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라이 하르트만 Nicolai Hartmann (독일, 1882~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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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이 하르트만(Nicolai Hartmann)은 1882년 독일의 리가(Riga)에서 태어났다. 프로이센 포병 장교의 아들로 태어난 하르트만은 군인이 되기 위한 교육을 받았으나 무릎 부상 때문에 군인의 길을 포기하고 철학 연구를 시작했다.

초기에 하르트만은 신칸트학파인 마르부르크학파에 속했으며, 이 시기에 ≪플라톤의 존재론(Platons Logik des Seins)≫(1909)이 나왔다. 그러나 이후 후설 현상학의 영향을 받아, 이를 바탕으로 그의 철학하는 태도는 존재론적, 실재론적 입장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인식 문제에 있어서도 인식은 대상의 생산 창조이며 사유와 존재는 동일하다는 마르부르크학파의 입장과 대립한다. 그에 의하면 인식이란 대상을 파악하는 것이므로 근원적으로는 인식 이전의 독립적인 존재 그 자체를 먼저 문제 삼아야만 한다. 이리하여 그는 인식 비판으로부터 인식의 형이상학으로 발전시켜 비판적 존재론을 수립하게 된다.

하르트만 철학의 핵심은 ‘비판적 존재론’ 혹은 ‘사실주의적 존재론’으로 불리는 그의 존재론이다. 물론 그의 존재론을 사실주의적 존재론이라고 하는 것은 논의의 여지가 있다. 왜냐하면 하르트만의 존재론은 사실성 못지않게 이념성도 존재론적 규정으로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존재론이 어떤 이름으로 불리든 그는 일생 동안 존재론을 완성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 그리고 그는 실재론적, 객관주의적 입장에 섰기 때문에 그의 형이상학을 객관적 형이상학이라고도 한다. 다시 말해서 인식론을 바탕으로 형이상학을 정립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형이상학을 바탕으로 인식론을 논했으며, 하이데거와 더불어 ‘인식론에서 존재론으로’라는 독일 현대철학의 흐름을 대변하는 대표적인 철학자다.



해설                    

이 책은 니콜라이 하르트만(Nicolai Hartmann)의 ≪독일 관념론 철학≫의 주요 내용을 발췌하여 번역한 것이다. ≪독일 관념론 철학≫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제1부는 피히테, 셸링, 그리고 낭만주의를, 제2부는 헤겔을 다루고 있다. 하르트만이 <머리말>에서 밝히고 있듯이 제1부가 완성되고 난 뒤(1923년) 한참 뒤에 제2부가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다(1929년). 제2부의 출판이 이처럼 지연된 까닭은 헤겔의 철학 이론을 절충적으로 기술하거나 대충 연대순으로 정리하지 않고, 분명한 하나의 관점을 가지고 서술해 보려고 한 지은이의 욕심 때문이었다. 헤겔이 지식의 영역 전반에 걸친 내용을 자신의 철학적 세계관 속에서 포괄적으로 조직해 갔듯이, 하르트만도 그와 같은 헤겔의 방식을 따르고 싶었던 것이다. 전체적인 맥락을 가벼이 보고 주요 명제나 논거만을 떼어내어 해석하고 설명한다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헤겔의 명제는 전체 체계 속에서 그것이 지니는 풍부한 내용을 송두리째 드러낼 때 비로소 진정한 의미가 있다. 처음에는 언제나 무리가 따르겠지만, 이러한 내적 전환을 하지 않고서는 어느 누구도 헤겔 사상의 참된 의미에 접근할 수 없다. 그러므로 설사 어느 특정 부분을 떼어내 살펴보더라도 그 사상적 연관과 연속성은 반드시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이 하르트만의 기본적인 입장이다. 이 책이 ≪독일 관념론 철학≫의 제2부를 중심으로 발췌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 점이다.




옮긴이                          

박만준은 1951년 경남 창원에서 태어나 1969년 마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78년 부산대학교 문리과대학 철학과를 졸업했다. 이어 부산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 및 박사 과정을 마치고, <욕망과 자유의 변증법>이라는 논문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주 전공은 서양철학과 사회철학이었고, 부전공으로 동양철학을 공부했다. 주로 헤겔과 마르크스의 사회철학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박사학위 논문도 이런 관심의 연장선상에서 작성된 것이었다. 1984년 동의대학교 인문대학 철학과 교수가 되어 현재까지 근무하고 있다.

역서로는 ≪대중문화와 문화연구≫(존 스토리), ≪대중문화의 이해≫(존 피스크), ≪문학과 문화이론≫(레이먼드 윌리엄스), ≪문화연구의 이론과 방법들≫(존 스토리), ≪마르틴 하이데거≫(존 맥거리), ≪엄밀한 학으로서의 철학≫(E. 후설), ≪헤겔 변증법≫(N. 하르트만), ≪의식과 신체≫(디킨슨), ≪마르크스주의와 생태학≫(그룬트만), ≪하버마스의 사회사상≫(미첼 퓨지), ≪논리학 입문≫(어빙 코피), ≪최초의 인간과 그 이후의 문화≫(겔렌) 등이 있으며, 저서로는 ≪욕망과 자유≫, ≪늦잠 잔 토끼는 다시 뛰어야 한다≫, ≪철학≫(공저), ≪상생의 철학≫(공저), ≪성의 진화와 인간의 성문화≫(공저), ≪인성학≫(공저), ≪사회생물학 인간의 본성을 말하다≫(공저) 등이 있다.




본문 중에서              

헤겔은 철학사를 부흥시킨 최초의 철학자이다. 그것도 단순히 절충한 것이 아니라 역사의 흐름 자체가 고유하게 지니는 대립과 전진적인 보완의 원리에 따라 내적으로 부흥시켰다.


Hegel ist der erste Philosoph, in dem die Geschichte der Philosophie derartig wieder aufleft ― nicht eklektisch, sondern innerlich nach dem Prinzip desselben Gegensatzes und derselben fortschreitenden Ergänzung, die dem geschichtlichen Gange selbst eigentümlich ist.




출판사 서평                   

독일 관념론은 피히테로부터 헤겔까지 외줄기 흐름을 형성하고 있으며, 그 흐름은 헤겔에 이르러 거대한 바다를 이룬다. 따라서 헤겔을 들여다보면 독일 관념론이 어떻게 발원해서 어느 골짜기, 어느 강을 거쳐 헤겔이라는 거대한 바다를 이루게 되었는가를 알 수 있다. 이 책은 하르트만의 방대한 저서에서 제2부 <헤겔>을 중심으로 주요 내용을 발췌해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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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자 墨子 (B.C. 480~B.C. 389)    

묵자(墨子)는 성이 묵(墨)이고 이름은 적(翟)이다. ≪묵자≫를 비롯한 여러 자료를 종합적으로 생각해 보면 묵자가 묵가(墨家)를 창시하여 활동한 시기는 B.C 450년경부터 B.C 390년경까지로 춘추 말에서 전국 초에 해당하는 시기이다. 묵자가 태어난 곳은 공자와 맹자가 태어난 곳과도 가까운 노(魯)나라의 등(滕)이라는 곳으로 지금의 산동성 등주시(滕州市) 근교에 해당한다. 묵자의 출신계층에 대해서는 묵(墨)이라는 성과 관련하여 전과자라는 설과 그의 군사사상과 관련하여 무사라는 설 및 기술자 집단을 이끄는 공장(工匠)이라는 설 등이 있으나 모두 분명한 근거가 없는 주장들이다. 묵자는 무학, 문맹의 농부와는 달리 사각(史角)의 자손으로부터 학문을 배운 지식인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일반서민보다는 높은 계층인 사(士)의 신분이었던 것은 확실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일찍이 유학을 공부했으나 유가의 번잡한 예(禮)에 불만을 품고 새로운 학설을 창설했다. 묵자가 살아 있을 때는 제후들이 서로 다투어 천하가 요동치던 불안한 시대였다. 따라서 묵자는 분쟁을 제지하고 평화를 유지하는 것을 자기의 주요 임무로 삼았다. 그는 바쁘게 유세하고 자기의 이상을 선전하느라 조금도 쉴 틈이 없었다. 그러므로 “묵자의 자리는 따뜻할 날이 없다”는 말이 전해오는 것이다. 유가의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묵자도 요·순·우·탕·문·무 등의 성왕을 숭상했으며 특히 하(夏)나라의 우(禹)왕을 존숭했다. 그는 우임금의 실천정신과 희생정신을 따르려 노력했다. 맹자가 묵자를 금수(禽獸)와 같은 존재라고 욕하면서도 “머리끝에서 발뒤꿈치까지 온몸이 다 닳도록 천하를 이롭게 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칭찬하는 걸 보더라도 묵자의 천하를 위한 희생정신이 어떠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묵자는 사상가이면서도 논리학자이고 군사전문가였다. <묵경(墨經)>이 쓰인 것은 후기 묵가에 의해서이지만 이 안에 들어 있는 기본 사상은 묵자에게서 온 것이다. ‘성수(城守)’ 제편에서는 묵자의 탁월한 군사적 식견이 표현되어 있다. 묵자는 또 뛰어난 과학기술자로 군사 무기를 발명하기도 하고 기하학·광학·역학(力學) 등에 관한 창의적인 이론을 내놓았다. 묵자의 제자는 삼백 명이라고 ≪묵자≫에 나와 있으나 이것이 전부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의 제자 중에는 각국에 나가 관리가 되거나 유세를 하고 다닌 사람들도 많았기 때문이다. ≪여씨춘추≫에 “공자와 묵자의 무리가 매우 많고 제자들이 매우 많아서 천하에 가득 차 있다”고 한것을 보면 그의 학술적인 영향이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해설                       

묵가의 중심 사상이라 할 수 있는 상현에서부터 비명에 이르기까지의 ‘묵가 10론’과 비유를 중심으로 발췌 번역했다. 이것들은 각 주제에 따라 상·중·하 3편씩으로 편성되어 있으나 여기서는 대체로 그중 한 편씩을 들어 발췌 번역했다. 그리고 묵자의 언행을 기록한 경주편에서부터 공수편까지의 5편을 발췌 번역했으며, 묵학의 개요라 할 수 있는 친사편부터 사과편까지의 7편은 완역했다. 묵가의 병법서라고 할 수 있는 비성문(備城門) 이하 11편은 지나치게 전문적이라 생략했다. 그리고 <묵경>이라고도 불리는 경(經) 이하 6편은 <지만지 고전천줄>에서 따로 책을 내기로 기획하고 있으므로 여기서는 다루지 않았다.

≪묵자(墨子)≫는 묵자를 중심으로 한 묵가(墨家) 학파의 저작집으로 그 내용은 정치·경제·윤리·철학·군사에서부터 자연과학·논리학 등을 포함한 종합적인 학술사상을 체계화한 것이다. ≪묵자≫는 선진(先秦)시대 다른 제자(諸子)들의 저술과 마찬가지로 한 사람에 의해 일시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오랜 기간에 걸쳐 묵가의 학설을 모은 것이다.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묵가를 창시한 비조(鼻祖)인 묵자의 사상을 반영하고 있다.

묵자(墨子)를 중심으로 한 묵가(墨家)는 한때 유가와 함께 이대(二大) 학파로 가장 활발한 학술활동을 전개한 학파였으나 진한(秦漢)대에 들어와 200여 년의 번영을 마감하고 돌연 중국사상사에서 자취를 감추게 된다. 그 후 2000년이 지난 청대 말에 다시 등장하게 되지만 묵가의 쇠미는 사상사에서 아직도 하나의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묵가의 조직제도는 비교적 엄격하고 대단한 결속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 조직에는 거자(鉅子)라는 리더를 두었는데 묵자(墨者)들은 그를 성인처럼 받들면서 그의 지휘에 따라 일체의 행동을 감행했다. 묵자의 제자들은 대부분 용사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이들은 보통 무사들과 달리 억강부약(抑强扶弱)의 필요가 있을 때 고도의 전투력을 갖춘 의용군이 되어 약소국을 도와 싸웠던 것이다. 묵자의 인격에 끌리어 그의 제자가 되고 그들에 의해 조직된 묵문집단(墨門集團)은 종교성을 띤 국제적 평화유지단체로 생각된다. 강학(講學)을 중시하면서도 기율이 엄격하고 희생정신이 강한 특이한 집단이다.





본문 중에서             

天下之人皆相愛, 强不執弱, 衆不劫寡, 富不侮貧, 貴不敖賤, 詐不欺愚,
凡天下禍簒怨恨, 可使毋起者, 以相愛生也, 是以仁者譽之.

천하의 사람들이 모두 서로 사랑한다면, 강한 자가 약한 자의 것을 빼앗지 않을 것이며, 다수의 무리가 소수의 것을 강압적으로 빼앗지 않을 것이다. 또 부유한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업신여기지 않으며, 귀한 사람들은 천한 사람들에게 오만하게 굴지 않고, 간사한 사람들은 어리석은 사람들을 속이지 않게 될 것이다.
무릇 천하에서 재난과 찬탈과 원한이 일어나지 않게 하려면 서로 사랑해야 한다. 그래서 어진 사람들은 겸애를 찬미하는 것이다.





출판사 서평            

묵자가 다시 돌아왔다. 그는 이미 2400여 년 전에 세상을 떠난 인물이지만 여전히 인구에 회자되며 그 위대함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다. 사실 묵자의 사상이라고 해서 전혀 새로운 것들은 아니다. 다만 모든 사람을 똑같이 두루 사랑하는 ‘겸애’와 평화를 강조하는 ‘비공’의 사상처럼, 인간이 지녀야 할 ‘기본적인 원리’를 잊지 않는 것에 그 위대함이 있는 것이다. 이 책은 묵자의 핵심 사상이라고 할 수 있는 <상현>에서부터 <비명>에 이르기까지의 ‘묵가 10론’과 <비유>를 중심으로 발췌, 번역한 것이다.


옮긴이                    

박문현(朴文鉉)은 경북 자인에서 태어나 경북고를 졸업하고 부산대, 영남대, 동국대에서 철학 및 동양철학을 전공했다. 1980년대 초부터 현재까지 동의대학교 철학과에 재직하면서 인문과학연구소장 및 중앙도서관장을 역임했다. 도쿄대 방문교수 및 옌볜 과기대 객원교수를 거치고 새한철학회 회장을 지냈다. <묵자의 경세사상연구>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이후 묵자 사상 논문 20여 편을 국내외에 발표했다. ≪묵자≫, ≪기(氣)사상 비교연구≫를 번역했고, ≪철학≫, ≪세계고전 오디세이2≫, ≪동양 환경사상의 현대적 의의≫(일본), ≪묵자연구≫(중국) 등의 공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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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디르히 니체 Friedrich W. Nietzsche(독일, 1844~1900)


프리드리히 니체는 1844년 10월 15일 작센 주의 뤼첸 근처에 있는 뢰켄 마을에서 목사인 카를 루드비히 니체의 아들로 태어났다. 1849년 니체의 아버지가 죽자 니체의 할머니는 니체 가족을 이끌고 나움부르크로 이사했다. 나움부르크에서 니체는 할머니, 어머니 그리고 두 고모 등 네 명의 여자들 틈에서 성장하면서 내성적이고 소심한 성격의 소유자가 되었다.

1846년 누이동생 엘리자베트가 태어났고, 1848년 남동생 요제프가 태어났지만 요제프는 출생 후 몇 달이 지나지 않아 죽고 말았다. 엘리자베트는 니체가 바젤 대학의 교수가 되기 전부터 정신병이 발병하여 죽을 때까지 어머니와 함께 니체를 돌보았을 뿐만 아니라, 니체가 사망한 후 생전에 출판하지 않고 남겼던 원고들을 정리하여 니체의 유고집 ≪힘에의 의지≫를 편집, 출판하기도 했다.

니체는 어려서 예술, 특히 음악에 재능을 보였는데 열 살 때 다성(多聲)의 무반주 악곡인 모테트를 작곡했을 뿐만 아니라, 이미 열다섯 편의 시를 쓰기도 했다. 니체는 자신이 열두 살 때 영광으로 가득한 신을 보았다고 적기도 했다. 니체는 열네 살 되던 해인 1858년 나움부르크를 떠나서 포르타의 김나지움으로 학교를 옮겼다. 여기에서 니체는 크루크, 핀더 등의 친구와 함께 예술․문학 동아리 ‘게르마니아’를 만들어 매월 한 번씩 모여 각자가 소논문을 발표하고, 낭만주의 작곡가들의 악보도 논했다. 니체는 횔덜린, 장 파울, 쇼펜하우어, 바그너 등 낭만주의 문학가, 철학가 및 음악가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1864년 10월 니체는 도이센과 함께 본 대학에 입학했다. 니체는 본 대학에서 예술사, 교회사, 신학, 정치학 등에 관한 강의를 들었다. 포르타의 김나지움에서 니체는 무엇보다도 고대 그리스어에서 탁월한 재능을 보였고, 본 대학에서는 고전언어학 강의를 들으며 두각을 나타냈다. 당시 본 대학에는 고전언어학 세미나를 담당하는 두 교수가 있었는데, 그들은 프리드리히 리츨과 오토 얀이었다.

프리드리히 리츨과 오토 얀은 경쟁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리츨은 결국 라이프치히 대학으로 옮겼고, 니체는 리츨을 지도 교수로 삼고 그 역시 라이프치히 대학으로 옮겼다. 리츨의 권고에 따라서 니체는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소논문 두 편을 썼다. 1869년 스위스 바젤 대학에서 고전언어학 교수를 추천해 달라는 부탁을 받은 리츨 교수는 니체에게 임시 박사학위를 주선해 주고 니체를 추천했다. 니체는 25세에 바젤 대학의 고전언어학 임시 교수로 채용되었고, 그 다음 해인 1870년 정식 교수가 되었다. 1872년 니체는 첫 작품 ≪비극의 탄생≫을 출판했다. 1873년에는 ≪반시대적 고찰≫ 1편을 출판했다. 1878년에는 ≪인간적인 것, 너무나도 인간적인 것≫ 1편을 출판했다. 니체는 자주 병치레를 하였고, 1879년 극도로 몸이 쇠약해지자 바젤 대학의 교수직을 사임했다. 그 사이 니체는 바그너와 다년간 교제하다가 사이가 나빠져 결별했고, 말년에 ≪니체 대 바그너≫ 등의 작품에서 바그너의 음악을 혹평했다. 니체는 병약한 몸에도 불구하고 말년에 접어들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도덕의 계보≫, ≪바그너의 경우≫, ≪이 사람을 보라≫ 등 많은 작품을 집필했다.

니체는 1889년 1월 3일 이탈리아의 투린에서 정신병 발작을 일으켜 완전히 미친 사람이 되었고, 이때부터 어머니와 함께 예나에서 거주했다. 어머니가 죽자 누이동생 엘리자베트가 니체를 바이마르로 옮겼고, 니체는 1900년 8월 25일 바이마르에서 죽었다. 니체가 죽자 엘리자베트는 고향 뢰켄의 아버지 묘 옆에 니체를 안장했다.



해설           

∙ 이 책은 전체 분량의 3분의 1을 발췌한 것입니다.

19세기 말 서양철학은 헤겔의 거대한 체계적 관념철학의 해체라고 말할 수 있다. 마르크스, 키르케고르, 니체 등은 모두 합리론과 관념론을 해체하면서 등장한 사상가들이다.

니체(1844∼1900)는 청년 시절 잠시 스위스의 바젤 대학 고전언어학 교수를 지내다가 질병 때문에 은퇴하고 연금과 책 인세로 생활했다. 니체는 독일, 스위스, 이탈리아를 방랑하는 중에 저술에 몰두하면서 수많은 책을 출판했는데 상당수의 저술을 시 형식으로 출판했다. 니체는 1889년 정신병이 발작해 1900년 바이마르에서 죽을 때까지 10년 이상을 폐인으로 지냈다. 정신병의 원인에 대해서는 본 대학 시절 창녀촌에서 걸린 매독 때문이라는 설과 아버지로부터의 유전이라는 설이 있지만 후자가 신빙성 있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니체 철학은 한마디로 말해서 문명비판 철학이다. 니체는 문명의 요소들을 도덕, 종교, 예술, 학문(철학)으로 보고 있으며, 소크라테스의 지성 중심적 합리주의 이래로 니체 당시까지의 문명을 허무주의 내지 퇴폐주의로 낙인찍는다. 그러므로 니체는 창조적 정신에 의해서 지금까지의 문명의 가치를 해체하고 ‘힘에의 의지’라는 새로운 긍정적 가치를 창조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니체의 중기 저술로 초기 저술들과 후기 저술들을 연결해 주는 중요한 작품이다. 초기 저술들은 ≪비극의 탄생≫(1872), ≪반시대적 고찰≫(1873∼1876) 등이 있으며, 중기 저술들로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1883∼1886)와 ≪인간적인 것, 너무나도 인간적인 것≫(1878∼1880), ≪여명≫(1881), ≪즐거운 학문≫(1882) 등이 있고, 후기 저술들로는 ≪선과 악의 피안≫(1886), ≪도덕의 계보≫(1887), ≪반기독교도≫(사후 1911년 출판) 등이 있다.

초기 저술들에서 니체는 소크라테스의 합리주의를 허무주의로 규정하고 아폴로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을 참다운 예술의 근원으로 본다. 미술적인 형식과 음악적인 내용이 예술의 원천을 이룬다는 주장이다. 중기 저술들에서 니체는 초기의 예술비판을 확장해 문명 전체에 대한 비판의 붓을 든다. 특히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현대 문명의 허무주의와 퇴폐주의를 강력히 비판하면서도 창조적 문명의 건설을 외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니체는 허무주의, 초인, 영겁회귀, 운명애, 힘에의 의지 등 니체 철학의 핵심 개념들을 전개한다. 니체는 시적 표현을 통해서 자신의 긍정적, 창조적 철학을 절규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일상적 삶은 끊임없이 되돌아오므로 이러한 운명은 긍정하고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럴 때 우리는 삶의 내면의 원리인 디오니소스적 원동력, 곧 힘에의 의지를 알게 되고 힘에의 의지에 의해서 허무주의 문명을 긍정적 문명으로 바꿔놓을 수 있다. 타락한 종교인 기독교, 노예적인 기독교 도덕, 형식주의적 철학(학문), 낭만적이며 단지 사회와 영합하는 예술 등의 문명을 해체하고 왜소한 인간을 극복하는 길은 힘에의 의지를 자각한 초인 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

니체는 비체계적, 비지성적 사상가다. 니체 철학은 현대의 하이데거, 야스퍼스, 프랑스의 포스트모더니스트들뿐만 아니라 정신분석학자인 자크 라캉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본문 중에서    

Ich lehre euch den Übermenschen. Der Mensch ist Etwas, das überwunden werden soll. Was habt ihn gethan, ihn zu überwinden?

나는 그대들에게 초인을 가르쳐주고자 한다. 인간이란 극복되어야만 할 그 무엇이다. 인간을 극복하기 위해 그대들은 무엇을 했는가?



역자 소개      

강영계는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뷔르츠부르크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건국대 철학과 교수이며 중국 서북대학 객좌교수다.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과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대학에서 교환교수로 연구했고 건국대 문과대학장, 부총장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기독교 신비주의 철학≫, ≪사회철학의 문제들≫, ≪니체와 예술≫, ≪정신분석 이야기≫, ≪헤겔, 절대정신과 변증법 비판≫, ≪청소년을 위한 철학 에세이≫ 등이 있다. 역서로는 스피노자의 ≪에티카≫, 브루노의 ≪무한자와 우주와 세계≫,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쾨르너의 ≪칸트의 비판철학≫, 하버마스의 ≪인식과 관심≫, 베르그송의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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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자 미상       

이 책은 십삼경주소(十三經注疏)에 실린 ≪효경정의(孝經正義)≫(台北, 新文豐出版公司 影印本, 民國66年)를 저본으로 하여 번역하였습니다.

이 책은 발췌하지 않고 모두 완역한 것입니다.



해설          

≪효경(孝經)≫은 유가의 주요 경전인 십삼경(十三經)의 하나이다. 이 책은 ‘효도(孝道)’를 주된 내용으로 다루었기 때문에 ≪효경≫이라고 하였으며, 십삼경 중에서 처음부터 책 이름에 ‘경(經)’ 자를 붙인 것으로는 유일한 것이다.

≪효경≫의 저자와 저작연대

≪효경≫의 저자에 대해서는 몇 가지 이설(異說)이 있다. 즉, 공자(孔子)가 지었다는 설, 공자의 제자인 증자(曾子)가 지었다는 설, 공자의 70여 제자의 유서(遺書)라는 설, 증자의 문인(門人)들이 집록(輯錄)했다는 설 등이 있다. 그러나 어느 것도 확증할 만한 충분한 근거를 갖고 있지 못하다. ≪효경≫ 본문에 공자와 증자의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는 점과 학통(學統) 상으로 보아 증자의 문인에 속하는 사람들이 이 책을 썼을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타당할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효경≫의 저자가 분명치 않기 때문에 저작연대 또한 불명확하다. 아마도 춘추시대 말기에서 전국시대 사이에 저술된 것으로 보인다.

≪효경≫의 전승(傳承)과 판본(板本)

≪효경≫은 진(秦)의 분서(焚書) 때 하간(河間) 사람 안지(顔芝)가 보관해 두었던 것을 한(漢)나라 초기에 협서율(挾書律)이 해제되면서 안지의 아들 안정(顔貞)이 이 책을 세상에 내놓았다. 이것은 한대의 서체인 예서체(隸書體)로 된 것이었으므로 ‘금문효경(今文孝經)’이라 부른다. ≪금문효경≫은 전한(前漢)의 장손씨(長孫氏), 강옹(江翁), 익봉(翼奉), 후창(后蒼), 장우(張禹) 등에 의하여 전해졌다. 그 뒤 후한 말의 학자 정현(鄭玄)이 주석한 ≪효경≫ 1권이 있는데, 이것을 정주본(鄭注本)이라고 한다. 정주본에 대해서도 이설(異說)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정현이 주석하였다고 한다.
이에 반해서 한 무제(武帝) 때 노(魯)의 공왕(恭王)이 공자의 옛집을 헐면서 벽 속에서 ≪상서(尙書)≫, ≪논어(論語)≫ 등과 함께 ≪효경≫이 나왔는데, 이것은 고문으로 되어 있었으므로 ‘고문효경(古文孝經)’이라고 한다. ≪고문효경≫은 한 무제 때의 사람 공안국(孔安國)이 주석을 썼는데, 이것을 공안국전(孔安國傳) 또는 공씨전(孔氏傳)이라고 한다. 따라서 ≪효경≫에는 정주본인 ≪금문효경≫과 공씨전인 ≪고문효경≫의 두 가지 종류가 있게 되었다.
이상의 두 종류의 ≪효경≫이 양(梁)나라 때까지 함께 전해졌었는데, 공안국전은 양나라 말엽에 있었던 난리 때 망실되어 진(陳), 주(周), 제(齊)에는 금문정주(今文鄭注)만이 전해지게 되었다. 그 뒤 수(隋)나라 때에 이르러 비서감(秘書監) 왕소(王邵)가 공씨전을 경사(京師, 수도)에서 얻어 하간사람 유현(劉炫)에게 보냈고, 유현이 여기에 소(疏)를 써서 사람들에게 가르쳤다고 하는데, 당시의 사람들은 이것이 옛 공씨전이 아니고 유현 자신이 쓴 위서(僞書)라고 의심하였다. 한편, 공씨전은 위(魏)의 왕숙(王肅)이 정주본에 반대하여 쓴 위서라는 설도 있다.
이와 같이 금문정주와 고문공전에 대한 신뢰성 여부가 문제되어, 당(唐)의 현종(玄宗)은 719년(開元7)에 여러 학자들에게 명하여 두 종류의 ≪효경≫에 대한 옳고 그름을 논의하게 하였다. 유지기(劉知幾)는 고문을 위주로 하여 금문정주를 반박하고 유현이 교주(校注)한 고문공전을 주장하는 데 비해, 사마정(司馬貞)은 그와 반대로 고문공전을 유현의 위작이라 하여 반대하고 금문정주를 택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이러한 두 입장이 대립하여 결정이 나지 않자, 현종은 스스로 금문을 위주로 하는 새로운 주를 냈다. 이 신주는 ≪고문효경≫ 가운데 장점을 취하여 ≪금문효경≫을 보완한 것이다. 그 후 현종은 원행충(元行冲)에게 명하여 소(疏)를 짓게 하고 천하에 반포하였는데, 이것을 ≪어주효경(御注孝經)≫이라고 한다. 현종은 그 뒤 743년(天寶2) 5월에 ≪효경≫을 다시 주하여 천하에 반포하고, 2년 뒤인 745년 9월에 이것을 돌에 새겨 태학(太學)에 건립하였는데 이것을 ‘석대효경(石臺孝經)’이라고 한다.
송(宋)나라 진종(眞宗) 때 형병(邢昺) 등이 왕명으로 ≪효경정의(孝經正義)≫를 편찬하였는데, 이것도 원행충이 소를 쓴 ≪어주효경≫에 의거하였다. 현재 십삼경주소(十三經注疏)에 수록되어 있는 ≪효경≫이 바로 이것이다.
그 밖에 송대 사마광(司馬光)은 ≪효경지해(孝經指解)≫를 지었고, 철종(哲宗) 때 범조우(范祖禹)도 ≪효경지해설(孝經指解說)≫을 지은 바 있다. 또한 주희(朱熹)는 ≪고문효경≫과 ≪금문효경≫이 같지 않음을 보고, ≪효경≫의 내용을 독자적으로 분류하여 장(章)과 절(節)로 나누어서 ≪효경간오(孝經刊誤)≫를 지었는데, 이것은 고문을 위주로 하였다. 주희는 ≪효경≫을 경(經) 1장과 전(傳) 14장으로 나누고, 경 1장은 공자와 증자가 묻고 대답한 것을 증자의 문인이 기록한 것이라 하고, 전은 혹자가 전기(傳記)를 이끌어 경문(經文)을 해석한 것이라 하였다.
여하튼 ≪효경≫은 금문, 고문의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어느 것을 취하느냐 하는 것은 학자의 견해에 따라 차이가 있게 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금문을 위주로 하여 만든 ≪어주효경≫이 널리 보급되었다.
≪효경≫의 대표적인 주석서로는 당대(唐代) 육원랑(陸元朗)의 ≪효경음의(孝經音義)≫, 당 현종(玄宗)의 주(注)와 송대 형병(邢昺)의 소(疏)를 모은 ≪효경정의(孝經正義)≫, 주희(朱熹)의 ≪효경간오(孝經刊誤)≫, 원대(元代) 오징(吳澄)의 ≪효경정본(孝經定本)≫, 동정(董鼎)의 ≪효경대의(孝經大義)≫, 주신(朱申)의 ≪효경구해(孝經句解)≫, 명대(明代) 황도주(黃道周)의 ≪효경집전(孝經集傳)≫, 청대(淸代) 장용(藏庸)의 ≪효경정씨해집(孝經鄭氏解輯)≫, 모기령(毛奇齡)의 ≪효경문(孝經問)≫, 엄가균(嚴可均)의 ≪효경정씨주(孝經鄭氏注)≫, 장서(張叙)의 ≪효경정의(孝經正義)≫, 정안(丁晏)의 ≪효경술주(孝經述注)≫, 주춘(周春)의 ≪효경외전(孝經外傳)≫ 등이 있다.



≪효경≫의 내용

글의 내용면에서 볼 때, 제1장인 <개종명의장(開宗明義章)>은 효의 전체 대요(大要)를 밝히고, 제2장에서부터는 효의 세부적인 사항을 다루었다.
≪효경≫에 나타난 효의 의미는 두 가지 측면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 하나는 종족(宗族)의 영속(永續)이라는 생물학적 측면이고, 다른 하나는 가문의 명예라는 가치 혹은 문화적 측면이라 하겠다.
첫째로 효는 종족 보전이라는 생물학적 의미를 지니는 것이며, 또한 인류 문명의 전수라는 의미를 갖는다. “사람의 신체와 머리털과 피부는 모두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니, 감히 훼손시키지 않는 것이 효의 시작이다”(<開宗明義章>)라는 구절에서 볼 때, 나의 몸은 부모(조상)로부터 물려받은 것으로, 그것을 다시 후손에게 물려주어 자자손손 대를 이어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문화와 문명을 후대에 잇게 해야 한다. 대를 잇지 못하고 단절하는 것은 조상에 대한 최대의 불효가 되는 것이라 한다. 그러므로 <오형장(五刑章)>에서는 죄 중에서 가장 무거운 죄가 불효라고 하였다. 이에 맹자는 불효 중에서 가장 큰 불효는 대를 단절시켜 후손이 없어지게 하는 것이라 하였다(≪孟子≫ <離婁章句上>).
둘째로 효는 가치적 문화적 의미를 갖는다. “자신의 인격을 올바르게 세우고 도리에 맞는 행동을 하여 후세에 이름을 날려 부모님의 명예를 빛나게 하는 것이 효의 끝이다”(<開宗明義章>)라는 구절에서 볼 때, 사람은 훌륭한 일을 하여 그 이름을 세상에 떨쳐 가문의 명예를 빛나게 하는 것이 보다 더 큰 효행이라 하겠다. 여기에서 후세에 이름을 드날려 부모의 명예를 빛나게 한다는 것은, 속된 의미에서의 명예가 아니다. 즉 삶이란 생물학적인 생명 보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문화적 가치적 삶을 실현하는 것이 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또한 이 책에서는 부모에 대한 효도를 바탕으로 집안의 질서를 세우는 일이 치국(治國)의 근본이며, 효도야말로 천(天)·지(地)·인(人) 삼재(三才)를 관철하고 모든 신분계층에 동일하게 적용되는 최고덕목·윤리규범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로써 한국·중국·일본의 봉건사회에서 ‘효’가 통치사상과 윤리관의 중심으로 자리 잡게 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차례            

해설

효경서(孝經序) 


당 현종(唐 玄宗)

효경(孝經) 

1. 근본을 열어서 의리를 밝힌다  開宗明義章第一 
2. 천자의 효 天子章第二
3. 제후의 효 諸侯章第三 
4. 경대부의 효 卿大夫章第四 
5. 선비의 효 士章第五 
6. 서인의 효 庶人章第六 
7. 하늘과 땅과 사람의 법칙인 효 三才章第七 
8. 효로써 다스린다 孝治章第八 
9. 성인의 다스림 聖治章第九
10. 효행의 기준 紀孝行章第十 
11. 불효의 죄 五刑章第十一 
12. 중요한 도리인 효 廣要道章第十二 
13. 지극한 덕인 효 廣至德章第十三 
14. 널리 이름을 알리는 효 廣揚名章第十四 
15. 간쟁함 諫諍章第十五
16. 효에 대한 신명(神明)의 감응(感應) 感應章第十六 
17. 임금을 섬기는 원리인 효 事君章第十七 
18. 어버이 사후의 효 喪親章第十八


부록: ≪효경대의(孝經大義)≫ 

옮긴이에 대해



작품 중에서     

身體髮膚 受之父母 不敢毁傷 孝之始也
立身行道 揚名於後世 以顯父母 孝之終也.

사람의 신체와 머리털과 피부는 모두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니
감히 훼손시키지 않는 것이 효의 시작이고,
자신의 인격(人格)을 올바르게 세우고 도리에 맞는 행동을 하여
후세에 이름을 날려 부모님을 드러나게 하는 것이 효의 끝이다.



옮긴이          

도민재는 1966년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성균관대학교 유학대학 유학과를 졸업한 후, 동 대학교 대학원 동양철학과에서 석사와 박사 과정을 마치고, <조선전기 예학사상 연구>라는 논문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중국 북경대학교 철학과에서 고급진수과정을 이수하였고, 성균관대학교, 대구한의대학교, 상지대학교에서 강의하였으며, 현재 영산대학교 학부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주된 연구 분야는 유가철학과 예학 분야로, 전통 예절의 현대적 의미와 예절교육과 관련된 분야에 많은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있다. 공저로 ≪논어의 종합적 고찰≫(심산, 2003)이 있으며, <조선전기 예학사상 연구>, <한강 정구의 학문과 예학사상>, <한국의 전통 가정교육과 유교>, <유교 제례의 구조와 의미> 등 다수의 연구 논문이 있다.



편집자 리뷰    

효경은 전통사회에서 효의 기본서로 읽히던 책이다. 민간의 아동들로부터 군왕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의 필독서였다. 종족의 영속이라는 생물학적인 측면부터 이름을 날려 부모의 명예를 빛나게 하는 문화적 측면까지 효에 관한 모든 것을 담고 있다. 효경의 정확한 저자와 저작 연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것이 중요치 않을 정도로 고래를 막론하고 동일한, 효의 가치에 대해 알려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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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스투스 엠피리쿠스(고대그리스, AD 2~3세기)

섹스투스 엠피리쿠스는 의사이자 회의주의를 대변하는 철학자였다. 우리는 섹스투스의 생애에 관해 아는 바가 별로 없지만, 아마도 그는 로마와 알렉산드리아, 그리고 아테네에서 살았던 것 같다. 그의 저서는 11권이 남아 있는데, 한편으로 ‘피론주의’라고 일컬어지는 회의주의를 소개하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 회의주의에 대적하는 ‘독단주의 사상가들’을 논파하고 있다. 섹스투스의 저작은 고대 희랍의 회의주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원천으로 남아 있다.

해설                

철학사를 돌이켜볼 때, 많은 철학자들에게 회의주의는 극복의 대상으로 인식되었다. 심지어 명석 판명하지 않은 모든 것을 의심하고자 했던 데카르트도 자신의 회의를 절대적 회의가 아니라 방법적 회의라고 불렀다. 하지만 헬레니즘 시대 희랍에서는 회의주의가 주요한 학파 중 하나로 활약했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고대 희랍에서 회의주의가 어째서 등장했고, 어떤 논변을 펼쳤는지 밝혀야 한다. 이때 우리에게 가장 큰 도움을 주는 자료가 바로 섹스투스 엠피리쿠스의 저작이다.

섹스투스 엠피리쿠스는 고대 희랍의 회의주의를 이해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인물이다. 그의 저작이 1562년에 현대적으로 편집되기 전까지, 우리는 오직 키케로의 저작을 통해서만 고대 회의주의(주로 아카데미아 학파의 회의주의)에 대해 알 수 있었다. 하지만 16세기 이후 철학자들은 섹스투스를 통해서 회의주의뿐 아니라 독단주의 철학(가령 스토아 철학)에 대해서도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특히 데이비드 흄은 섹스투스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이처럼 섹스투스가 철학사적으로 중요한 인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섹스투스에 관해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은 그가 회의주의 철학자이자 의사였다는 것뿐이며, 우리는 아마도 그가 AD 2세기 후반부에서 3세기 초까지 알렉산드리아와 아테네에서 활약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섹스투스의 저작 중, 고대 회의주의를 요약해서 설명한 것이 바로 ≪피론주의 개요≫이다. ≪피론주의 개요≫는 전체 3권으로 이루어진다. 1권에서 섹스투스는 ‘피론주의’가 무엇이며 다른 철학과 어떻게 다른지 논의하는 한편, 2권과 3권에서는 독단주의자들의 여러 입장들을 논파하고 있다. 섹스투스의 저작은 우리에게 고대 희랍의 회의주의가 어떤 것이었는가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 줄 뿐 아니라, 헬레니즘 시대의 다른 철학자들(특히 스토아 철학)에 대해서도 주요한 전거가 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어째서 자신의 입장을 피론주의라고 명명했을까?

‘피론주의’라는 말은 엘리스 출신의 철학자 피론(BC 365~BC 275년경에 활동)의 이름에 따라 지어진 용어이다. 다시 말해 섹스투스는 피론주의의 창시자가 피론이라고 여기는 듯하다. 물론 피론이 실제로 회의주의자였는가에 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으나, 여하튼 피론주의자들은 우리가 외부 대상의 실제 모습에 대해 정확한 앎을 획득할 수 없으므로, 외부 대상에 대해 일체의 판단을 유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결과 우리는 마음의 평안(ataraxia)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섹스투스에 따르면 자연 탐구의 길은 크게 셋이다. 우선 독단주의자는 참된 앎이 획득 가능하다고 주장하나, 자신이 진리를 발견했다고 단언함으로써 탐구의 길을 중단했다. 반면 아카데미아 학파의 회의주의자는 진리가 획득 불가능하다고 주장함으로써 부정적 독단주의에 빠진다. 만약 아무것도 알 수 없다면 탐구를 해야 할 이유가 없다. 마지막으로 피론주의자는 독단주의에 빠지지 않고, 진리 발견의 가능성을 계속 모색한다.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은 섹스투스가 회의주의를 두 부류로 나누고 있다는 점이다. 즉 그는 자신의 피론주의를 아카데미아 학파의 회의주의와 차별화하고자 했다. 우리는 두 학파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개괄적인 설명을 제시할 수 있다.

먼저 아카데미아 학파의 회의주의에 대해 살펴보면, 피타네 출신의 아르케실라오스(315~240 BC)가 아카데미아의 수장이 된 후, 그는 아카데미아 학파의 철학을 회의주의로 변모시켰다. 아마도 그는 플라톤의 사후 아카데미아의 탐구 정신이 점차 독단주의로 변질되고 있음에 불만을 느껴서, 독단주의자들을 비판하는 데 주력했던 것 같다. 이때 아르케실라오스가 사용한 방법은 소크라테스의 논박술(elenchos)과 유사하다.

아르케실라오스는 소크라테스의 논박술을 통해 독단주의자들(특히 스토아 철학자들)을 논파함으로써 이들의 탐구 정신을 회복시켜주려 했다. 아르케실라오스의 논변은 정치하고 매력적이었지만, 많은 이들은 플라톤 철학이 회의주의였다는 데 동의하지 않았으며, 이 때문에 아르케실라오스의 주장은 아카데미아 내에서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아카데미아 학파의 회의주의가 완성된 것은 대략 1세기 후 카르네아데스(BC 214~BC 129)에 와서이다. 하지만 그의 제자들은 회의주의자의 논변이 전적으로 대인논증(ad hominem)인지 아니면 회의주의자 자신도 믿음을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해 논쟁을 벌였고, 급기야 기원전 90년대 혹은 80년대에 아카데미아의 주요 인물이었던 안티오코스가 스토아 학파로 전향하기에 이른다. 결국 아카데미아 학파와 스토아 학파 사이의 논쟁은 스토아 학파가 스토아 학파와 싸우는 꼴이 되었다.

이런 이유로 기원전 1세기경 아이네시데모스는 이제 아카데미아 학파 내에서 회의주의를 더 이상 계속할 수 없다고 생각했고, 보다 급진적인 회의주의 운동을 시작하고자 했다. 아마도 그는 아카데미아 학파의 전통하에서는 회의주의 철학이 한계에 부딪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피론을 시조로 하는 새로운 회의주의 철학을 만들었는데, 바로 그것이 피론주의다. ≪피론주의 개요≫에서 섹스투스는 기존의 철학을 비판하고, 한마디로 말해 철학의 틀을 완전히 새로 짜고자 했다.

하지만 우리는 회의주의자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과연 외부 세계에 대해 모든 판단을 유보하는 일이 도대체 가능한가? 감각에 대해 판단을 유보하는 회의주의자는 정상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는가? 또한 회의주의자는 자신의 주장이 옳다고 믿는가? 만약 자기 주장이 옳다고 믿을 경우 회의주의자는 독단주의에 빠지며, 옳다고 믿지 않을 경우 그는 자신의 행동방식이 성공할 것임을 다른 사람들에게 납득시킬 수 없다.

≪피론주의 개요≫에서 섹스투스는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회의주의자의 답변을 제시한다. 이에 따르면, 회의주의자는 외부 대상의 본성을 정확히 알고 있다는 독단적인 믿음을 가지지 않지만, 자신의 감각 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비독단적인) 믿음을 가질 수 있다. 가령 내 눈앞에 보이는 파란 책이 사실은 흰 책 겉에 파란 표지를 포장한 것일 수도 있지만, 나는 내 감각이 참임을 보장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그 책이 나에게 파랗게 보였다는 사실은 인정한다. 이렇게 볼 때, 회의주의자를 보통 사람과 구별해 주는 것은 믿음의 내용이 아니라, 믿음에 대한 태도이다. 즉 보통 사람은 자신의 믿음이 참인지 거짓인지 알고자 하기 때문에 항상 걱정하는 반면, 회의주의자는 이러한 독단적 태도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걱정할 것이 없다.

물론 회의주의자도 모든 근심, 걱정에서 해방된 것이 아니며, 배고픔과 목마름 등을 느낀다. 하지만 보통 사람들은 배고픔이나 목마름이 본성적으로 나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더욱 고통을 받지만, 회의주의자는 그런 독단적 믿음을 가지지 않는다. 결국 인간의 모든 고통은 외부 세계에 대한 집착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섹스투스는 마치 좋은 약을 처방했을 때 병이 치료되듯이, 우리가 외부 대상에 대한 독단적 판단을 유보할 때 우리 마음이 안정과 평화를 얻게 된다고 주장한다. 물론 정말로 섹스투스가 주장하듯이 마음의 평안이 판단 중지에 자연스럽게 수반하는가는 우리가 앞으로 검토해 보아야 할 과제이다.

결국 ≪피론주의 개요≫는 바람직한 삶이 어떤 것인지에 관해 회의주의자의 관점에서 논의하고 있으며, 회의주의자도 일상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음을 주장하고 있다. 여태까지 섹스투스의 저작이 국내에 한 번도 번역된 일이 없다는 점을 감안할 때, ≪피론주의 개요≫ 번역은 헬레니즘 시대 철학에 대한 국내 철학도들의 이해를 도울 수 있다는 점에서 값진 일이라고 생각되며, 이를 계기로 우리는 희랍 철학의 전통이 어떻게 계승, 발전되었는지에 관한 담론의 장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역자 소개      

오유석은 1971년 2월 7일 서울에서 출생했다. 서울대학교 철학과와 동 대학 철학과 대학원을 졸업했으며, 그리스 정부 장학생으로 초청되어 아테네 대학에서 2004년에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박사학위논문 <스토아 학파에 있어서 감각과 앎>은 올바른 감각적 인식이 가능한가에 대한 헬레니즘 시대 철학자들(스토아 학파, 에피쿠로스 학파, 회의주의)의 논쟁을 다루고 있다. 또한 그는 헬레니즘 시대 철학과 교부 철학 및 비잔틴 철학에 관한 논문들을 여러 편 썼으며, 그의 역서로는 에피쿠로스의 단편 모음 ≪쾌락≫(문학과 지성사, 1998)과 ≪크세노폰의 향연, 경영론≫(작은 이야기, 2005)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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