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우瞿佑 (중국, 1347∼1433)
『전등신화』는 원말명초의 학자 구우(1347~1433)가 창작하였다. 그는 자를 종길, 호를 존재라 한다. 절강성 전당(지금의 중국 항주) 출신으로 학식도 풍부하고 문필에도 능하여 14세 때 이미 문명을 사방에 떨쳐 당시 대 문장가였던 양유정의 인정을 받았다. 태조 홍무연간에 인화․임안․의양 등지의 훈도로 있다가 성조 영락 초에 주왕부의 우장사를 지냈으나, 무자년에 견책을 당하여 섬서성 보안으로 귀양 갔다. 18년 동안 귀양살이를 하고 홍희 초년 비로소 영국공 장보의 주청으로 석방되어 원직에 복직하였고 한때 내각판사로 있었다. 그리하여 3년 동안 영국공가의 숙사 생활을 하고 지내면서 예우를 받다가 선종 선덕 3년에는 고향으로 돌아가 동왕 8년에 87세의 생을 마감한다. 저작으로는 『전등신화』 외에도 『귀전시화』, 『존재시집』, 『악부유언』, 『춘추귀주』, 『여청곡』 등이 있었다고 중교 서문에 전하지만 확인할 수 없다가 최근 그 중에서 『악부유언』이 중국 남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음이 확인됨으로써 그의 많은 작품들이 후대에 들어 간행되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또한 『열조시집』, 『명시기사』 등에 그의 시가 실려 있기도 하다.

 

해설         
- 번역의 조선 목판본 <剪燈新話句解>(1559) 원전으로 을 사용했습니다.
  현전하는 최고본으로, 현재 규장각(奎章閣)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누구나 『전등신화』를 전기소설(傳奇小說)이라고 하고 있다. 전기란 명칭은 중국문학사상 당대 이후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되어 왔지만 우리가 일반적으로 전기소설이라 할 때는 곧 당대소설 내지는 그 계통의 소설작품을 가리키는 말로 정착되었다. 당대의 전기소설에는 소재면에서 육조시대의 지괴류(志怪類)를 이어받은 점이 많으나 시대상을 반영시킨 새로운 호협류(豪俠類)나 염정류(艶情類)가 등장되면서 표현이나 기교면에서도 당시(唐詩)의 난숙함과 고문(古文)의 리얼한 정신을 잘 살려 내고, 여기에 불우한 문인들의 온권(溫卷) 풍습이 훌륭한 작품을 창작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던 것이다. 유능하면서도 불우했던 작가들의 낭만정신의 발로야말로 거기에는 꿈과 환상이 있고, 재도(載道)의 굴레를 벗어나 예술적 가치를 창조하는 쪽으로 기울면서 단편소설로서의 문학적 지위를 확립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당대를 대표하는 이백과 두보 등이 새로운 시적 경지를 수립했다면 이공좌와 백행간 등은 전기소설로서 새로운 소설의 세계를 개척했던 인물이다.

『전등신화』는 이러한 전기소설의 전통을 계승하여 당시에 유행하던 기괴한 내용들을 소재로 하여 창작된 명대의 대표적인 문언 소설이다. 『전등신화』의 ‘전등(剪燈)’이란 말은 이야기가 하도 재미있어 밤늦도록 등불을 켜놓고 책을 읽어가다가 등불 심지가 다 타서 불빛이 희미해질 즈음이면, 심지를 돋운 다음 해가 나지 않게 가위로 그 끝을 잘라 다시 불빛을 밝게 해가며 읽어간다는 뜻이다. 그 책의 내용은 현세에 만족하지 못하거나 불우한 삶을 사는 인물들을 등장시켜 요괴․괴물․용궁․도불 등을 만나 발생하는 기이하고 흥미진진한 비현실적 세계를 다루고 있다. 거기에 남녀 간의 애정의 문제를 다루어 표면상으로는 낭만적 경향으로 치우치지만 그것은 인도주의의 발로로 인한 인간평등의 새로운 가치관을 확립한 것이라 할 것이며, 인간과 귀신이 서로 교유하는 문제를 다루어 얼핏 보면 괴기적 경향으로 치우치는 면도 있지만 그것은 인간과 괴리된 별개의 귀신이 아니라 인간화된 귀신을 다룸으로써 결코 인간의 문제를 벗어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는 장사성의 반란 속에서 만남과 이별을 경험하는 일반 민중들의 고뇌와 현실적 모순을 그렇게 형상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작가 구우는 중국 절강성 전당 출신의 원말명초의 학자로 학식도 풍부하고 문필에도 능하여 일찍부터 문명을 사방에 떨쳤던 인물로 많은 저작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대부분 사라지고 전하지 않는다. 그는 평생토록 결코 편안한 삶을 살지 못했다. 그의 활동시기인 원말명초는 중원지역이 전란에 휩쓸려 대다수 민중들이 유랑의 삶을 지내야 했으므로 그도 여기에서 예외가 될 수 없었을 것이며 중년 이후는 18년 간 귀양살이를 했으므로 결코 평탄한 삶을 지냈다고도 볼 수 없다.

이런 시대적 상황 하에서 1378년에 창작된 『전등신화』는 애초 40권이나 되는 방대한 내용이었던 듯하나, 대부분 사라지고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것은 총 21편이다. 그중 <추향정기>만은 다른 작품과 달리 부록으로 붙어 있고 발문까지 있어 나중에 편입된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 이렇게 『전등신화』는 유통 당시부터 많은 와전이 있게 되었다가 가까스로 1421년에야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중교본이 간행되기에 이른다.

15세기 이후 중국에서는 많은 간본이 간행되어 유포되면서 『전등여화』를 비롯한 다수의 소설 창작에 영향을 주기에 이르고 특히 한국, 일본, 월남 등 동아시아 각국에서 이 『전등신화』의 영향을 받아 창작된 우수한 작품들이 등장하기에 이른다.

조선조 문단에 『전등신화』가 유입된 것은 창작 이후 얼마 되지 않은 시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 초 『금오신화』를 창작한 김시습(1435~1493)은 그가『전등신화』를 읽고 난 감동을 하나하나 적어놓은 ‘제전등신화후’(題剪燈新話後)라는 글을 남겼는데 이 시기 이전에 이미 『전등신화』의 영향을 받은 『전등여화』가 <용비어천가>에 언급된 바 있어 『전등신화』는 이보다 먼저 유입되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것이다. 이 시기는 이미 우리에게「수이전(殊異傳)」이라는 전기소설집이 있었고 특히 전기문학의 틀을 완전하게 갖춘 <최치원>이란 작품이 창작되어 있었다. 뿐만아니라 『태평광기』나 『설부』같은 전기소설을 수록한 총서류가 이미 독서계에 유입되어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일정한 문학적 수준을 갖춘 작품을 창작하고 감상코자 하는 토대와 열의가 이미 갖춰진 상태에서 같은 성격의 『전등신화』가 유입된 것이다. 그러자 『전등신화』의 전기성이나 환상성이 가져다주는 문예 미학적 감동은 더욱 증폭되면서 이후 조선 문단을 압도해 버리고 만다.

연산군은 중국에 가는 사신에게 『전등신화』를 무역하고 간행할 것을 명했을 뿐만 아니라 직접 읽고 대화중에 인용하기도 했다. 더구나 윤춘년과 임기라는 분은 『전등신화』의 한 구절 한 구절에 주석을 붙인 『전등신화구해』라는 책을 간행하게 되는데 이 책은 조선의 식자층에 가장 널리 읽힌 책이 되었다.

이 책이 이렇게 유행하게 된 데는 아마도 남녀 간의 만남과 이별을 다룬 애정소설로서의 긴박성이나 인간욕망을 구현해 줄 괴기적 환상성 등이 소설로서의 흥미를 지녔을 뿐만 아니라, 그밖에 이 속에 담겨진 다양한 문체나 무려 150여 편의 서책과 60여인의 시문이 참고 되고 있음으로써 조선전기에 유입되어 읽힌 관련 서적들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주석서로나 삽입문에 사용된 미려한 문체를 그대로 사용할 수 있는 실용적 가치까지 지님으로써 선비들이나 서리들의 글공부에 이보다 더한 서책이 없었기에 결국 조선조 최고의 애독서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여겨본다.



차례         
해설
지은이에 대해

경사스런 수궁의 잔치 水宮慶會錄
복 받은 삼산의 땅 三山福地志
화정에서 만난 옛 친구 華亭逢故人記
금빛 봉황새 비녀 金鳳釵記
연방루에서 나눈 사랑 聯芳樓記
영호생이 꾼 저승 꿈 令狐生冥夢錄
천태산에 숨어 사는 사람 이야기 天台訪隱
등목이 술이 취해 노닐던 취경원 縢穆醉遊聚景園記
모란등 이야기 牡丹燈記
기이한 만남 渭塘奇遇記
부귀를 관장하는 저승 이야기 富貴發跡司志
영주의 야묘에서 생긴 일 永州野廟記
신양동에서 생긴 일 申陽洞記
애경의 슬픈 이야기 愛卿傳
취취의 슬픈 사랑 이야기 翠翠傳
용당 귀신들의 모임 龍堂靈會錄
태허전 사법 이야기 太虛司法傳
수문부 사인 이야기 修文舍人傳
감호에서 밤에 뱃놀이 한 이야기 鑑湖夜泛記
푸른 옷을 입은 여인 綠衣人傳
추향정에서 생긴 일 秋香亭記 



본문중에서   
使多情者覽之, 則章臺柳折, 佳人之恨無窮,
仗義者聞之, 則茅山藥成, 俠士之心有在.
다정한 사람에게 이글을 보게 하면 장대(章臺)의 버들 꺾듯이 가인(佳人)의 한을 무궁하게 할 것이고,
의로운 사람에게 이 글을 듣게 한다면 모산(山)의 약(藥) 구하듯이 협사(俠士)의 마음이 있게 할 것이다.




옮긴이        
정용수는 성균관대학교 한문교육과를 거쳐, 동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고전문학 전공으로 문학석사 및 문학박사 과정을 수료했고, 2000년부터 U. C. Berkeley, Institute of East Asia Studies에서 1년간 Visiting Scholar를 지냈다. 현재 동아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재직하고 있다.
역서로 ≪후탄선생정정주해 서상기≫(국학자료원, 2006), ≪剪燈新話句解≫(푸른사상, 2003), ≪봉성에서≫(국학자료원, 2001), ≪고금소총 명엽지해≫(국학자료원, 1998), ≪국역 소문쇄록≫(국학자료원, 1997) 외에 다수의 논문이 있다.



별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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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사언 楊士彦(한국, 1517~1584)

양사언(楊士彦, 1517∼1584)은 조선 전기의 문인·서예가다.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응빙(應聘), 호는 봉래(蓬萊)·완구(完邱)·창해(滄海)·해객(海客)이다. 조선 중종 12년(1517)에 경기도 포천에서 출생했다.
그는 서얼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명종 1년(1546) 문과에 급제하여 대동승(大同丞)을 거쳐 삼등·함흥·평창·강릉·회양·안변·철원 등 여덟 고을의 수령을 지냈다. 중간에 사임하고 쉰 때도 있긴 하지만, 근 40여 년간 관직에 있었다. 내직을 역임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을 외직에서 보낸 셈이다. 부임하는 고을마다 선정을 베풀어 칭송이 자자하였고, 안변 군수로 있을 때는 통정대부의 품계를 받았다. 만년에 지릉(智陵) 화재 사건으로 해서(海西)에 유배되었다. 그리고 2년 뒤 풀려나서 돌아오는 길에 죽었다. 선조 17년(1584), 68세 때의 일이다.
그는 해서와 초서에 능하여 안평대군(安平大君)·김구(金絿)·한호(韓濩)와 함께 조선 전기 4대 명필로 일컬어졌다. 특히 큰 글씨를 잘 썼다. 금강산 만폭동 바위에 ‘봉래풍악 원화동천(蓬萊楓岳元化洞天)’이라 새긴 글씨 외에도 도처에 많은 암각문이 남아 있다.
문집으로 ≪봉래 시집≫이 있으며, 별도로 ≪봉래 유묵≫이 전한다. 아우 사기(士奇), 사준(士俊)과 함께 문명을 떨쳐 중국의 미산삼소(眉山三蘇)에 견주어졌다.



해설          

≪봉래 시집(蓬萊詩集)≫은 16세기 조선의 문인이자 서예가인 양사언(楊士彦)의 문집이다. 그의 아들 만고(萬古)가 집안에 전하는 초고를 바탕으로 수집·편차하여 간행한 것이다. 편찬자의 서(序)와 발(跋)이 없어 편집 및 간행 연대를 정확하게 알 수 없다. 현재 1633년경 목판으로 간행한 초간본이 전한다. 이 책에는 양사언의 아우인 양사준(楊士俊)의 ≪풍고 시집(楓皐詩集)≫과 양사기(楊士奇)의 ≪청계 시집(靑溪詩集)≫이 부록되어 있다.

≪봉래 시집≫ 분량은 3권 1책으로 총 86판이다. 부록된 ≪풍고 시집≫은 4판으로 시 21수가 수록되었다. ≪청계 시집≫은 3판으로 시 16수가 실려 있다. 규장각 소장본(규5108)이 유일한 판본으로 생각되며, 이 판본은 반엽이 10행 20자이며, 반곽의 크기는 22×16.2㎝다.

이 책에는 권1에 오언절구 58수, 육언시 2수, 칠언절구 149수가, 권2에는 오언율시 41수와 칠언율시 34수, 오언배율 3수, 칠언배율 3수와 습유(拾遺)한 시 13수가 수록되었다. 권3에는 오언고시 52수, 칠언고시 2수, 장단구 11수 이외에 부(賦)와 책(策), 발(跋)과 전(傳)이 각 1편, 기(記) 3편, 제문 2편, 서(書) 2편이 실려 있다.

양사언의 시 작품은 수필고본(手筆稿本)으로 전해진 것 외에 양만고가 산재한 작품을 일일이 수집하여 수록한 것도 적지 않다. 구체적인 사례로 <완산령을 애도함(挽完山令)>은 허봉(許葑)이 암송해 전한 것이고, <거문고 배에 쓰다(題琴腹)>는 강릉 주인집에서 얻은 것이며, <고죽 최경창에게(贈崔孤竹)>는 널리 회자하여 전하던 것이다.

봉래 양사언의 작품은 ≪봉래 시집≫ 외에 양재웅(楊載雄) 씨 소장 ≪봉래 유묵(蓬萊遺墨)≫에도 별도로 작품이 전한다. 이 책은 양사언의 자필첩책(自筆牒冊)으로 <서호별곡(西湖別曲)>, <미인별곡(美人別曲)> 두 편과 시문을 합하여 모두 14장 24면으로 되어 있다. ≪봉래 시집≫에 수록된 작품도 네 편이 실려 있다.

양사언의 시 작품을 주제별로 분류해 보면 자연·명승지 57편, 술회(述懷) 57편, 차운(次韻) 44편, 증시(贈詩) 43편, 제시(題詩) 15편, 송별(送別) 14편, 만사(輓詞) 13편, 제진(製進) 12편, 교분(交分) 10편순이다.

양사언의 시 작품은 그렇게 다양한 편은 아니다. 자연·명승지를 유람하면서 지은 작품과 자신의 회포를 노래한 시가 많다. 특히 회양 군수(淮陽郡守)로 있을 때 금강산을 유람하며 지은 작품이 많다. 이들 작품은 그의 풍류객으로서의 면모를 시사한다. 차운한 시편도 대개 유람하면서 정자나 관가의 현판을 보고 지은 것이다. 증시·송별시·교분시는 절친한 친구들과 화답하며 지은 것으로 적지 않다. 그가 내직에 있으면서 지은 제진시(製進詩) 12편은 관료로서의 면모를 충분히 시사한다.

양사언은 서얼 출신으로 초년에는 주로 포천 지역에서 궁핍한 가운데 시서와 거문고를 벗하며 안빈낙도의 흥취를 즐겼다. 중년에는 강릉·고성·회양·철원 등 관동 지방의 수령으로 재임하며 선정을 베풀면서도 산수 자연을 유력하며 도가적 흥취에 몰입했다. 말년에는 선정을 베풀어 관리로서의 면모를 보이는 한편, 도가적인 흥취에 더욱 몰입된 경지를 보였다.

양사언은 자연을 즐겨 회양 군수로 있을 때는 금강산에 자주 가서 경치를 완상했다. 금강산을 누구보다도 사랑하여 자신의 호를 ‘봉래(蓬萊)’라 했다. 제가의 평대로 그는 이인(異人)으로 태어나 내외의 방술(方術)에 몰입하였고, 유자(儒者)이면서도 불교를 가까이 하였으며, 만년에는 선도(仙道)에 빠졌던 인물이다. 남사고(南師古)에게서 역술(易術)을 배운 바도 있다. 조경(趙絅)이 <묘갈명>에서 “처음에는 이단(異端)을 가까이하더니/ 나중에는 선도(仙道)에 빠졌도다/ 이단과 선도를 하지 않았다면/ 넉넉히 요천에 드실 텐데”라 평한 바 있다. 이 같은 인물평은 양사언이 여느 사람과 구별되는 취향을 가졌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취향은 그의 작품에 그대로 투영되어 나타난다.

양사언은 16세기 방외인 문인으로 평가되고 있으나, 다른 방외인 문인처럼 기이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 시를 짓되 이상스런 문구를 찾지 않았으며, 널리 인정될 수 있는 시를 지었다. 표현이 기발하고 탈속한 느낌이 든다는 평을 들었을 뿐이다. 시조 작품 <태산이 높다 하되∼>나, 가사 작품 <미인별곡>, 그의 한시에 나타난 도가적 경향 등은 모두 그의 남다른 출생 신분이나 환경에 기인한 것이다. <고죽 최경창에게(贈崔孤竹)>는 사람들의 입에 널리 회자되었다. <장항령(獐項嶺)>은 ≪동문선≫에도 수록되었다. 그의 <발연사 경석 위에 쓰다(題鉢淵磬石上)>와 같은 작품은 여러 시화에 인용되고 있을 정도로 유명하다. 허균은 이를 두고 ‘선표발속(仙標拔俗)’이란 평을 남기기도 했다. <전책(殿策)>에서는 나무가 자라 말라죽지 않음이 흙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인 것과 같이, 국가가 편안해 위태롭지 아니한 것은 선비의 기운을 부축해 배양하기 때문이라고 전제하고, 여러 번의 사화를 겪으면서 꺾인 사기(士氣)를 하루빨리 진작시킬 것을 주청하기도 했다.

이익(李瀷)은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양사언을 두고 신선과 같은 인물이라고 하고, 그 글씨 또한 그 인물과 같은데, 사람들이 그 글씨가 진속(塵俗)을 벗어난 줄은 알아도 그 시가 세상 사람의 말이 아님을 알지 못한다고 말하면서 세속의 태를 벗어난 천진하고도 청아한 시풍을 높이 평가한 바 있다.



본문 중에서   


봉래산 모습을 그려내고는
세속을 향하여 시를 구하네
사람을 만나 산수를 묻거든
나의 집과 산은 말하지 말게


畵出蓬萊影
求詩向世間
逢人如有問
休道我家山




역자 소개      

처인재 주인 홍순석은 용인 토박이다. 어려서는 서당을 다니며 천자문에서 소학까지 수학했다. 그것이 단국대, 성균관대에서 한문학을 전공하게 된 인연이 되었다. 지역문화 연구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강남대 교수로 재임하면서부터다. 용인, 포천, 이천, 안성 등 경기 지역의 향토문화 연구에 20여 년을 보냈다. 본래 한국문학 전공자인데 향토사가, 전통문화 연구가로 더 알려져 있다. 연구 성과물이 지역과 연관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동안 ≪성현 문학 연구≫, ≪양사언 문학 연구≫, ≪박은 시문학 연구≫, ≪김세필의 생애와 시≫, ≪한국 고전문학의 이해≫, ≪우리전통문화의 만남≫, ≪이천의 옛 노래≫ 등 40여 권의 책을 냈다. 짬이 나면 글 쓰는 일도 즐긴다. ≪탄 자와 걷는 자≫는 잡글을 모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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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셰익스피어 William Shakespeare(영국, 1564~1616)


19세기 영국의 위대한 사상가 토머스 칼라일(Thomas  Carlyle)이 인도와도 바꾸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했던 윌리엄 셰익스피어는 1564년 4월 23일 런던 북동쪽의 한 소읍 스트랫퍼드 어폰 에이번 (Stratford upon Avon)에서 태어나 1616년 4월 23일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마을의 성삼위일체교회(Holy Trinity Church)에 안장되었다. 1587년경 홀로 런던에 상경한 20대 초반의 셰익스피어는 극단과 관련된 일을 하게 된다. 아마 처음에는 극장의 매표소에서 일하거나 관객들이 타고 온 말을 돌보는 일을 하다가 극단의 배우로 일하면서 극본을 쓰기 시작했을 것이다. 이 기간의 셰익스피어의 삶에 대한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그러했을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그러나 1592년경 그가 20대 후반에 이르자 셰익스피어란 이름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하고, 점차 런던 연극계에서 주목받는 극작가로 알려진다. 극작 경력의 초기에는 젊음의 활기가 넘치는 <한여름 밤의 꿈>, <뜻대로 하세요>등의 낭만적인 희극을 중심으로 작품 활동을 하다가 점차 나이가 들고 인생의 깊이를 느끼게 되면서 <햄릿>, <리어왕>등의 비극을 주로 쓰게 된다. 총 37편의 극작품과 2편의 장시, 154편의 소네트 등을 남긴 셰익스피어는 16,17세기 영국이라는 지역적 경계를 넘어 오늘날 전 세계에서 대문호로서 추앙받고 있다.

셰익스피어가 위대한 작가로 추앙받게 된 데에는, 그가 운 좋게도 풍부한 문학적 자양분을 제공하는 시대에 태어났다는 점도 한몫한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지배하던 영국의 16세기 후반은 문예 부흥기일 뿐 아니라 국가적 부흥기였다. 동시에 사회의 제반 양상들이 요동치고 변화하는 전환기이자 변혁기이기도 했다. 성숙한 문학적 또는 문화적 분위기, 역동적인 사회가 던져주는 풍부한 소재들은 셰익스피어의 작품 곳곳에 녹아들었으며, 이를 통해 그의 작품들은 문학작품 이상의 사회와 역사에 대한 참고서 역할까지 하게 된다. 셰익스피어의 탁월함을 증명해 주는 또 다른 점은 그의 문학적, 연극적 상상력과 감칠맛 나는 표현력을 들 수 있다. 셰익스피어는 자신이 속한 극장의 구조를 십분 활용하면서 구조상의 제약을 뛰어넘는 무한한 상상력을 발휘하여 관객과 독자를 매혹한다. 같은 이야기 소재라도 셰익스피어의 손에 들어가면 모든 이의 정서에 공감을 줄 수 있는 보편성을 갖게 된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에는 시공을 초월하여 거의 모든 삶의 영역을 탐구해 볼 수 있는 요소들이 들어 있다. 심지어 현대의 경영학자들이나 정치가들에게도 셰익스피어는 훌륭한 길잡이가 되어 준다. 또한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는 햄릿의 유명한 대사처럼 셰익스피어는 감히 어느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숱한 명대사를 남겼다. 작품 속 표현 한 마디 한 마디가 관객들로 하여금 무릎을 치게 만들고, 교묘하고 신비로운 표현은 그 속에 인생의 진지한 성찰을 담고 있다. 오늘날 영어의 풍부한 표현력은 셰익스피어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통해 우리는 인생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고, 그의 작품이 가져다 주는 문학적 향취에 취해 감탄하게 된다.



해설         

 이 책은 1979년도 아든판(The Arden Shakespeare)을 기본으로 하고, 옮긴이의 판단에 따라 보다 적절한 구문을 선택하기 위해 1995년도 뉴케임브리지판(New Cambridge)을 부분적으로 참조했습니다. 원작의 약 80%를 발췌해서 번역했습니다.

1. 집필 연대

<한여름 밤의 꿈>의 정확한 집필 연대는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셰익스피어의 작품들 간의 관계나 몇 가지 주변적 상황을 통해 1595년에서 1596년 사이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을 뿐이다. 작품들 간의 연관성 측면에서 볼 때 <한여름 밤의 꿈>은 그 스토리를 역시 1595년에서 1596년 사이의 집필된 작품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많은 부분 빌려오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여름 밤의 꿈>에서 직공들이 공작의 혼례 축하용으로 공연하는 <피라머스와 시스비>이야기는 두 가문의 단절, 그로 인한 두 젊은 남녀가 겪는 사랑의 난관, 시간차로 인한 오해 때문에 벌어지는 자살 등과 같은 비극적 내용을 담고 있는데, 이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전체 스토리와 거의 유사하다. 심지어 부모의 반대에 부딪힌 젊은 남녀의 사랑과 도피라는 <한여름 밤의 꿈>의 전반적인 스토리 역시 <로미오와 줄리엣>을 연상시킨다. 차이는 <한여름 밤의 꿈>은 희극이고 <로미오와 줄리엣>은 비극이라는 점이다. <한여름 밤의 꿈>의 극중극인 <피라머스와 시스비> 자체는 비극이기는 하지만, 무식한 아테네 직공들이 벌이는 공연이 우스꽝스럽게 진행되다 보니 전체적으로는 오히려 희극에 가깝다. 셰익스피어는 <로미오와 줄리엣>을 쓰는 과정에서 자신의 세계관이 지나치게 감상적이고 단편적임을 깨닫고, 유사한 내용인 <한여름 밤의 꿈>를 집필함으로써 이성과 감성 그리고 비극적 요소와 희극적 요소가 조화를 이루는 보다 성숙한 세계를 그리고자 했다는 주장이 있다. <한여름 밤의 꿈>이 <로미오와 줄리엣>을 완성한 직후에 쓰였다는 점 역시 명백한 증거는 없지만, 학자들은 이러한 순차적 연관성에 대해서는 대체로 동의하는 편이다. 주변적 상황을 통해 집필 연대를 추정하는 대표적인 예는, <한여름 밤의 꿈>이 결혼 축하극이라는 점에 주목하여, 이 극이 엘리자베스 여왕과 친분이 깊은 실제 유명 인사의 결혼식 축하용으로 쓰였다는 주장이다. 가령, 1595년 1월 더비 백작(Earl of Derby)과 엘리자베스 비어(Elizabeth Vere)의 결혼, 또는 1596년 2월 토머스 버클리(Thomas Berkeley)와 엘리자베스 커리(Elizabeth Carey)의 결혼 등이 이 작품의 제작 연대와 관련하여 자주 언급되는 사건들이다. 여러 정황들을 종합해 볼 때, <한여름 밤의 꿈>은 대체로 1595년에서 1596년 사이에 쓰여진 작품으로 추정된다.

2. 판타지의 세계

셰익스피어의 낭만 희극 작품들을 관통하는 주제는 결혼이며, <한여름 밤의 꿈>에서만큼 이 주제가 폭넓게 그리고 흥미진진하게 전개되는 작품도 드물다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한여름 밤의 꿈>은 셰익스피어의 낭만 희극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으며, 낭만 희극의 범주를 넘어 셰익스피어가 평생 염두에 두어온 세계관을 가장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셰익스피어가 그리고자 하는 세계란 바로 모든 존재 양식들이 조화를 이루는 세계이며, <한여름 밤의 꿈>에서 이러한 세계에 대한 염원은 몽환적인 판타지의 세계를 통해 구축된다. <한여름 밤의 꿈>의 세계가 돋보이는 또 다른 이유는 셰익스피어의 여타 작품들에서 찾아보기 힘들 만큼 등장인물들이 여러 층위의 다양한 인물군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밑에서부터 살펴보자면 가장 아래에는 아테네의 직공들이라는 노동자 계층이 있다. 그 위에는 아테네의 귀족 인물들, 그 위로는 최상위 지배 계층, 그리고 가장 위층에는 요정들이라는 초자연적인 존재들이 자리잡고 있다. 이러한 다양한 인물군은 판타지의 세계를 더욱 역동적으로 만드는 데 절대적인 기여를 한다.

극의 전개 과정에서 이러한 다층적 존재들은 불화한다. 계층 간에 불화하고 같은 계층 내에서도 불화한다. 극의 시작 부분은 다분히 비극적이다. 아테네의 귀족인 이지어스는 딸 허미아를 아테네의 통치자인 테세우스 공작 앞으로 데리고 나와 자신의 딸이 아비의 명을 거역하고 다른 남자와 놀아난다며 딸에게 사형선고를 내려달라고 간청한다. 이미 부녀간에 불화가 심각하고, 허미아를 비롯한 네 명의 청춘 남녀들은 서로 엇갈린 사랑을 하면서 불화한다. 이들이 한밤중에 발을 들여놓는 아테네의 숲이라는 판타지의 세계를 지배하는 요정들 역시 불화에 휩싸여 있다. 요정의 왕 오베론과 여왕 티타니아는 사내아이를 놓고 심각하게 대립하면서 요정의 세계를 혼란에 빠뜨린다. 이들의 대립은 자연계의 불화까지 야기하여 계절과 계절에 따르는 자연현상이 어긋나게 된다. 요정의 마법으로 인해 연인들의 관계가 민망할 정도로 순간순간 어긋나게 될 뿐 아니라, 심지어는 인간이 당나귀로 변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판타지의 세계라는 것이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의 분출과 이러한 분출로 인한 혼동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혼동의 해결과 궁극적인 화해로까지 확장되는 데 그 의미가 있듯, 아테네 숲의 세계 역시 혼란으로 끝나지는 않는다.

요정의 왕과 여왕은 판타지의 악몽을 경험한 뒤 판타지가 동시에 제공하는 치료의 과정을 통해 화해를 이룬다. 인간 연인들도 비슷한 과정을 겪고 난 뒤 아침에 눈을 뜨면서 악몽의 순간들이 이성으로 분간하기 어려운 꿈처럼 몽롱하게 희미해짐을 느낀다. 그리고 이들 간의 불화의 고통은 결혼이라는 사랑의 결합으로 치유된다. 당나귀로 변하는 경험을 한 보틈이라는 직공 역시 악몽에서 벗어나 연극 동료들과 재회하게 되고 당당히 연극 무대에 서게 된다. 모든 존재들이 화해를 이루는 결혼 축하연의 중심에는 아테네의 무식한 직공들이 벌이는 <피라머스와 시스비>라는 극중극이 있다. 이 극중극이 벌어지는 도형적인 상황은 이상적인 조화의 모습 바로 그것이다. <한여름 밤의 꿈>의 무대 한복판에서는 직공들의 극중극이 벌어진다. 아테네의 통치자와 귀족들이 관객의 입장에서 극중극 무대를 둘러싸고 있다. 그리고 그 뒤에서 요정들이 인간의 모습을 구경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것이 끝일까? 물론 <한여름 밤의 꿈>의 무대 위의 상황은 그렇다. 그러나 극장 전체 구도에서 보자면, 이 <한여름 밤의 꿈>이라는 연극을 보고 있는 실제 관객들을 놓칠 수 없다. 한걸음 더 나아가 셰익스피어가 버릇처럼 되뇌던인생은 무대다라는 말을 떠올려보면, 우리의 인생이라는 연극을 연출하면서 관극하고 있는 신이라는 존재를 동시에 감지할 수도 있다. 셰익스피어는 바로 이 작품에서 이렇게 폭넓은 존재의 스펙트럼을 제시해 주면서, 결혼이라는 사건을 통해 모든 불화의 요소들이 화해와 조화를 이루는 이상적인 세계를 그리고 있는 것이다. 판타지의 세계는 현실 세계에서 이런 방향으로 자양분 역할을 할 때 그 존재 의미가 살아나는 것이다.

3. 현대적 의의

셰익스피어가 활동을 시작했던 16세기 후반의 영국은 한마디로 전환기였다. 어느 시대인들 전환기가 아닌 시대는 없겠지만, 이 기간은 겉으로 드러나는 역사적 사건들에서뿐만 아니라 그 밑에 흐르는 이념의 작동에서도 새로운 패러다임이 형성되던 분명한 전환기였다. 봉건 체제에서 근대국가 체제로의 전이, 엘리자베스 여왕의 통치와 유럽 열강으로의 편입, 상업주의의 부상, 다양한 문화 산업의 번성 등이 눈에 띄는 것이라면, 그 저변에 젠더에 대한 인식의 변화, 인종 문제의 부상, 사회의 유동화에 따른 계층의 와해조짐 등 이념적 변동 양상이 흐르고 있었다. 셰익스피어가 위대한 작가라는 것은 이러한 사회변동 양상을 선구자적으로 재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특히 <한여름 밤의 꿈>의 현대적 의의는 이 작품이 당대 부상하던 젠더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희극이라는 장르 속에 어느 작품보다 훨씬 극적으로 담아내고 있다는 점에 있다. 젠더에 대한 전통적인 견해는 여성의 ‘가변성’과 같은 부정적인 속성을 강조하면서 이를 남성에 의한 여성 통제의 명분으로 내세운다. 그리고 남성의 통제에서 벗어나려는 여성은 언제나 위험한 존재로 낙인찍히고 만다. 그러나 상업주의의 부상 등으로 인해 사회의 유동성은 더욱 가시화되고 그럼으로써 여성들의 위치나 활동 영역에도 변화가 오게 되었다. 가령 여성들이 자신들을 속박하는 공간인 가정 밖으로 나가 경제활동에 참여해야 할 필요성과 기회가 확대되면서, 남편과 아내의 힘의 균형에 변화가 오게 되었다. 거시적인 견지에서, 당대 사람들은 당연히 남성이어야 할 그들의 군주가 엘리자베스라는 여성임을 목격하면서 젠더 정체성의 혼동을 경험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남성들의 불안감을 야기했으며, 그 위험한 변동 양상을 제어하려는 의지를 그만큼 확대시켰다.

이 작품의 시작 부분에 등장하는 두 명의 여성 인물은 남성과의 대립에서 서로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우선 테세우스와 결혼을 앞둔 히폴리타는 여성들만의 국가였던 아마존의 여왕으로, 테세우스가 주도하는 가부장적 힘에 정복당하고 그 체제에 복종하는 과정에 있는 인물이다. 반대로 연이어 등장하는 허미아는 자신의 육체와 정신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는 아버지에 맞서 이에 굴복하기를 거부하고 자신의 권리를 힘 있게 주장한다. 히폴리타는 패배에 침묵하고 있고, 허미아는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데 조금의 주저도 보이지 않는다. 아테네 숲에서도 여성이 가부장 체제에 도전하는 모습은 계속된다. 요정의 여왕 티타니아는 요정의 왕 오베론에게 여성들만의 친목 과정에서 얻게 된 사내아이를 양도하기를 거부하면서 힘에는 힘의 모습으로 맞선다.

숲에 발을 들여놓은 두 쌍의 청춘 남녀가 얽히고설킨 사랑의 관계를 보여주는 과정에서, 관객들은 여성 인물들인 허미아와 헬레나에게 더욱 끌리게 된다. 남성 인물들인 라이샌더와 드미트리어스는 이름 외에는 개성을 드러낼 만한 특징이 없는 밋밋한 인물들인 반면, 허미아와 헬레나는 각자 독특한 성격과 외모를 가진−허미아는 작은 키와 까무잡잡한 피부에 공격적인 성격, 헬레나는 큰 키와 하얀 피부에 소극적 성격−개성화된 인물들이다. 오베론이 마법의 꽃즙을 가지고 사랑의 대상을 바꾸게 만드는 인물들도 남성인 라이샌더와 드미트리어스다. 허미아를 놓고 동시에 사랑 경쟁을 벌이던 이 남성 인물들은 오베론의 꽃 즙 때문에 허미아를 버리고 헬레나에게 구애를 하게 된다. 역으로 허미아와 헬레나는 자신들의 사랑을 변치 않고 꿋꿋이 지켜나간다. 남성 오베론이 주도하는 마법에 종속되지도 않고 자신들의 주장도 굽히지 않는 것이다. 여성을 가변적인 존재로 규정하고 이를 남성 통제에 묶어두려는 가부장적 의도는 이 숲에서 오히려 남성이 가변적인 존재로 그리고 여성이 변치 않는 모습으로 그려짐으로써 실패한다. 물론 5막에서 이러한 위험한 여성들−남성의 시각에서 볼 때−은 남성 주도의 결혼 제도에 편입됨으로써 그 위험성이 희석되지만, 그 이전 단계까지는 남성의 세계에 도전하는 새로운 여성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음을 간과할 수는 없다. 우리 시대의 사회적 이슈들 중 많은 관심을 끌고 있는 젠더의 혼돈 문제를 이미 400여 년 전 셰익스피어는 자신의 작품의 소재로 삼기 시작했던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한여름 밤의 꿈>은 우리 시대의 모습을 비춰주는 거울이라는 현대적 의의를 갖는다.

옮긴이는 <한여름 밤의 꿈>의 원전을 번역하면서 출판사의 의도에 따라 분량을 조절하였다. 이 번역은 1979년도 아든판(The Arden Shakespeare)을 기본으로 하고, 필자의 판단에 따라 보다 적절한 구문을 선택하기 위해  1995년도 뉴케임브리지판(New Cambridge)을 부분적으로 참조했다. 원작의 총 2120행 중에서 약 1740행 즉, 약 80%를 우리말로 옮겼다. 번역 과정에서 옮긴이는 원문의 어감과 우리말 어감이 조화를 이루도록 하는  것을 기본 원칙으로 삼았고, 양자택일이 필요할 경우 우리말 어감이나 의미를 살리는 쪽을 택했다. 가령 원문에서 두운이나 각운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는 노래 형태의 대사와 같은 경우 원문과 우리말 번역이 일치하지 않을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우리말 두운과 각운을 살리려고 노력했다. 원문의 인물명이나 지명 등의 우리말 표기는 2005년도 한국셰익스피어학회가 발간한 ≪셰익스피어 연극 사전≫의 우리말 번역을 주로 따랐고, 일반적인 원어는 한글어문규정의 외래어표기법을 따르거나 상식적인 우리말 표현을 사용하였다. 발췌의 기본 원칙은 먼저 전반적인 스토리 흐름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하는 것이었다. 또한 생략된 대사로 인해서 갑자기 등장인물이 사라지는 경우가 발생하지 않도록 주의했다. 이러한 원칙 아래에서 발췌로 인해 생략된 부분은, 지나치게 역사나 민속 등 당시의 시대상황과 관련된, 장황한 주석 없이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 원문 자체의 어감이나 의미가 번역 과정에서 되살아날 가능성이 거의 없는 부분, 스토리가 중복되는 부분 등이다. 주석은 모두 옮긴이가 붙인 것이다.



작품 중에서     

Things base and vile, holding no quantity,
Love can transpose to form and dignity:
Love looks not with the eyes, but with the mind.

(1막 1장)

아무리 쓸모없고 비천한 것이라 해도 사랑은
그것들을 가치 있고 귀한 것으로 바꿔놓을 수 있어.
사랑은 눈으로 보는게 아니라 마음으로 보니까.



옮긴이         

김용태는 연세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를 취득한 뒤, 1994년 미국 네브래스카 주립대학에서 셰익스피어와 벤 존슨의 로마극과 제임스 1세의 통치 양상을 연결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명지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문화유물론적 관점과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셰익스피어를 포함한 르네상스기 극작가들이 자신들의 극작품에서 당대 사회 문화 현상들을 어떻게 재현하고 있는가를 연구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셰익스피어 영화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2004년 한국셰익스피어학회 우수논문상을 수상했고, 저서로 우리말 주석본 <한여름 밤의 꿈>, 공동 집필서인 ≪셰익스피어 해설서 Ⅱ≫, ≪셰익스피어 연극 사전≫등이 있다.



편집자 리뷰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시공을 초월해서 삶의 모든 영역에 관해 다룬다. 그 가운데 그의 희극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한여름 밤의 꿈>은 불화의 모든 요소들이 결혼을 통해 화해와 조화를 이루게 되는 과정을 흥미진진하게 그리고 있다. 독자들은 이 작품을 통해 인생의 소중함을 깨닫고, 셰익스피어의 탁월함을 증명해 주는 연극적 상상력과 감칠맛 나는 표현에 감탄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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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zman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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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철 鄭澈(대한민국, 1536~15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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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철은 조선 중기의 문인이자 정치가다. 본관은 연일(延日), 자는 계함(季涵), 호는 송강(松江)이다. 서울 장의동(藏義洞, 지금의 종로구 청운동) 출생으로 돈녕부판관 유침(惟沈)의 아들이다. 어려서 인종(仁宗)의 귀인인 큰누이와, 계림군(桂林君) 유(瑠)의 부인이 된 둘째 누이로 인하여 궁중에 출입하여 같은 나이의 경원대군(慶源大君, 후의 明宗)과 친숙해졌다. 10세가 되던 1545년(명종 즉위 원년)의 을사사화에 계림군이 관련되자 그 일족으로서 화를 입어 맏형은 장류(杖流) 중에 죽고, 부 유침은 유배를 가게 되자, 그도 관북(關北)·정평(定平)·연일 등 유배지를 따라다녔다. 1551년에야 해배(解配)되어 조부(祖父)의 산소가 있는 전남 담양 당지산 아래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과거에 급제할 때까지 10여 년간 지냈다. 여기서 김인후(金麟厚, 1510〜1560)·송순(宋純, 1493〜1582)·기대승(奇大升, 1527〜1572) 등에게서 학문을 배우고, 임억령(林億齡, 1496〜1568)에게서 시를 배웠으며, 이이(李珥, 1536〜1584)·성혼(成渾, 1535〜1598)·송익필(宋翼弼, 1534〜1599) 같은 유학자들과 교유했다. 1561년(명종 10) 26세에 진사시 1등, 이듬해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했다. 사헌부지평을 거쳐 좌랑·현감·전적·도사를 지내고, 31세에 정랑·직강·헌납을 거쳐 지평, 이어 함경도 암행어사가 되었다. 32세에 이이와 함께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이어 수찬·좌랑·종사관·교리·전라도 암행어사를 지내다가 40세인 1575년(선조 8) 낙향했다. 43세에 통정대부 승정원 동부승지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 수찬관으로 승진하여 출사했다. 이후 사간·집의·직제학을 거쳐 승지에 올랐으나, 진도군수 이수(李銖)의 뇌물사건으로 동인의 탄핵을 받아 다시 낙향했다. 45세 되던 1580년 강원도 관찰사가 되었으며, 이때 <관동별곡>과 <훈민가>16수를 지어 가사와 시조문학의 대가로서의 재질을 유감없이 발휘했으며, 그 뒤 전라도 관찰사·도승지·예조참판·함경도 관찰사 등을 지내고, 48세에 예조판서로 승진, 이듬해 대사헌이 되었으나 역시 동인의 탄핵을 받아 다음 해에 사직, 고향 창평으로 돌아가 4년간 은거했다. 이때 <사미인곡>, <속미인곡>, <성산별곡>등의 가사와 수많은 시조·한시 등을 창작했다.
54세에 정여립(鄭汝立, 1546〜1589)의 모반사건이 일어나자 우의정으로 발탁되어 서인의 영수로, 최영경(崔永慶, 1529〜1590) 등을 다스리고 철저히 동인을 배제하며 이듬해 좌의정에 올랐다. 그러나 1591년 건저문제(建儲問題)로 진주로 유배, 이어 강계로 이배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의 부름을 받아 의주까지 호종했으며, 왜군이 아직 평양 이남을 점령하고 있을 때 경기·충청·전라 삼도체찰사(體察使)를 지내고, 다음 해 명나라에 사은(謝恩) 행차를 다녀왔다. 이 사은사 행차가 빌미가 돼 다시 동인의 모함을 받고, 강화의 송정촌에 우거(寓居)하다, 이듬해 포폄 많았던 한 생을 마감했다.
사후 관작을 추탈(追奪)당했다가 1609년(광해군 원년) 신원되고, 1623년(인조 원년) 복원되었다. 창평의 송강서원, 연일의 오산서원 별사(別祠)에 제향 되고 있으며,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정치가로서는 서인의 영수로 ‘조정의 맹호(殿上之猛虎)’였으나, 시문학은 호흡에 맞고 귀에 익은 멋 겨운 장·단가(長·短歌)가 사뭇 취선(醉仙)의 풍기(風氣)요, 정한(情恨)의 자수인 연군(戀君)의 독백은 민족 정서를 접맥해 온 비장(悲壯)이다. 따라서 그의 성가는 국문시가의 독보임에 틀림없다.

해설           

≪송강가사(松江歌辭)≫는 조선 중기의 문신 송강 정철(松江鄭澈, 1536~1593)의 가사(歌辭)와 시조(時調)를 수록한 2권 1책의 시가집(詩歌集)이다.
필사본으로 전하는 것도 있으나, 곳곳에 일문(逸文)이 있어 온전하지 못하고, 목판본으로는 ≪황주본(黃州本)≫·≪의성본(義星本)≫·≪관북본(關北本)≫·≪성주본(星州本)≫·≪관서본(關西本)≫ 등 5종이 있었다 하나, 그 중 ≪의성본≫과 ≪관북본≫은 현재 전하지 않는다. 따라서 현전하는 ≪황주본≫·≪성주본≫·≪관서본≫을 간행 연대순으로 요약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황주본은 1690년(숙종 16)부터 1696년 사이에 이계상(李季祥)이 황주에서 간행한 책이다. 총 26장 완책(完冊)으로 <관동별곡(關東別曲)>·<사미인곡(思美人曲)>·<속미인곡(續美人曲)>·<성산별곡(星山別曲)>·<장진주사(將進酒辭)>순의 가사 5편에 이어, 그 이하 단가라는 제목을 두지 않은 채 51수의 단가와 이선(李選)의 발문이 실려 있다. 이선의 발문이 있어 일명 ≪이선본(李選本)≫이라고도 하고, 소장자인 방종현(方鍾鉉)의 호를 따 ≪일사본(一簑本)≫이라고도 한다.
현전하지 않는 ≪의성본≫과 ≪관북본≫은 그의 현손인 호(澔)가 간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성주본≫ 발문에 의하면 ≪의성본≫은 의성 현감으로 있던 호가 1696년 5월부터 1698년 1월 사이에 간행했음을 알 수 있고, ≪관서본≫발문에 의하면 ≪관북본≫은 호가 관북 관찰사로 있던 1704년 4월부터 이듬해 1월 사이에 간행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한편 ≪성주본≫은 정철의 5대 손인 관하(觀河)가 성주목사를 지내던 1747년(영조 23)에 성주에서 간행한 2권 1책으로, 총 44장 상·하로 나뉘어 있다. 상권 24장에는 <松숑江강歌가辭 上샹>이라 하고 <관동별곡(關東別曲)>·<사미인곡(思美人曲)>·<속미인곡(續美人曲)>·<성산별곡(星山別曲)>·<장진주사(將進酒辭)> 등 가사 5편이 ≪황주본≫과 같은 순서로 기록되어 있고, 하권 20장에는 별면(別面) <松숑江강歌가辭 下하> ‘短단歌가’라는 제하(題下)에 79수의 단가와, 송강 정철의 현손인 천(洊)과, 그의 아들 관하의 발문이 실려 있다.
≪관서본≫은 ≪의성본≫과 ≪관북본≫을 간행한 호의 손자인 실(實)이 1768년(경종 44) 관서 지방에서 간행한 책이다. 총 23장에<관동별곡(關東別曲)>·<사미인곡(思美人曲)>·<속미인곡(續美人曲)>·<성산별곡(星山別曲)>·<장진주사(將進酒辭)>및 단가 51수가 실려 있는데, 몇몇 표기상의 차이 외에는 ≪이선본≫과 대동소이하며, 이선의 발문과 정실의 후기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상의 자료에 대한 영인본(影印本)으로는 1954년 방종현이 해제를 붙여 통문관에서 간행한 바 있으며, 1958년 김사엽(金思燁)이 해제를 붙여 경북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 연구실에서 발행한 것이 있다. 특히 현전 3본을 아우른 영인본으로는 1973년 대제각(大提閣)에서 발행한 ≪한국고전총서(韓國古典叢書)≫<Ⅱ시가류(詩歌類)>에 ≪숑松강江가歌辭≫가 있으며, 교주본으로는 1948년 정음사에서 간행한 방종현 교주본이 있다.

차례            

해설
지은이에 대해

송강가사·상

관동별곡 해제
관동별곡
관동별곡 보충
사미인곡 해제
사미인곡
사미인곡 보충
속미인곡 해제
속미인곡
성산별곡 해제
성산별곡
장진주사 해제
장진주사
장진주사 보충

송강가사·하

단가 해제
1. 교술가: 훈민가 16수 외
2. 연군
3. 풍류
4. 풍자
5. 친화자연
6. 자성
7. 자긍
8. 별리(別離)·기타

옮긴이에 대해

옮긴이         

김갑기(金甲起)는 강원도 강릉 출신으로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1972), 같은 대학원에서 문학석사(1975) 및 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1985). 청주대학교 사범대학 한문교육과 교수를 역임하고(~2004. 2), 현재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송강 정철의 시문학≫, ≪한국한시문학사론≫, ≪동서 고전 연시≫(공저), ≪漢詩로 읽는 우리문학사≫외 다수가 있으며, 역서로 ≪삼한시귀감≫, ≪신자하시집Ⅰ~Ⅵ≫ (공역), ≪한국사찰제영시≫등이 있다.

편집자 리뷰   

‘초나라 굴원의 <이소(離騷)>가 있다면, 우리나라에는 송강의 가사가 있다.’ 김만중이 꼽았던 우리나라의 진문장,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을 비롯한 가사와 목민관으로서의 애민을 여실히 보여주는 훈민가를 비롯한 시조가 두루 담겼다. <장진주사>에서 권하는 대로 화창한 봄날, 꽃가지 꺾어 산가지로 술잔을 세어가며 송강의 시를 음미해 보는 것은 어떨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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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zman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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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 惟政(한국, 1544∼1610)

속성은 임(任)씨고, 본관은 풍천(佯川)이며, 자는 이환(離幻)이고, 호는 사명당(四溟堂) 또는 송운(松雲), 종봉(鍾峯)이며, 시호는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이다. 유정은 법명이고, 경남 밀양(密陽) 출생이다. 1556년 직지사(直指寺)의 신묵(信黙)을 찾아 승려가 되었다. 1561년 승과(僧科)에 급제하고, 묘향산 휴정(休靜西山大師)의 법을 이어받았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승병을 모집, 휴정의 휘하로 들어갔다. 이듬해 승군도총섭(僧軍都摠攝)이 되어 평양을 수복하고 권율(權慄)과 의령(宜寧)에서 왜군을 격파했다. 1594년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진중을 세 차례 방문, 화의 담판을 하면서 적정을 살폈다. 1604년 국왕의 친서를 갖고, 일본에 건너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를 만나 강화를 맺고 조선인 포로 3,500명을 인솔하여 귀국했다. 초서를 잘 썼으며 밀양의 표충사(表忠祠), 묘향산의 수충사(酬忠祠)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사명당대사집≫과 ≪분충서난록≫ 등이 있다.


내용 소개       

■ 국내 최초 소개

본명은 <<泗溟堂大師集>>으로 <<사명당집>>이라고도 한다. 조선 중기의 고승 四溟惟政의 시문집. 7권 1책. 목판본. 이 문집에는 임진왜란의 참혹상과 나라를 위해 싸웠던 승병들의 의기가 서려 있으며, 참된 禪을 위한 정진이 담겨져 있다. 특히 시 가운데에는 다른 승려들에게서는 보기 어려운 시풍도 엿보여 문집의 품위를 높여주고 있다. 우리나라 불교사상사의 흐름을 알리는 데 있어서뿐만 아니라 사명당의 생애와 사상과 당시의 사회상을 알게 하는 귀중한 자료이다.

해설 중에서    

사명대사 유정(惟政)은 조선중기인 임란왜란 전후 시기를 살다간 고승이요, 왜적과 싸우고 담판하여 국토를 지키고 수많은 포로를 쇄환(刷還)한 승병장이며, 경륜 높은 경세가(經世家)요, 또한 발군의 시인이기도 하였다. 본서는 유정이 남긴 시문집인 ≪사명당대사집(四溟堂大師集)≫을 통해 그의 사상과 삶에 대해 알리고자 하는 목적에서 집필되었다.
본서는 기본적으로 1993년 동국대학교 출판부(東國大學校 出版部)에서 편찬한 ≪한국불교전서(韓國佛敎全書)≫第8冊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본래 ≪사명당대사집≫은 총 7권으로 동국대 소장본·순천 송광사 소장본·고려대 소장본·연세대 소장본이 있다. 모든 본에는 뇌묵처영(雷黙處英)의 발문이 실려 있으며, 이 중 연세대본을 제외한 나머지 본에는 허균(許筠)의 서문이 실려 있다. 그리고 동국대본과 송광사본에는 성일(性一)의 발문이 따로 실려 있다. ≪한국불교전서(韓國佛敎全書)≫는 이 모두를 합쳐서 편집을 하였다. 본서에서는 7권에 걸친 내용 중 그의 삶과 시대를 조망할 수 있는 것으로 총 91편의 작품을 선별하였다. 사명유정의 문집에 대한 기존의 번역서로는 한글대장경 시리즈에 포함된 ≪사명당집≫이 있으며, 옮긴이가 2004년 출간한 ≪사명대사 유정시집≫(민속원)이 있다. 본서는 기존의 작업에서 부분적으로 보이는 번역의 문제점들을 대폭 수정하였으며, 보다 현대적 어법과 윤문 작업을 거침으로써 <지만지고전천줄>이 지향하는 바를 충실히 따르려고 노력하였음을 밝히는 바이다.

차례              

해설··························                         

지은이에 대해·····················                     

시월초사흘 눈 내리는 날에 十月初三日雨雪寫懷···   
동해사 東海辭····················                     
추풍사 秋風辭····················                     
송암(松庵) 스님에게 贈松庵·············             
화축(畫軸)에 쓰다 題畫軸··············               
낙동강 아래에서 병들어 누워 서애(西厓) 유상공(柳相公)에게 올리다 洛下臥病上西厓相公···········         
복주성(福州城) 누대에서 자며 宿福州城樓······     
욱(昱) 스님을 전송하며 送昱師還海西山·······       
정생원(鄭生員)의 시운을 빌려 次鄭生員韻······     
악양강(岳陽江) 어귀에 배를 대고 고운(孤雲)의 옛 자취를 찾으며 泊岳陽江口訪孤雲舊跡············           
동화사(桐華寺) 상방에서 밤 종소리 들으며 桐華寺上房聞分夜鐘·························                     
고향을 그리며 望鄕···················                 
영남 금오산[金鳥] 아래에서 병들어 누워 재주 있던 운중(雲中) 스님을 추억하며
嶺南金鳥下臥病憶雲中才調·· 

원적암 圓寂庵····················                     
소릉(少陵)의 시운을 빌려 次少陵韻·········         
부질없이 쓰다 謾書··················                   
허사인(許舍人)의 시운을 빌려 次許舍人韻······     
임인년(1602) 가을, 남관묘(南關廟)에 머무르며 壬寅秋留南關廟·························                     
진천(震川)을 지나며 過震川·············             
서쪽에서 놀면서 최고죽(崔孤竹) 어른께 올리다 西遊奉崔孤竹·························                       
서울의 여러 재상들께 도해시(渡海詩)를 청하며 謹奉洛中諸大宰乞渡海詩···················                 
강선정(降仙亭) 題降仙亭··············               
기축년(1589) 횡액으로 역옥에 걸려 己丑橫罹逆獄··   
계미년(1583) 가을, 관서(關西)로 가는 도중에 3수 癸未秋關西途中·······················                     
하양(河陽)으로 가는 중 찬공(瓉公)의 선방을 떠올리며 河陽途中憶寄瓉公禪室··················               
진헐대 眞歇臺····················                     
녹문(鹿門)의 긴 강에서 여러 문하들과 헤어지며 鹿門長川別門下諸公·····················                   
반야사(般若寺)에 자며 宿般若寺··········           
고향에 돌아와서 歸鄕················                 
신라(新羅)의 옛 여관에서 밤에 앉아 新羅故館夜坐·· 
임진년(1592) 10월, 의승군을 이끌고 상원(祥原)을 건너며 壬辰十月領義僧渡祥原················             
기해년(1599) 겨울, 단양(丹陽)으로 가는 도중 전마가 죽어서 己亥冬丹陽途中斃戰馬···············           
혜윤(惠允) 스님의 시축(詩軸)에다 쓰다 題惠允軸···   
허생(許生)에게 贈許生················               
명사(鳴沙)로 가는 길에 鳴沙行············           
산중에서 山中····················                     
체포되어 강릉에 와서 擒下江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