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무 Reigen

분류없음 2008/07/10 08:29

아르투어 슈니츨러 Arthur Schnitzler (오스트리아, 1862~1931) 
아르투어 슈니츨러(Arthur Schnitzler, 1862∼1931)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부유한 유태인 의학교수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그 역시 의학을 공부한 의사였다. 1886년부터 병원에서 일했으며 1893년부터 개업했으나, 생의 대부분을 작가로 활동했다. 작가 초기에는 주로 희곡을 집필했으며, 휴고 호프만슈탈(Hugo von Hofmannsthal, 1874∼1929)과 친구였고, 스스로 자신의 ‘정신적 도플갱어’라고 부르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적 기법을 많이 사용했다. 대표적인 희곡으로는 <아나톨(Anatol)>, <사랑의 유희(Liebelei)>, <윤무(Reigen)>, <광활한 땅(Das weite Land)>, <베른하르디 교수(Professor Bernhardi)>를 들 수 있다. 만년에는 희곡보다 소설을 썼으며 대표적인 단편소설로는 <구스틀 소위(Leutnant Gustl)>, <엘제 양(Fräulein Else)>, <야외로 가는 길(Der Weg ins Freie)> 등이 있다.

 그는 오랫동안 도나우 왕정의 퇴폐를 묘사하는 작가로 낙인 찍혔으며 모든 작품에서 당시 세기말 빈의 분위기를 묘사하고 있어 풍속 묘사가로, 그의 문학은 오락문학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슈니츨러의 문학에 대한 이러한 평가절하는 무대를 사회비판의 장으로 바꾸어놓기는 하지만 구체적으로 사회변혁을 추구하고 있지는 않다는 인식 때문이다. 1960년이 지나서야 슈니츨러는 사회전통의 압박, 소외, 고독, 자유와 헌신, 거짓과 실제에 대한 갈등을 예리하게 분석하는 작가로 평가되었으며 체호프처럼 위대한 인간묘사가의 한 사람으로 인식되었다.

 1914년까지 슈니츨러는 오토 브람(Otto Brahm)의 연출로 빈 부르크테아터뿐만 아니라 베를린극장에서도 가장 많이 상연된 희곡작가에 속한다. 슈니츨러는 1931년 사망할 때까지 멸망한 사회의 연대기 작가로 평가받았는데 이는 그가 뒤늦게 단편소설 쪽으로 방향을 돌렸기 때문이다. 1960년경에야 비로소 극장 감독으로 활약하고 있는 아들 하인리히 슈니츨러의 도움으로 슈니츨러의 르네상스가 시작되었다.

 

해설         
국내 최초 번역입니다.
이 작품은 원전의 분량이 많지 않으므로 발췌하지 않고 모두 번역하였습니다.

이 책은 피셔(Fischer)출판사에서 2000년에 나온 ≪Reigen, Liebelei≫ 23∼102쪽을 옮긴 것입니다.
작품해설을 위해서는 귄터 륄러(Günther Rühler)와 리하르트 알레빈(Richard Alewyn)의 글을 참조했습니다.

<윤무>는 1897년에 완성되었으며 창녀와 군인, 군인과 방 청소하는 하녀, 하녀와 젊은 남자, 젊은 남자와 젊은 여자, 젊은 여자와 남편, 남편과 귀여운 소녀, 귀여운 소녀와 작가, 작가와 여배우, 여배우와 백작, 백작과 창녀라는 10개의 대화로 구성되어 있다. 슈니츨러는 1900년에 이 작품을 자비로 200권을 인쇄하여 비매품으로 친구들에게 나누어주었고 친구들은 이 작품에 대해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한다. 루돌프 로타어(Rudolf Lothar)는 이 작품의 은밀한 매력을 열렬한 기쁨으로 읽었으며, 사랑의 헐떡거림에서 인간본성의 비꼬임을 재빨리 간파한 알프레트 케레(Alfred Kerre)는 이 작품의 ‘야릇한 힘’을 슈니츨러의 새로운 문학경향으로 보았다. 원래 이 작품은 <사랑의 윤무>였는데 케레가 <윤무>라고 하는 게 좋다고 해서 제목을 줄였다고 한다. 케레는 슈니츨러의 이 작품을 ‘소 데카메론’이라고 명명하기도 했다.

1903년 빈에 있는 한 출판사에서 이 <윤무>를 초판에 4만 부나 찍어 슈니츨러를 유명하게 만들었으나, 새로운 오해에 처하기도 했다. 펠릭스 잘텐(Felix Salten)은 ‘아르투어 슈니츨러와 윤무’라는 글을 썼는데 슈니츨러는 이 친구의 글에서 자신이 대중작가로 평가받은 사실에 분노했다. <윤무>는 1904년 독일에서 출판 금지되었으나 출판 금지 후 은밀하게 전파되어 <윤무>에 대한 패러디까지 나오면서 ‘알려지지 않은 유명한 책’이 되었다. 오스트리아 빈에서는 1908년부터 벤야민 하르츠(Benjamin Harz)출판사가 <윤무>를 다시 출판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검열 규정이 오스트리아보다 엄격한 독일에서는 어느 출판사도 이 책의 출판을 시도하지 않았다. 1931년에 와서 피셔출판사가 이 책을 출판하게 되었으며, 101번째로 출판된 이<윤무>는 작가의 서문 없이 출판하도록 압력을 받았다. 이 작품에 대한 슈니츨러의 해설이 민족사회주의로 인해 강력해진 반유태주의를 자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이는 <윤무>의 공연사와도 연관이 있었다. 비매품으로 찍어 친구들에게 준 작품에 대한 논란 때문에 1897년 슈니츨러는 자신의 <윤무>는 상연할 수 없는 것이라고 선언했다. 1903년 6월 25일 독일에서 처음으로 이 책을 공식적으로 구할 수 있게 되자 뮌헨에 있는 아카데미 드라마협회는 4·5·6장만 상연했으며, 1912년에 비로소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헝가리어로 초연을 할 수 있었다. 1918년 이후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검열이 사라졌으나 자칭 ‘도덕 방어자’라는 사람들의 반대는 사라지지 않았다.

검열의 종말과 함께 ‘은밀한 스캔들 작품’의 상연권을 얻기 위하여 지원자들이 줄을 섰는데 막스 라인하르트(Max Reinhardt)가 그들 중 한 사람이었다. 트리아노 극장, 야한 프랑스 해학극을 상연하는 극장도 이 극을 원했는데, 이는 <윤무>의 딜레마를 보여주는 점이다. 라인하르트는 1920년 초 이미 베를린을 정리하고 가을에 빈으로 갔으며, 베를린에서는 게르트루트 아이졸트(Gertrud Eysoldt)가 이 극의 상연권을 가지게 되었다. 책이 출간된 지 23년 만인 1920년 12월 23일, 베를린 국립음악대학 내의 샤우슈필하우스에서 처음으로 독일어로 공연되었다. 그러나 배우 아이졸트가 보여준 용기는 그 대가를 톡톡히 지불해야 했다. 이날 오후 대학본부는 이 건물 안에서는 “도덕적 종교적 정치적 혹은 예술적인 이유에서 자극적인 작품은 상연할 수 없다”는 대관 계약조항을 내세웠고, 대법원은 텍스트의 도덕성 때문에 공연을 금지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이날 오후 극장주인 막시밀리안 슬라데크 (Maximilian Sladek)와 여배우 아이졸트는 6주 구금이라는 위협에도 불구하고 공연을 강행했으며, 공연 자체는 방언으로 쉽게, 분위기는 안전하게, 방해자들에게는 어떤 반격의 빌미도 제공하지 않았다. 이 공연에는 국립재판소의 재판관과 지방재판소의 고문들도 참석했으나 이들조차 이 공연이 도덕성을 망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이 작품은 1921년 1월 3일 공연금지에서 풀려났으며 공연 마지막 날까지 매일 공연을 볼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이 초연이 있은 후 베를린 경찰청 음란 방지를 위한 핵심 자리에 있던 독일 민속학 교수 에밀 브루너(Emil Bruner)는 이 작품을 베를린 검찰청에 고발했다. 그는 이 상연을 하나의 스캔들로 간주했으며 이렇게 형사소송이 시작되고 ‘윤무 소송’이라는 이름과 함께 이 작품의 공연 역사가 시작되었다.

 이와 더불어 오스트리아에서도 심한 반대를 가져오게 되었다. 도덕성에 대한 염려로 인해 새로이 검열위원회가 소집되었고 시험공연이 있었다. 1921년 2월 1일 빈에서 시험공연이 있을 때 슈니츨러도 만족감을 보였고 비평가들은 비도덕성에 대해 아무런 반론도 제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집권당인 기독교사회당은 유태인 문학의 영향에 대하여 언급했으며 이 작품을 결국 ‘사창가 작품’이라고 명명했다. 가톨릭 단체는 ‘반 윤무 위원회’를 소집했으며 공연에 대해 경고했다. 2월 16일 공연에는 극장 내에서 반대파들과 이를 보려온 사람들 사이에 충돌이 있었고 마침내 공공의 안정을 위하여 공연금지라는 조치가 뒤따랐다. 1922년 3월 7일 <윤무>는 경찰청의 보호 하에 공연이 재개되었으며 6월 30일 마지막 공연을 마쳤다.

1921년 베를린의 <윤무>에 대한 형사소송은 무죄로 판결이 났으나 빈 극장에서 난투극을 직접 체험한 슈니츨러는 자신의 작품이 오해를 받는다는 사실과 반유태적 증오감을 불러일으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1922년 모든 공연을 거부했다. 저작권 때문에 그 후 <윤무>는 어느 무대에서도 공연될 수 없었다. 슈니츨러가 사망한 후 아들 하인리히는 이를 유언처럼 받아들였고 <윤무>는 1982년 1월 1일에 비로소 무대에 올려질 수 있었다. 이후 새로운 연출이 쌓이고 쌓였으며 <라 롱드(La Ronde)>라는 제목으로 프랑스에서는 영화화되기까지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2006년에 <라 롱드>라는 제목의 뮤지컬로 공연되었다.



차례         
해설
지은이에 대해

본문

옮긴이에 대해

 

본문중에서   
Der junge Herr:
Das Leben ist so leer, so nichtig―und dann,―so kurz―so entsetzlich kurz!
Es gibt nur ein Gĺück… einen Menschen finden, von dem man geliebt wird―

젊은 남자:
삶이란 이렇게 공허하고 이렇듯 허무하고 그리고 이렇듯 짧고-이렇듯 끔직하게 짧소소!
단 하나의 행복만 존재하지… 사랑해 줄 사람을 발견하는 일-

 

나오는 사람들  
창녀
군인
하녀
젊은 남자
젊은 여자
남편
귀여운 소녀
작가
여배우
백작



출판사서평   
<윤무>가 1921년 오스트리아에서 초연됐을 때 외설 혐의로 재판에 회부됐을 만큼 등장인물들은 노골적이고 원색적인 대사를 주고받는다. 하지만 이 작품이 당시에 그토록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이유는 작품의 외설시비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을 묘사하는 정확성 때문이었다. 독자들은 실낱같은 사랑의 희망을 때문에 끊임없이 다른 누군가를 찾아 헤매는 열 쌍의 연인들의 모습을 통해서 현대인이 가진 불안과 모순, 섹스로의 도피를 폭로하는 그 묘사의 정확성에 감탄하게 될 것이다.

 


옮긴이    
최석희는 대구가톨릭대학교 독어독문학과에 재직 중이다. 저서에는 ≪Die unverkaufte Braut≫, ≪그림동화의 꿈과 현실≫, ≪독일어권 여성작가≫(공저), ≪독일문학 그리고 한국문학≫이 있으며 역서에는 ≪힌체와 쿤체≫, ≪오를레앙의 처녀≫, ≪겐테의 한국기행≫, ≪메시나의 신부≫, ≪늑대가 돌아온다≫, ≪내 동생≫ 등 다수가 있다.



별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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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zman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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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크 베데킨트 Frank Wedekind (독일, 1864 ~ 1918)
프랑크 베데킨트는 1864년 7월 24일 독일 하노버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미국 시민권을 가진 의사로 1864년까지 샌프란시스코에서 살다가 귀국했고, 어머니는 가수였다. 유럽으로 돌아온 이 가족은 1872년 스위스로 이주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아버지가 1848년 프랑크푸르트에서 시민운동에 관여한 적이 있었고, 비스마르크의 제국 건설에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스위스 아라우 주에 있는 렌츠부르크 성을 사서, 그곳에서 프랑크와 그의 다섯 형제들은 학교에 다닌다. 베데킨트는 스위스의 로잔과 독일의 뮌스터, 뮌헨에서 대학에 다니며 아버지가 원하는 법학과 독문학을 공부한다.

그는 잠시 취리히의 한 식품회사에서 광고문안 작성자로 일하기도 하나, 24세에 부친이 사망하자 그 유산을 받아 경제적으로 독립하게 되고, 그 후 베를린과 뮌헨에서 보헤미안 생활을 하며 연극에 전념한다. 1892/1895년에는 파리에서 머물기도 하고, 런던으로도 여러 차례 여행한다. 1896년 이후에는 뮌헨에서 ‘히로니무스 욥스’라는 가명으로 잡지 <짐플리치시무스>의 동인으로 일한다. 1898년에는 카를 하이네가 이끄는 입센 극장에서 비서로 일하다가, 게오르크 슈톨베르크가 이끄는 뮌헨 샤우슈필하우스(오늘날의 뮌헨 카머슈필레) 극장에서 희곡 담당 및 연출가로 일한다. 이때 베데킨트는 황제 빌헬름 2세의 팔레스티나 여행을 조롱하는 시를 써서 황제 모독죄로 고발당했기 때문에 스위스로 도주한다. 출판업자 랑겐은 망명 중이어서 수입이 없는 작가에게 더욱더 과격한 시를 쓰도록 요구하여 자신이 발행하는 신문의 판매부수를 올리려고 한다. 이 때문에 베데킨트의 작품은 극장에서 공연을 거부당한다. 그리하여 베데킨트는 출판업자 랑겐과는 결별하고 법정에 자진 출두하여 7개월 동안 구금생활을 한다. 1901년부터 뮌헨의 카바레 극장 <열한 명의 형리>에 출연하고, 자신의 작품에 배우로도 출연하며 여러 차례 순회공연을 다닌다.

베데킨트는 42세 때 그라츠의 여배우 틸리 네베스와 결혼하는데, 틸리는 남편과 함께 베데킨트 스타일을 발전시켜 빈에서 카를 크라우스의 찬사를 받는다. 1906/1908년에는 베를린의 막스 라인하르트 극장에서 함께 작업하고, 1908년부터는 뮌헨에서 지낸다. 1906년 딸 파멜라가 출생하고 파멜라는 후에 희곡작가 카를 슈테른하임과 결혼한다. 1911년에는 둘째 딸 카디디야가 태어난다. 베데킨트는 맹장 수술이 잘못 되어, 탈장 수술이 여러 번 반복되다가 1918년 결국 54세의 나이로 죽음에 이르게 된다. 뮌헨의 발트프리트호프 묘지에서 있었던 장례식은 스캔들이 된다. 왜냐하면 뮌헨의 창녀들이 ‘자유연애의 선구자’인 베데킨트에게 마지막 존경을 표시하러 몰려왔고, 아직 덮지 않은 묘 안에서 작가 하인리히 라우텐자크가 광기 발작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해설         
이 책은 발췌하지 않고 모두 완역한 것입니다.
이 책은 번역의 원전으로
Frank Wedekind, Frühlings Erwachen. In: Frank Wedekind, Dramen 1. Berlin und Weimar: Aufbau-Verlag, 1969 을 사용했습니다.

프랑크 베데킨트는 동시대인들을 놀라게 하고 시민들을 두렵게 만든 존재였다. 금기 안에서 보호받고 유지되던 사회는 베데킨트로 인해 도전과 충격을 받았다. 사회는 그를 평화를 교란하는 자로 구분하고 검열과 판결로 박해했다. 베데킨트는 성 문제를 원초적인 사건으로 묘사하며, 성을 문명과 인습의 조종으로 소외된 시민 존재 속으로 침입한 혼돈스러운 자연의 힘으로 묘사한 최초의 작가에 속한다. 그는 사회적 안전조치인 결혼과 가족제도 등 성 행동의 형식들에 대비해서 플레이보이들이 감행하는 순간적 외도의 독특한 매력에서 성의 악마성을 그려 보인다. 타부의 강요가 다른 영역으로 옮겨가고 성 문제가 사실적이고 객관적인 형태로 표현되고부터 베데킨트의 성의 신화화는 무리하고 희극적이라는 인상을 주기도 했으나, 중요한 것은 그가 선입견과 위선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성 문제를 다룬 선구자였다는 점이다. 그에 의하면, “자연에서는 예의 없는 사건이란 전혀 없고, 오직 이롭거나 해로운 사건, 이성적이거나 비이성적인 사건이 있을 뿐이다”.

 베데킨트는 이미 인문계 고교인 김나지움 시절에 성을 “생 의지의 초점”으로 여긴 쇼펜하우어의 허무주의 세계관의 영향을 받았다. 니체의 글에서부터 에고이즘만이 모든 사회적 행동의 동기가 된다는 유물론적 확신을 전개시켜, “좋은 사회란 그곳에서 사업이 잘되는 사회”(≪슐로스 베터슈타인≫)라고 생각하고, ≪카이트 후작≫은 “죄악이란 잘못된 사업에 대한 신화적 명칭이고… 이 세상에서 가장 번창한 사업이 도덕이다”라고 조롱한다. 사랑, 결혼, 명예와 같은 시민계급의 이상을 베데킨트는 냉정하게 사업관계라고 여긴다. 베데킨트는 결혼을 부양과 사회적 체면으로 지불한 사랑이라고 보는 반면에, ≪룰루≫, ≪슐로스 베터슈타인≫, ≪프란치스카≫에서처럼 돈으로 살 수 있는 사랑이 원래 자유롭고 자발적인 사랑이라고 보여준다.

 성 문제와 사회의 갈등 다음으로 베데킨트에게 중요한 두 번째 주제는 당시 세기 전환기 문학에서 유행 현상이기도 했던, 예술가와 사회의 대립이다. 때때로 자신이 세상에서 인정받지 못한다고 생각했던 베데킨트에게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예술가는 저항과 거부의 상징이 된다. ≪니콜로 왕≫, ≪사랑의 묘약≫, ≪슐로스 베터슈타인≫에서처럼 예술가도 속물이 될 수 있다. ≪캄머쟁거≫, ≪지령≫의 화가 슈바르츠, 또는 ≪음악≫의 장애인 여가수 휘너발트와 같이 자신의 재능을 팔기 위해서 노력하기 때문이다. 여성 파우스트라고 할 수 있는 ≪프란치스카≫ 역시 성전환을 하여 자신의 존재를 예술작품으로 만들고, ≪헤라클레스≫는 세상을 가지고 실험을 하는데, 이러한 작품들이 베데킨트의 예술가 드라마들이다.

 베데킨트는 카를 슈테른하임과 게오르크 카이저 같은 표현주의 드라마 작가들의 본보기가 된다. 베르톨트 브레히트도, 룰루처럼 광적으로 생을 탐하는≪바알≫(1922)을 보여준 바 있고, 베데킨트의 사실적이고 간결한 발라드 어조를 자신의 서정시에서도 계속 이어가고 있다. 베데킨트에 대한 브레히트의 고백은 매우 열렬하다. “그것은 이 사람의 대단한 활기였다. 폭소와 조소가 깔린, 인간성에 대한 불굴의 찬가를 만들어낼 수 있었던 에너지 말이다…. 그는 톨스토이와 스트린드베리와 함께 신 유럽의 위대한 교육자에 속한다. 가장 위대한 걸작품은 그 자신의 개성이다.” 뒤렌마트의 그로테스크한 비유극들에서도 비극성은 씁쓸한 소극으로 변하는데, 이 역시 베데킨트의 극작론이 계속 발전된 것이라 볼 수 있다.

 ≪눈뜨는 봄≫은 청소년들 사이에 성의식이 깨어남을 보여준다. 빌헬름 2세가 지배하는 권위주의 국가에서 청소년들은 학교의 억압에 시달리고 있다. 그들은 부모들이 점잔 빼는 것에 대해 반기를 들고, 항상 같은 질문과 요구로 스스로 괴로워하고, 부모 세대들부터 거부당한 채, 죄의식과 억압 아래서 혼란스러워한다. 14세 되는 소녀 벤들라 베르크만은 “열네 살 된 저보고 아직도 황새를 믿으라고 진지하게 요구하실 수는 없어요”라고 하면서 어머니로부터 성에 대한 것을 알려고 한다. 어머니 베르크만 부인은 난처한 딸의 물음을 회피하며 뿌리친다. 김나지움 학생들인 멜히오어 가보어와 모리츠 슈티펠도 생식과 출산에 관한 터부에 대해 추적하려고 한다. 생각이 자유로운 어머니 밑에서 자란 멜히오어는 친구를 위하여 성교육적인 글을 <동침>이라는 제목으로 써준다. 모리츠는 몽상적이고 겁 많은 친구로 학교에서 낙제하게 되자 부모의 압력을 피해 미국으로 도주하려고 꿈꾸지만 실패하고 권총으로 자살한다. 그가 자살 직전에 만난 소녀 일제는 시민사회에서 타락한 여자아이로 낙인 찍혔으나, 술집이나 예술가들의 세계에서 나름대로 자신의 삶과 사랑의 욕구를 충족시키며 인생을 즐긴다. 일제의 유혹도 모리츠의 불안과 자살을 막을 수 없다.

 멜히오어와 벤들라는 건초 창고에서 우연히 만나 사랑을 경험하고, 벤들라는 임신하게 된다. 스캔들을 막기 위해 어머니는 벤들라가 ‘빈혈증’에 걸렸다고 설득하고, 돌팔이 산파에게 임신중절을 맡겨 벤들라는 죽게 된다. 그 사이에 멜히오어는 모리츠에게서 발견된 <동침>이라는 글의 작성자임이 밝혀져서 학교로부터 퇴학당하고 감화원에 수감된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내면 깊은 곳에서 썩었다”고 생각한다. 멜히오어의 퇴학을 결정하는 교사회의는 그로테스크한 인물들이 모여서 마치 동물 우화처럼 보인다. 교사들의 이름은 ‘조넨슈티히(=일사병)’, ‘훙거구르트(=주린 띠)’, ‘아펜슈말츠(=원숭이 비계)’ 등 심술궂게 지어졌다. 학생이 자살한 후 열린 교무회의의 큰 걱정은 교육문화청이 불행의 책임을 교사들에게 전가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결국 교사회의는 멜히오어를 희생양으로 삼는다. 감화원에서 탈출한 멜히오어는 한밤중에 벤들라와 모리츠가 묻힌 지 얼마 안 되는 묘지에 숨어든다. 묘지의 환상적인 장면에서 죽은 친구 모리츠가 그의 앞에 나타난다. 자신의 머리를 팔에 낀 모리츠는, 멜히오어에게 삶을 마감하라고 권하며 손을 내민다. 그때 우아한 정장과 실크해트를 쓴 복면의 신사가 나타나 둘 사이에 끼어들고 그는 멜히오어를 삶의 세계, 어른의 세계로 이끌고 간다.

이 연극은 초연에서 스캔들이 되었다. 어른들의 케케묵은 속물 세계에 대한 선전포고로서, 갈피를 못 잡는 청소년과 경직된 아버지들 사이의 금기시되던 것에 대한 토론으로서 말이다. 이 작품은 시대를 초월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청소년들이 자신들의 동경과 열망과 문제 때문에 얼마나 혼자서 자신을 파괴하고 소모하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1890/1891년에 씌어졌지만 1906년 막스 라인하르트가 공연할 때까지 초연을 할 수 없었다. 1912년에야 비로소 이 연극은 법원의 최종 결정으로 자유로운 공연 허가를 얻게 되었다.

 잇따라 일어나는 사건의 직접적인 장면들이 느슨하게 연결되는 극형식으로, 렌츠와 뷔히너를 이은 개방적 극형식을 발전시키며, 베데킨트는 이 극에서 사춘기 성 경험의 여러 가지 다른 양상들을 끌어들인다. 즉 포도밭에서의 핸셴 릴로와 에른스트 뢰벨의 동성애 성향이라든가, 자위행위, 또 절망적 소외감에서 벗어나기 위한 사내아이들의 싸움질 등이 그것이다.

 ≪눈뜨는 봄≫은 20세기 초와 독일 표현주의 시대의 많은 청소년 비극들의 모범이 되었다. 세대 간의 갈등이라든가 잘못된 사회에 의한 그릇된 청소년 교육은 19세기 말 20세기 초 이후 문학과 연극에서 활발하게 논의되던 중심 주제였다.

 1964년 ≪눈뜨는 봄≫은 독일의 유명한 연출가 페터 차데크의 연출로 새롭게 해석되어 무대에 올랐는데, 이 공연에서 무대는 대형 사진 한 장으로 이루어지고 좌우로 움직이는 이 사진 앞에서 연기자들은 정확하게 행동 모델을 강조하여 보여준다.

 

차례         
해설
지은이에 대해

나오는 사람들
제1막
제2막
제3막

옮긴이에 대해

 

나오는 사람들 
멜히오어 가보어
가보어 씨: 그의 아버지
가보어 부인: 그의 어머니
벤들라 베르크만
베르크만 부인: 그녀의 어머니
이나 뮐러: 벤들라의 언니
모리츠 슈티펠
렌티어 슈티펠: 그의 아버지
오토, 로베르트, 게오르크 치르슈니츠, 에른스트 뢰벨, 핸셴 릴로, 래머마이어: 김나지움 학생들
마르타 베셀, 테아: 여학생들
일제: 모델
조넨슈티히: 교장
훙거구르트, 크노헨브루흐, 아펜슈말츠, 크뉘펠디크, 충겐슐라크, 플리겐토트: 김나지움 교수들
하베발트: 급사
칼바우흐: 목사
치겐멜커: 렌티어 슈티펠의 친구
프롭스트: 아저씨
디트헬름, 라인홀트, 루프레히트, 헬무트, 가스톤: 감화원 수감생들
프로크루스테스 박사
철물공
폰 브라우제풀버 박사: 의사
복면의 신사
김나지움 학생들
포도밭의 남녀 일꾼들

 

본문중에서   
Unter Moral verstehe ich das reelle Produkt zweier imaginärer Größen. Die imaginären Größen sind Sollen und Wollen. Das Produkt heißt Moral und läßt sich in seiner Realität nicht leugnen.

도덕이란 상상의 두 거물들이 현실에서 낳은 산물이라고 생각해. 상상의 거물들이란 당위성의지이지. 그 산물을 도덕이라 부르는 것이고 그 현실성은 부정할 수 없는 거야.
 


출판사서평  
임신, 자위행위, 동성애 성향 등 당시 금기시 되었던 청소년들의 성 문제를 가감 없이 드러내 스캔들을 일으켰던 작품이다. 벤들라는 멜히오어와의 우연한 사랑 경험 때문에 임신을 하게 되고, 그녀의 어머니는 추문을 피하기 위해 그녀가 단지 ‘빈혈증’에 걸렸다고 말하며 돌팔이 산파에게 임신중절을 맡긴다. 성에 대해 무지할 수밖에 없었던 벤들라의 운명은? 김나지움 청소년들의 성에 관한 일화들이 자못 충격적으로 그려지고 있다.



옮긴이       
김미란은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독어독문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논문 <브레히트 희곡에 사용된 속담 연구>(1987)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는 <독일어권의 여성작가>(공저)와 <탈리아의 딸들>, 역서로는 모테카트의 <현대 독일 드라마>와 렌츠의 희곡집 <군인들/가정교사>, F. 로트의 <나귀타고 바르트부르크 성 오르기> 등이 있다. 현재 숙명여자대학교에서 독어독문학 전공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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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뒤렌마트Friedrich Dürenmatt (독일, 1921~1990)
프리드리히 뒤렌마트(1921∼1990)는 스위스 태생의 독일어권 작가로서 전후 가장 위대한 드라마 작가로 평가된다. 뒤렌마트의 작품은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영화화 되는 등 세계적인 성공을 거두었으며 사무엘 베케트나 오이게네 이오네스크와 더불어 현대 속의 고전 작가로 인정받는다.

뒤렌마트는 희비극의 장르를 발전, 정착시켰으며 신과 인간 구원의 문제, 자유와 정의의 문제 등 철학적 테마를 독특한 드라마 기법을 사용해서 지속적으로 분석하고 실험한 작가다. 뒤렌마트는 자신이 관찰하고 성찰한 것을 그로테스크, 패러독스, 풍자와 아이러니, 유머를 통해 희극화 함으로써 관객의 쓴 웃음과 성찰을 자아내는 데 특별한 기량을 보였다. 그는 어떤 영웅적 결단도 내릴 수 없는 현대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반성 외에는 없다는 신념의 소유자였다. 뒤렌마트는 항상 작품을 통해서 시대의 문제에 정열적으로 반응했고, 시대를 비추는 거울을 받쳐 드는 비평가적인 면모를 보여 주었다.

뒤렌마트는 매 작품마다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기발한 착상으로 관객과 독자의 흥미와 긴장을 고조시키는 데 탁월한 역량을 보였다. 로마를 멸망시키기 위해 집권한 로무르스, 장님만이 볼 수 있다고 주장하는 장님 공작, 자신이 발견한 과학 원리를 은폐하기 위해 정신 병원에 입원하는 물리학자, 자살을 기도하지만 죽지 못하는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결혼에 대해 살인죄의 형량을 내리는 검사, 정의를 돈으로 사겠다는 노부인, 환경 미화원이 되어버린 헤라클레스 등등의 역발상들은 유머와 결합되어 관객이나 독자들의 통념적 사고의 틀을 깬다.

1940년부터 뒤렌마트는 집필 활동을 시작했으나 1947년에야 본격적인 작품 활동의 소산인 드라마 <쓰여져 있느니라>를 출간했다. 그 후 <장님>(1948) <로무르스 대제>(1949), 범죄 소설 ≪판관과 형리≫(1951) ≪혐의≫(1952)를 발표했다. 1952년에는 기독교 신앙의 코메디라고 불리는 <미시시피 씨의 결혼>을 발표했다. 그가 독자들의 호응을 받은 작품들은 <로무르스 대제>나 <미시시피 씨의 결혼>과 같은 문학적 가치가 높은 작품이 아니라 그의 탐정소설이었다. 경제 사정이 악화되자 쓰기 시작한 탐정소설들은 미국과 영국에서 많은 인기를 끌었으며 교과서에 실리기까지 했다. 1953년에 <천사, 비빌론에 오다> 를 발표한 이후 1956년에 상연된 <노부인의 방문>은 뒤렌마트에게 세계적인 성공을 안겨 주었으며 영화로 만들어 지기도 했다. <프랑크 5세>(1959)이후에 발표된 <물리학자들>(1962)은 <노부인의 방문>과 더불어 세계적인 성공을 거두어 뒤렌마트에게 세계적인 작가로의 기반을 굳혀 주었다. 이후 뒤렌마트는 브레히트 이후 가장 뛰어난 독일어권 작가로 인정받게 된다. 이미 1954년 라디오 드라마로 발표되었던 <헤라클레스와 아우기아스의 외양간>을 1963년에 연극 대본으로 개작해서 무대에 올렸다. 드라마 외에도 뒤렌마트는 <이중인간>(1946) <경멸받는 인간과의 밤의 대화>(1952), <고장>(1955)등 여덟 개의 방송극을 집필했다.

1970년대에 나온 대표작으로는 <지구의 초상화>, <공범>, <유예>등의 드라마가 있다. 1977년 이후 뒤렌마트는 자신의 이념을 표현하기에 드라마가 적합한 수단이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해서 드라마 집필을 중단하고 주로 산문 작품에 몰두해서 <사법기관>(1985), <주문>(1986) <헝클어진 골짜기>(1989)등을 집필했다. 특히 1970년대에 그의 작품들은 독일어권 국가에서 베스트셀러의 자리를 꾸준히 유지했으며 특히 독일에서 무대에 가장 많이 오르는 작품으로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또한 문학계는 뒤렌마트를 현대의 고전작가로, 60세에 신화가 되어버린 존재라고 최고의 찬사를 던졌다.

작품 활동 외에도 뒤렌마트는 핵무기를 반대하고 고르바초프의 개방정책을 지지하는 등 세계 평화 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1990년 12월 14일 노이샤텔에 있는 저택에서 심장마비로 영면했다.



해설         

이 작품은 원전의 분량이 많지 않으므로 발췌하지 않고 모두 번역하였습니다.
이 책은 디오게네스 출판사가 출간한 ≪Herkules und der Stall des Augias≫(1980)을 원전으로 사용하였습니다.

뒤렌마트는 1954년 라디오 드라마로 발표했던 <헤라클레스와 아우기아스의 외양간>을 1963년에 연극 대본으로 개작해서 무대에 올리고 다시 1980년에 개작해서 발표했다. 이 책은 1980년에 개작되어 디오게네스 출판사에서 출판한 개정판을 완역한 것이다.

이 작품은 헤라클레스의 열두 개의 노역 가운데 다섯 번째에 해당하는 아우기아스의 외양간지기에 관한 패러디가 주요 내용이다. 그리스 신화의 등장 인물 중 지상에서 가장 힘이 센 영웅으로 알려진 헤라클레스는 제우스 신과 인간 알크메네 사이에서 태어난 반신반인(半神半人)이다. 헤라클레스는 그가 행한 열두 개의 노역(勞役)으로 유명한데 그가 왜 노역을 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신화학자들 사이에 이견이 있다. 그러나 헤라클레스의 노역의 배경에는 제우스의 아내인 헤라의 간계가 작용했다는 점은 신화학자들의 공통된 견해이다. 헤라는 남편인 제우스와 다른 여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헤라클레스를 용납할 수 없었다. 헤라가 헤라클레스에게 한 복수는 그녀가 제우스의 혼외자식에게 했던 복수들 중에서 가장 치열하고 집요한 방식이었다.

뒤렌마트는 이 작품에서 전 그리스인의 경탄과 찬사를 받았던 헤라클레스를 몰락한 소시민적 부르주아로 탈바꿈시킨다. 헤라클레스는 일반 시민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생업에 종사하는 직업인일 뿐이다. 이 작품 속에서 헤라클레스의 노역은 그리스의 신화와는 정반대로 하나도 성취되지 못한다. 신화에 나오는 노역은 일감, 직업과 동일시되며 헤라클레스는 사례금을 받아 아내를 부양해야 하는 가장으로 등장한다. 헤라클레스는 부채를 갚기 위해 엘리스 국의 쓰레기를 치우는 노역을 하게 된다. 쓰레기 치우는 일 따위는 수치스럽게 생각하는 헤라클레스가 외양간지기가 되기로 결심을 한 이유는 애인 데이아네이라가 빚을 갚기 위해 매춘을 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쓰레기에 매몰되기 직전인 엘리스국은 쓰레기 처리를 위해서 헤라클레스를 고용한다. 돈을 벌기 위해서 쓰레기 처리에 나선 헤라클레스는 쓰레기를 강물로 쓸어버리려고 하지만 수자원국이 제동을 건다. 헤라클레스에게 엘리스 인들이 계속 관청의 허가를 받을 것을 요구하자 의욕을 상실한 헤라클레스는 결국 쓰레기 처리에 실패한다. 이렇게 뒤렌마트는 제도와 규제에 얽매어 아무 것도 성취할 수 없게 만드는 관료주의의 병폐를 풍자한다.

이러한 풍자는 쓰레기 문제를 논의하는 시의회 장면에서 의원들이 각자 상이한 의견과 주장을 내놓자, 그 주장과 의견을 검토하기 위해서 또 다른 위원회가 구성되는 부분에서 절정을 이룬다. 또한 하나의 목표를 세웠으나 다양한 이유로 그 목표를 포기해버리는 민주 국가체제에 대한 풍자도 엿볼 수 있다. 민주주의 체제가 복지부동의 관료주의 체제로 경직되면 결국 공허한 토론과 아무런 성과도 이루지 못하는 행정체계를 존속시킬 뿐임을 보여준다. 인간이 만들어 낸 제도와 기구를 인간이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제도와 기구가 인간을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또 아우기아스를 통해 법치국가에 대한 풍자가 드러나는데 아우기아스는 목표 달성과는 상관없이 오직 민주국가의 법을 준수하는 것이 최우선임을 강조한다. 따라서 상황의 개선이나 목표 달성과는 배치되는 법치민주주의 원칙만을 고수 하려는 것이 얼마나 모순인가를 보여준다.

쓰레기 처리의 실패로 더욱 궁핍하게 된 헤라클레스는 서커스에서 힘 자랑으로 돈을 벌려고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다. 헤라클레스는 강한 육체적 힘을 가졌지만 정작 그 힘은 빚을 갚고 생계를 유지하는데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한다. 기술 자본주의 경제 체제하에서 그의 육체적 힘은 효용가치를 잃었다. 총알 하나가 헤라클레스의 힘을 대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엘리스의 대통령인 아우기아스는 여러 면에서 뒤렌마트의 또 다른 희극 <로무르스 대제>의 로무르스를 연상시키는 인물이다. 로무르스가 로마를 멸망시키기 위해 양계(養鷄) 외에는 어떤 일도 하지 않으려는 현자이듯이 아우기아스는 감춰진 영웅으로서 자신의 영토 내에서 개인이 이룰 수 있는 최상의 것을 성취하는 뒤렌마트적인 용감한 인간이다. 아우기아스는 인간으로 가능한 것을 개인적 영역에서 쓰레기 더미를 자신의 정원으로 만들면서 성취한다. 아우기아스는 쓰레기 더미가 된 국가는 더 이상 변화하거나 개선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사적인 영역에서 스스로의 노력으로 작은 파라다이스를 건설한다.

이 작품 속에는 법치국가와 관료주의에 대한 풍자 외에도 학벌, 통신 기밀, 흥행 산업 등 현대사회의 제반현상에 대한 풍자가 나온다. 헤라클레스의 비서인 포리비오스는 헤라클레스의 폭력으로 세 번이나 사지가 부러진 경험이 있지만, 헤라클레스의 곁을 떠나지 못하고 그의 비서직을 수행한다. 왜냐하면 포리비오스는 대학 졸업장이 없어서 다른 곳에 취직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생명을 잃을지언정 직장을 그만둘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를 통해 뒤렌마트는 학벌 위주의 사회를 풍자한다.

이상 언급한 모든 풍자는 결국 영웅을 풍자하기 위한 배경적인 것이고, 근본적인 풍자는 영웅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영웅에 대한 풍자를 통해 영웅이 몰락하고 소멸할 수밖에 없는 시대가 왔음을 강조한다. 힘과 영웅은 시대와 더불어 변화한다. 헤라클레스의 무서운 괴력은 기술 자본주의 산업시대의 직업인에게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헤라클레스가 물리쳐야 할 거대한 괴물들은 환경보호제도에 맡겨졌으며 도둑 기사들은 정치계에 유입되었기 때문에 헤라클레스는 직업의 근간을 잃게 되고 엘리스 국의 청소나 스팀팔리엔의 새 떼 소탕작업에 투입된다.

이 작품의 드라마적 구상은 뒤렌마트 자신의 세계관의 시적 표현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는 세계 자체를 하나의 괴물로 생각했다. 따라서 극 속에 등장하는 쓰레기, 관청, 인간들은 헤라클레스가 극복해야 할 괴물들이다. 괴물의 하나인 쓰레기를 처치하려는 헤라클레스의 노력은 또 다른 괴물인 관청과 새로운 것에 두려움을 갖는 인간들에 의해 좌초된다.

영웅은 뒤렌마트적인 용감한 인간으로 대체되고 아우기아스처럼 쓰레기 더미 위에 정원을 만드는 일이 뒤렌마트적 용감한 인간의 과업이다. 뒤렌마트는 용감한 인간형을 제시하는 것을 그의 작품의 중요한 과제로 삼아 반 영웅의 시대에 영웅을 대체하고 있다. 뒤렌마트의 용감한 인간은 무의미로부터 의미를 산출해서 인간의 가슴 속에 세계 질서를 다시 세우는 사람이다.

 

차례         
해설
지은이에 대해

헤라클레스와 아우기아스의 외양간

옮긴이에 대해

 

본문중에서   
Die Gnade, daß unsere Welt sich erhelle, kannst du nicht erzwingen, doch die Voraussetzung kannsr du schaffen, dasß die Gnade-wenn sie kommt- in dir einen reinen Spielgel finde für ihr Licht.

우리의 세계를 밝혀줄 은총을 너는 강요해 받을 수 는 없다. 하지만 은총이 내려온다면 네 속에서 빛을 위한 순수한 거울을 발견할 수 있도록 적어도 전제조건은 만들어 놓아야 한다.

 

나오는 사람들
헤라클레스: 민족 영웅
데이아네이라: 헤라클레스의 애인
포리비오스: 헤라클레스의 비서
아우기아스: 엘리스국의 대통령
필로이스: 아우기아스의 아들
이올레: 아우기아스의 딸
캄비세스: 외양간 머슴
리카스: 우편배달부
탄타로스: 서커스 단장
열 명의 의원들
두 명의 무대 인부들


출판사서평  
38만 청년 실업시대, 신화 속 영웅 헤라클레스도 취업난을 피할 수 없다. 실직자가 된 그는 빚을 갚기위해 동분서주한다. 외양간 쓰레기 치우기, 서커스에서 차력쇼 하기, 새떼 쫓기 등 가리지 않고 닥치는대로 일하지만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뒤렌마트는 신화 속 인물들을 처절하고 남루한 현실로 끌고 들어옴으로써 존재하기 위해 투쟁해야 하는 현대인의 지친 삶을 풍자한다.


옮긴이       
황혜인은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독문과를 졸업하고 독일 마인츠 대학에서 독문학마기스터 학위를 취득했다. 마인츠 대학을 졸업한 후에 독일 본 대학교에서 독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동국대학교 독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요 저서와 논문으로는 ≪뒤렌마트의 희비극≫(자연사랑, 2004), <알프레드 되플린과 헤르만 카삭 비교연구>, <그릴팔쪄 연구>, <괴테와 쉴러>, <레씽의 에밀리아 갈로티 연구>, <브레히트의 갈릴레이의 생 연구> 외 다수가 있다. 역서로는 ≪천사 바빌론에 오다≫(책세상, 2007), ≪사포≫(박이정, 2005), ≪메데아≫(박이정, 2007)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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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마하몬뜨리(쌉) พระมหามนตรี(ทรัพย์) (태국, ?~1845?)    
태국에 성씨(姓氏) 제도가 도입된 시기는 라마 6세(1910∼1925) 때다. 그전에는 한두 음절로 된 이름만 있었다. 라마 3세(1824∼1851) 때 활동했던 프라마하몬뜨리(쌉)[또는 프라마하몬뜨리옹카락(쌉)]는 끌런에 매우 능했고, 싹디나 2000라이 급(級)의 당시 궁정 내 경찰이었다는 기록과 작품 두 편 외에는 알려진 바가 없다.

그 관등명으로 보아 가문은 알 수 없으나 이름과 직책은 알 수 있다. 괄호 안의 ‘쌉’이 그의 본명이고, ‘프라마하몬뜨리옹카락’은 관직명이다. 그의 관등은 ‘프라’ 급이고 관직이 ‘옹카락’인 것으로 보아 왕이나 왕실의 호위를 맡고 있는 궁정 경찰이나 근위대로 보인다. ‘옹카락’이 왕으로부터 사령장을 수여받은 관등이라는 뜻을 함유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 그는 왕궁을 지키는 경찰대나 근위대에 소속된 고위 관료였던 것 같다. ‘마하몬뜨리’는 그 직의 우두머리임을 말해준다.

관등이나 관직명 뒤의 괄호 안에 한 음절로 된 이름이 들어 있는 현상은 성이 아직 없었던 시대에 활동했던 작가 중 이름이나 관등이 겹치는 경우에 흔히 일어나는 현상이다. 라마 1세 때에 활동했던 작가 짜오프라야프라클랑(혼)은 거의 같은 시대에 활동했던 루엉써라위칫(혼)과 관등명과 이름을 함께 씀으로써 구별하고 있다.

당시 태국 관등은 맨 위로부터 쏨뎃짜오프라야, 짜오프라야, 프라야, 프라, 루엉, 쿤, 믄, 판, 타나이 9등급이었는데, 쿤 이상의 관료는 사회적으로 고급 관료로 간주되고, 왕을 알현할 수 있었다. 9등급 중 상위 2등급은 대체로 왕족이 전담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프라’ 급이 비교적 높은 관직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프라마하몬뜨리(쌉)는 라마 1세 때에 태어나 1845년경이나 그 이전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 인물로, 태국의 대문호라 일컫는 쑨턴푸−프라쑨트라워한(푸)−와 거의 동시대 인물로 평가될 뿐 더 자세한 이력이나 생활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그의 작품으로는 라마 2세의 작품인 ≪극본 이나오≫를 패러디한 작품이라 평가되는 ≪라덴 란다이≫ 외에 경찰의 권력 남용 사실을 고발한 ≪플렝야우ᐨ밧쏜테≫가 있다. 나중 작품은 그가 왕궁 경찰의 검을 보관해 두는 무기고에 숨겨두었으나, 그의 생존 시 다른 동료에 의해 발견되어 공개되었다고 하는데, 이 고발 작품으로 인해 그의 문학적 명성이 알려졌고 동료들은 앞을 다투어 그 작품을 베꼈다고 전한다. 그의 두 작품의 성격으로 보아 그는 시대성에 민감하였음을, 특히 비윤리적이거나 부도덕한 사건에는 그 대상이 누구건 간에 가만히 있지 못하는 정의감이 강한 성격의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해설         

국내 최초 번역입니다.

이 책은 ≪프라마하몬뜨리(쌉)의 봇라컨 르엉 라덴 란다이≫(태국교육위원회, 1981)을 원전으로 삼고 번역하였습니다.

≪라덴 란다이≫는 태국 최초로 패러디 기법을 사용한 풍자문학이라는 점에서 태국문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 작품은 제목이나 형식만 보면 공연 콘을 위한 봇라컨의 구색을 모두 갖추었으나 내용을 보면 공연보다는 읽고 즐기는 데 더 중점을 둔 작품이라는 데 많은 학자들이 입을 모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순수한 창작문학이라는 관점 외에 당시 일어났던 사건에 대한 기록문학이라는 점도 함유하고 있다고 한다.

실제 이 작품은 작자인 프라마하몬뜨리(쌉)의 생전에는 발표되지 못하다가 그의 사후에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가 사망한 지 약 40년이 지난 후인 1887년에 그의 두 작품은 인쇄되어 ‘와찌라얀 도서관’에 소장되었으며, 다시 30∼40년이 지난 1920년 1월 초순경에 ‘뜨리암빠와이’라는 이쑤언(비슈누)신을 맞는 힌두의식의 기념책자로 참석자에게 배포됨으로써 세상에 알려졌다고 전해진다.

이 작품의 창작 배경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라마 3세 당시 떠돌이 거지 한 사람이 인도에서 태국에 와서 인도인들이 몰려 사는 방콕 힌두신전 앞, 그네거리(싸오 칭차)에 살고 있었는데, 그는 해금을 켜는 악사 거지였다고 한다. 그가 짧은 태국어로, 전후가 없는 태국 노래 한두 마디를 팔며 저잣거리를 다녀서 그 근처 사람들 사이에서 잘 알려진 인물이었다고 한다. 그 거리에는 란다이 외에 쁘라두라는 이름을 가진 힌두교도 인도인이 살았다. 그는 클렁럿 운하 근처에 있는 성문 가까이에 외양간을 짓고 젖소를 쳤는데, 빳따니에서 온 전쟁포로 쁘라대를 노예시장에서 아내로 사왔다. 어느 날 란다이와 쁘라두가 쁘라대를 가운데 두고 서로 싸웠다고 한다. 쁘라두가 소를 몰고 성 밖으로 나간 사이에 란다이는 쁘라대를 유혹하는 데 성공했고 이 사실을 안 쁘라두가 란다이와 크게 다툰 것이다.

자바 왕국의 왕자 이나오가 ‘캑’이듯이 란다이도 역시 ‘캑’이다. 이나오는 왕자 신분의 캑이지만 란다이는 거지 신분의 캑이다. ‘캑’이란 말은 인도인, 스리랑카인 등 서남아시아인과 말레이인이나 자바인 등 동남아시아인, 그리고 아랍인 등을 지칭하는 태국어다. 아랍에서 온 캑들은 대체로 아유타야 시대에 무역상인의 신분으로 태국에 진출하여 고위관료로 정착하여 사회적으로 높은 신분을 누리고 있다. 이들을 제외한 캑들에 대해 태국인들은 대체로 혐오감이나 멸시감을 가지고 냉대한다. 태국인들의 서남아시아와 말레이 출신 캑에 대한 노골적인 멸시는 이 작품에 잘 나타나 있다. 당시 말레이는 태국의 속방이기도 했다.

당시 태국인들에게 인도에서 이주해 온 가난한 인도인들은 천민 그 자체였고, 말레이에서 팔려온 전쟁포로인 노예 여인은 신분이 노예였던 이유로 인간 이하로 생각되던 시대였다. 그러므로 태국인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 같지 않은 그 세 사람이, 더군다나 피부가 검고 귀에는 손가락이 드나들 정도로 구멍이 나 있는 추녀를 차지하기 위해 두 사내가 저잣거리에서 싸운 사건은 방콕 사람들의 입에 오랫동안 회자되며 웃음거리가 되기에 충분했다. 프라마하몬뜨리(쌉)는 이 이야기를 듣고 실명을 사용하여 이 작품을 썼다고 한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라덴 란다이≫는 당시 태국 국민들이 가장 즐겼던 라마 2세가의 작품, 즉 장편 서사문학 작품인 ≪극본 이나오≫를 패러디한 작품이라고 한다. 많은 작품 중에서 이 작품을 선택한 이유를 추측해 보자면, 우선은 거지 란다이의 이야기와 자신이 의도한 이야기의 플롯이 유사했고, 다음으로는 상류층을 풍자하기 위해서는 상류층이 즐기는 작품을 패러디하는 것이 손쉬웠을 것이다. 이외에도 서양의 영향을 받기 시작한 시대에 살고 있던 작가는 상류층들이 즐기는 기존의 왕자와 공주 또는 신에 대한 그렇고 그런 권선징악을 주제로 한 이야기, 즉 ‘짝짝 웡웡’ 이야기의 방식을 벗어나 새로운 문학 형식을 추구하려 했으나 아직은 그들이 선호하는 양식을 택했을 것이라고 본다. 그래서 작가는 왕궁 무용극의 형식을 충실히 따라 다양한 곡조를 사용했다.

≪극본 이나오≫는 라마 2세의 작품인데다가 왕궁의 여인들만이 궁에서 공연했던 정교하고 고상한 품격을 가진 연극이다. ≪라덴 란다이≫는 그 분량을 비교하면 ≪이나오≫의 100분의 1도 안 되는 짧은 길이이고, 등장인물도 ≪극본 이나오≫와 비교하면 수적으로 매우 적다. 사회적으로 천민인 거지 란다이와 소치기 쁘라두, 쁘라두의 아내 쁘라대와 타워이에서 온 포로 여인으로 떡 행상을 하는 끄라애, 모두 네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본 이나오≫를 읽은 사람이면 누구나 이나오가 란다이, 쩌라까가 쁘라두, 부싸바가 쁘라대임을 알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이 작품을 두고 ≪극본 이나오≫를 패러디한 작품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침실에서 주인공의 모습, 달빛, 풀 향기, 밤새의 울음소리 등은 두 작품이 상치(相馳)하고, ≪극본 이나오≫가 환상적이고 아름다운 낭만적인 분위기인 반면 ≪라덴 란다이≫는 슬프고 귀신이 나올 것 같이 음산하고 기괴하다.

≪극본 이나오≫가 왕자 이나오의 혼인담이 주를 이루는, 아싼대와 왕가와 라뚜 왕가 간의 이야기인 반면에 ≪라덴 란다이≫는 제목과 달리 당시 사회의 가장 천한 계층의 이야기이다. ≪극본 이나오≫가 자바 왕국의 왕자 이나오를 주인공으로 한다면 ≪라덴 란다이≫의 ‘라덴’은 자바어로 ‘왕자’를 뜻하나 실제로 그는 왕자가 아니라 거지 악사다. 말이 악사이지 그는 인도에서 온 떠돌이 걸인으로, 태국어도 어눌하고 태국의 서사문학인 ≪극본 쑤완나홍≫의 구걸 대목 한두 구절을 외워 해금을 켜면서 구걸하는 인물이다. 이나오 왕자의 상대역인 쩌라까도 왕자이나 이나오에 비해 열세한 국가의 왕자다.

그러나 란다이의 상대역인 쁘라두는 거지는 아니지만 역시 인도에서 온 힌두교도로 소를 치는 일을 하는 인물이다. 이나오의 배우자인 부싸바 공주는 미인이며 심성이 고운, 고전문학에 등장하는 전형적인 공주인 데 비해 쁘라두의 아내 쁘라대는 태국 남부의 빳따니에서 잡혀온 말레이인 노예로, 노예시장에서 쁘라두가 돈을 주고 사온 여성이며 외모상으로도 부싸바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의 추녀이고 얼굴색도 검으며 바람기가 있는 여성이다.

이상의 사실로 보면 프라마하몬뜨리(쌉)는 자신의 끌런 솜씨를 뽐내보려는 야심에서 당시 방콕인들이 즐기는 왕가 이야기인 ≪극본 이나오≫를 천민의 이야기로, 사내답고 정의로운 이나오를 바람둥이 란다이로, 현숙한 미인인 부싸바를 다른 남성과 정분이 나는 유부녀 쁘라대로 패러디함으로써 당시의 사건을 기록도 하고 한층 더 웃음거리로 만들었다고 하겠다.

위와 같은 주장은 끄롬프라야담롱라차누팝 대군이 1920년에 쓴 이 작품의 서문에 나타나 있다. 그러나 근래에는 다른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외형적으로 방콕 저잣거리에 사는 힌두교도 두 사람과 빳따니에서 끌려온 포로 여인 간의 이야기지만 내면적으로는 당시 태국 상류사회의 윤리성을 풍자한 작품이라는 것이다. 당시 왕실에서 일어났던 사건에 관계된 지배계층을 풍자하고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함은 물론 그 사건을 보고 뭔가 토로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작가적 본능에서 쓴 작품이라고 쏘씨다를 중심으로 한 교수들은 말하고 있다.

이 번역은 ≪프라마하몬뜨리(쌉)의 봇라컨 르엉 라덴 란다이≫(태국교육위원회, 1981)를 저본으로 삼았다. 이 작품은 내용으로 보아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처음은 란다이가 쁘라대에게 밤에 찾아올 테니 문을 잠그지 말라고 당부한 부분으로, 란다이와 쁘라대가 만나 서로 마음을 어느 정도 주고받는 대목이다. 다음은 쁘라대의 남편인 쁘라두가 소를 치던 중에 귀가하는 부분부터 쁘라대와 란다이가 사랑을 나누는 부분까지이고 나머지는 끄라애가 등장하는 부분부터 끝까지인데 많은 태국학자들은 이 작품의 뒷부분 서너 장이 분실되었다고 보고 있다. 원래는 끄라애가 집 안으로 들어가 란다이와 이야기 끝에 화해하고 쁘라대가 다시 쁘라두에게 돌아가는 이야기로 끝났을 것이라고 한다.

 

차례         
해설
지은이에 대해

라덴 란다이

옮긴이에 대해

 

나오는 사람들
쁘라두 : 인도에서 온 힌두교도, 소를 기른다.
쁘라대 : 쁘라두의 아내, 빳따니에서 온 전쟁포로, 쁘라두가 노예시장에서 사 온 아내.
란다이 : 인도에서 온 힌두교도, 거지악사.
끄라애 : 타워이에서 온 포로여인, 찰떡장사.




출판사서평 
태국 최초의 패러디 문학 ≪라덴 란다이≫를 국내에서 처음 번역했다. 왕실에서 빈민가로 배경을 옮겨 <이나오>를 재창작한 작품이다. 라마 3세 때의 짜오쩜임 사건에 관계된 지배계층을 비판하고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한 것이라는 견해가 우세하다. 인구가 한 명뿐인 왕국의 떠돌이 왕자 란다이와 그의 여인 쁘라대 등 하층민의 삶을 담은 기록문학으로서도 인정받고 있다.



본문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