없다’느니(≪깡디드≫) 하는 등의 언급은, 자신에게 영혼이라는 신표가 있다고 우쭐대는 이들의 주장만큼이나 모호하다. 도대체, 광대무변하고 무시무종(無始無終)한 우주 속에서, 선이니 악이니 하는 개념의 구분이 성립한다는 말인가? 그가 인식한 조물주(demiourgos, 즉 건축가) 혹은 절대자(Être Suprême) 역시 가치중립적이며 무심한 존재이다. 즉, 우주를 주도면밀하게 ‘설계한’ 절대적 창조주가 악이라는 것을 만들었을 리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 선과 악의 대립적 구도, 그 유치한 갈등 관계를 탄생시켰을 리 만무할 것이다. 그러한 짓은 간사한 군주나 비열한 정파들의 전유물이다.
그러나 한편, 무한히 지속되는 연계 고리를 어찌나 완벽하게 창조하였던지, 그 연계 고리, 즉 ‘숙명’ 앞에서는, 창조주 자신조차도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 볼떼르의 주장이다. 피조물들은 말할 나위 없이, 창조주 역시, 자기의 지혜와 의지와 법칙과 속성의 ‘노예’일 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피조물이 조물주에게 무엇을 아무리 간절히 부탁한다 하여도, 그 소청이 가납될 리 없다. 만약 조물주가 그 소청을 들어준다면, 그의 창조 작업이 허술하였음을 시인하는 꼴이 될 것이다. 그러니, 절대자에게 무엇을 간구하는 행위 자체가 그에 대한 모독일 수 있다. 또한, 기도로 절대자의 뜻을 바꾸게 하려는 행위 못지않게 실례되는 짓은, 피조물들이 그를 찬양하노라 떠들어대는 일이다. 조물주가 피조물들의 찬사에 기뻐한다는 말인가? 그 절대자가, 로마 시민들의 칭송에 불쾌감을 감추지 못했다는 어느 황제만도 못하다는 말인가? 툭하면 동티나 일으키는 잡귀들과 그를 혼동한다는 말인가? 게다가, 피조물들에게, 조물주를 찬양할 자격이 있다는 것인가?
인간과 조물주의 관계가 그러한데, 그 실상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그것을 외면해 버리는 오만에서, 온갖 미신이 ‘종교’라는 간판을 내걸고 창궐한다. 그리고 각 종교는, 각개의 교리와 의식을 정비하고, 사제를 임명하며, 신당(전)을 마련한 다음, 세력 확장에 매진한다.
고금을 막론하고 종교가 그 과정에서 인간에게 참혹한 재앙을 가져다주는 양상과 핵심적 요소들, 그것들이 볼떼르의 소설들을 점철하고 있다. 뭇 종교의 근간인 복술(卜術) 혹은 예언, 사리를 밝히려는 이들에 대한 증오, 음모, 탐욕, 궤변, 위선, 사기, 협박, 광신주의, 종교재판, 말뚝형, 화형, 기타 가학적 처형 등, 이루 다 열거하기조차 민망스러우리만큼 추한 현상들이, 볼떼르의 작품 세계를 형성하는 주요 소재들이다. 그리고 그 모든 현상들의 핵심적 동인(動因)을 볼떼르는 광신주의에서 발견하는 듯하다. 광신주의란 하나의 종교를 지탱시켜 주는 필수 불가결의 에너지이며, 그 에너지의 생산자가 사제, 설교가 및 해당 종교 이론가들이다. 하지만 이론가들의 역할은 그리 크지 못하다. 그들은 비교적 사리 밝은 이들을 설득하는 역할을 맡았고, 따라서 그들의 말이나 글 자체가 상당한 합리성을 구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조로아스터가 어찌 페르시아 군대를 동원할 수 있었겠으며,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이나 ≪신의 나라≫를 읽었기 때문에 십자군의 일원이 된 자가 있겠는가? 또한 토마스 아퀴나스가 알비 성전(13세기 초에 프랑스 서남부 지방의 카타로스파를 잔혹하게 토벌한 전쟁)을 일으킬 수 있었겠는가?
하나의 종교에 그 지탱 에너지와 확산 에너지를 확보해 주는 첨병들은 사제 내지 설교가들이다. 그리고 그 에너지의 원천은 열광인데, 열광은 오직 광신(狂信), 즉 사리를 무시하거나 분별치 못하는 상태의 믿음에서만 가능하다. 그러한 맹신자들 내지 광신도들의 수효가 종교의 존속을 담보해 준다. 따라서 정치인들이나 연예인들의 경우처럼, 종교의 존속에 있어서 최대의 관건은 맹신자들의 확보이다. 맹신자들을 확보하는 방법들 중, 협박이라는 보편적 수단 이외에 가장 유구한 것이, 아마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며 그들의 피해망상증이나 열등감 등을 적당히 자극하는 행위, 즉 선동일 것이다. 또한 그 선동된 상태, 즉 그 열광 상태를 유지시키고 증폭시키는 촉매제 내지 흥분제들 중 가장 강력한 것이, 다른 개체나 집단에 대한 질투와 증오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그러한 질투와 증오를 존속 수단 내지 무기로 삼은 천한 종파나 정파는 이루 헤아릴 수조차 없을 만큼 많다. 또한 그것이 아직도 인류를, 특히 한국 사회를 짓누르고 있는 위험스럽고 추한 전염병이다.
볼떼르는 유럽인들을 일천 년 이상 혹독한 재앙 속에 처박은 원흉을 그러한 광신주의라고 여기는 듯하다. 뚤루즈의 늙은 상인이며 깔뱅(J. Calvin)파 개신교도였던 쟝 깔라스(J. Calas)가 이웃에 사는 카톨릭교도들의 무고로 인해 차형(車刑)에 처해지고 그 가정이 파괴되자, 그 사건에 뛰어들어 깔라스의 무죄를 밝히고, <관용론(Traité sur la tolérence)>을 집필한 것 또한 그러한 시각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그렇다 하여 물론, 그가 <관용론>에서 어느 특정 종파를 두둔하거나 나무라지는 않는다. 그의 여러 소설에서처럼, 숱한 종교전쟁이나 종파들 간의 학살 행위, 가학적 보복, 증오 등을 촉발시키는 광신주의의 실체를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카톨릭이나 개신교, 마호메트교, 조로아스터교, 힌두교 등 어느 종파를 막론하고, 그것들 속에서 배타적 광신주의를 발견한 그가 꿈꾸던 것은, 사랑도 질투도 노여움도 모르며, 인간의 변덕에 무심한 절대자를 숭배하는 종교(le culte de l'Être Suprême), 그 ‘영원한 기하학자’를 숭배하며, 열광이 아닌 이성과 양식에 기초한, 새로운 종교인 듯하다.
무수한 인물과, 사건, 고장, 시대, 풍습 등, 광대한 문학적 공간을 동원하여 펼친 그의 이야기들을 일관하는 주제는, 종교와 형이상학이다. 그러나 그가 작품들 속에서 비판하고 있는 형이상학의 속성은 대부분 종교의 속성과 다름없다. 즉, 형이상학자들은, 예를 들어, ‘신의 본질’, ‘영혼의 불멸성’, ‘영혼과 육체의 관계’ 등과 같은 것들을 문제라고 하며 제기하는데, 우선 그것들 중 대부분은 인위적으로, 때로는 사제들의 필요에 따라 만들어진, 영영 풀릴 수 없는 문제들이다. 즉 사이비(似以非) 문제들이다. 따라서 결국에는 그것들이 많은 사람들을 부질없는 고뇌에 빠지게 하고, 그들의 생명을 헛되게 소진시키며, 결국 자연스러운 삶에 등을 돌리게 한다. 예수교를 가리켜 ‘체념과 죽음의 종교’라고 한 미슐레(J. Michelet, 1798∼1874)의 시각 또한 같은 선상에 있다. 하지만 그것은 개인적인 위험에 불과하다. 더욱 심각한 위험은, 형이상학이 종교적 양상으로 변해, 언제든 광신적 배타성을 띠고, 결국에는 사회를 분열시키며, 집단과 집단 사이에 가학적 증오의 씨를 뿌린다는 사실이다.
한마디로, 볼떼르의 긴 생애를 사로잡고 있었던 중추적 주제는 종교 문제였던 것 같다. 그를 가리켜 흔히들 계몽 철학자 혹은 프랑스대혁명의 아버지라고 하는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일 것이다. 그러나 간과하지 말아야 할 점은 그의 모든 작품에 감도는 해학이다. 그의 작품들은 중세의 패설(稗說, fabliaux)들을 방불케 한다. 특히 디드로나 루쏘의 작품들과 비교할 때 그러한 특색이 더욱 두드러진다. 그의 어느 작품을 대하더라도, 경쾌하고 때로는 혹독한 해학적 풍자가 톡톡 튀고, 글의 행간에 어느덧 그의 미소가 어른거리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본다면, 비록 철학자이며 지칠 줄 모르는 논쟁꾼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프랑스의 가장 유구한 문학적 전통에 뿌리 내리고 있음을 즉각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중세의 패설들과 ≪여우 이야기≫를 지은 이름 모를 문인들이나, 뤼뜨뵈프, 뻬리에, 라블레, 샤를르 쏘렐, 몰리에르, 르 싸주 등으로 이어지는, 갈리아적 익살꾼들의 계보에 당당하게 오를 수 있는 것은 그의 작품들 속에 스며 있는 그러한 특색 때문이다.
이제 그의 작품 몇 편을 선정하여 소개하려는 뜻은, 흔히 사상가 혹은 계몽주의 철학자로만 널리 알려진 그의 다른 측면, 즉 진정한 이야기꾼의 측면을 드러내려는 데에 있다. 또한, ‘신들의 몫’이라고 하는 그 고귀한 웃음을 잃으신 분들에게, 작은 파적거리나마 찾아드리고 싶은 소박한 충동에 이끌리기도 하였다.
차례
해설
지은이에 대해
미크로메가스
세상 돌아가는 대로
백과 흑
체스터휠드 백작의 귀
스카르멘타도의 유랑기
주요 작품 연보
옮긴이에 대해
작품 중에서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곳에 있던 사각모 쓴 미세동물이, 다른 철학자 미세동물들의 말을 끊으며 나섰다. (...) 그는 하늘에서 온 두 나그네를 위아래로 한 번 훑어보고 나서, 그 두 나그네들뿐만 아니라, 그들이 사는 세계, 그들의 태양들, 그들의 별들 등, 모든 것들이 오직 인간만을 위해 창조되었다고 주장하였다.
Mais il y avait là, par malheur, un petit animalcule en bonnet carré, qui coupa la parole à tous les animalcules philosophiques;(...) il regarda de haut en bas les deux habitants célestes; il leur soutint que leurs personnes,leurs mondes, leurs soleils, leurs étoiles, tout était fait uniquement pour l'homme.
옮긴이
이형식은 1972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불어교육과를 졸업하고 1972년부터 1979년까지 빠리4대학과 빠리8대학에서 불문학 석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9년부터 지금까지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불어교육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저서로는 ≪마르셀 프루스트−희열의 순간과 영원한 본질로의 회귀≫, ≪프루스트의 예술론≫, ≪작가와 신화≫, ≪감성과 문학≫, ≪정염의 맥박≫, ≪루시퍼의 항변≫,≪현대 문학 비평의 방법론≫(공저), ≪프루스트, 토마스 만, 조이스≫(공저), ≪프랑스 현대 소설 연구≫(공저), ≪그 먼 여름≫(장편소설) 등이 있고 역서로는 ≪외상 죽음≫(쎌린느), ≪밤 끝으로의 여행≫(쎌린느), ≪미덕의 불운≫(싸드), ≪사랑의 죄악≫(싸드), ≪철부지 시절≫(까바니), ≪미소 띤 부조리≫(사바띠에), ≪여우 이야기≫(이형식 편역), ≪트리스탄과 이즈≫(베디에), ≪중세 시인들의 객담≫(이형식 편역), ≪요정들의 사랑≫(이형식 편역), ≪농담≫(이형식 편역), ≪롤랑전≫, ≪웃는 남자≫(위고), ≪꼴롬바≫(메리메), ≪프랑시옹≫(쏘렐) 등이 있다.
편집자 리뷰
<관용론>의 저자로 잘 알려진 볼떼르의 소설 묶음집이다. <미크로메가스>, <세상 돌아가는 대로> 등 볼테르의 작품들을 통해 그의 기막힌 문학적 상상력과 결합된, 흔히 계몽주의로 부르는 볼테르의 사상을 확인해볼 수 있는 귀한 작품집이다. 이 소설들을 읽어보면 볼떼르가 얼마나 놀라운 상상력과 함께 뛰어난 통찰력을 지니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옮긴이의 번역 또한 소설 읽는 재미에 한몫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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