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자 미상 (한국, ?~?)  

<조웅전>의 작자가 누구인가 하는 것은 알 수 없지만, 난삽한 고사성어․한문구․삽입 가요들의 빈번한 사용은 어느 정도 이 작품의 작자 계층에 대하여 대변해 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즉 <조웅전>에서의 많은 한시구ㆍ한문구 사용은 한문에 대한 상당한 소양이 있는 사람이 아니면 안 되었을 것이다. 더구나 의미를 확실히 모른 채로 전사(轉寫)해 나가는 동안 이본에 따라 오자(誤字)ㆍ탈자(脫字)가 생겨났거나, 혹은 전기수[이야기꾼]의 구술을 음대로 기록하여 착오된 경우라면 의미 이해는 전혀 불가능하다. 일반 서민은 고사하고라도 식자층으로서도 의미 대역(對譯)이 붙어 있지 않는 한 의미 파악은 곤란했을 것이다.

<조웅전>의 작자는 한문 식자층으로 가상된다. 여기서 좀더 추측을 진전시켜, 자유 연애ㆍ육정적(肉情的)인 표현 등 전통적인 유교 이념에 배치되는 내용들이나, 전편에 걸쳐 독자의 흥미를 돋우려 했던 작가의 의식적인 배려 등으로 미루어 본다면, <조웅전>은 소설 작법의 기교가 어느 정도 발달한 시기에 있어서 상당히 전문적인 작가에 의해서 창작된 것으로 생각된다.

 

해설         

이 작품은 원전의 분량이 많지 않으므로 발췌하지 않고 모두 번역하였습니다.
편년체 군담소설로 번역의 원전으로 ≪됴웅젼(趙雄傳)≫(경판 30 단책본)을 사용 하였습니다.

≪조웅전(됴웅전)≫은 군담소설이라 통칭되어 왔다. 군담소설이란 ‘군담을 쓴 소설’이란 뜻이다. 그러면 군담이란 무엇인가? ‘군담’의 사전적 정의는 ‘전쟁 이야기’다. 따라서 군담과 군담소설은 결코 동일 개념일 수가 없는 것이다. 군담은 어디까지나 실제 역사적 근거를 가진 전쟁의 기록물인 반면, 군담소설은 픽션으로 그려진 전쟁의 이야기인 것이다.

고전소설 중에서 ≪조웅전≫처럼 이본이 많은 작품도 드물다.≪조웅전≫이 완판·경판·안성판에 모두 들어 있고, 또 많은 이본을 가지고 있음은 단적으로 이 작품이 그만큼 인기가 있었고, 많이 읽혀졌다는 근거가 된다. 말하자면 ≪조웅전≫은 고전소설의 베스트셀러로서 중판과 개판(改版)을 거듭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현전 이본의 수로만 보면 ≪조웅전≫이 ≪춘향전≫에 이은 과거의 인기 소설이었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래서 민간에는 심지어 ‘1조웅(一趙雄) 2대봉(二大鳳)’이란 말조차 있지 않았던가? 이는 ≪조웅전≫이 으뜸이요, ≪이대봉전≫이 버금이란 말이다. 따라서 이 작품의 한국문학사상의 의의도 매우 크다고 할 것이다.

한편 ≪조웅전≫은 작자뿐만 아니라 창작 연대에 대해서도 현재로서는 추정의 범위를 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상황을 종합해 판단한 결과, 필자는 ≪조웅전≫의 창작 연대는 기껏해야 지금으로부터 2세기 이상을 더 소급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사실은 고전소설 제명의 구체적 언급으로 자주 거론되는 조수삼(趙秀三, 1762~1849)의 ≪추재집≫이나 소전기오랑(小田幾五郞)의 ≪상서기문≫(1794)에도 ≪조웅전≫의 이름이 실려 있지 않다는 점이다.

물론 ≪조웅전≫이 이 두 저작에 나타나지 않는다고 해서 당시 아직 창작되지 않은 때문이라고 단정해 버리는 것은 매우 성급하고도 위험한 결론이 되겠으나, ≪소대성전≫·≪설인귀전≫·≪장풍운전≫·≪장박전≫(≪장백전≫?) 등이 인용되고 있는 터에, ≪조웅전≫과 같은 인기 소설이 빠져 있다는 것은 당시에는 아직 이 작품이 없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한편 이제껏 알려진 완판본 중에서 간기가 적힌 것으로 ① 병오개간(丙午開刊) ② 계묘중간(癸卯重刊) ③ 무술신판(戊戌新版) ④ 임진신간(壬辰新刊)을 놓고 검토해 보기로 하자. 19세기 이후에서 병오년을 찾아보면 1846년과 1906년이 나타난다. 그런데 개간(開刊) 연대를 1906년으로 볼 수는 없으므로, 병오년은 자연 1846년이 되지 않을 수 없다. 한편 상기 ②~④는 모두 중간 또는 신간이므로 개간 연대인 1846년을 넘지 못함은 당연하다. 그러므로 임진·계묘·무술은 각각 1892, 1898, 1903년에 해당되겠다. 이러한 생각은 물론 판각소가 달랐다고 한다면 각각 1832, 1838, 1843년으로 될 수도 있다. 또한 ≪추재집≫과 ≪상서기문≫을 고려하지 않고 병오년을 추정한다면 120년 전인 1726년도 가능하다. 그러나 아무리 소급하더라도 120년 전인 1726년은 될 수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1726년은 영조 2년으로, 이제껏 밝혀진 바에 의하면 이때에 벌써 ≪조웅전≫과 같은 소설이 있었으리라고 추정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여 방각본 이전에 필사본이 있었으리라는 추정을 해본다면, ≪조웅전≫의 창작 연대는 18세기 후반이나 혹은 19세기 초임이 틀림없을 듯하다.

≪조웅전≫이 특이한 점은, 주인공의 탄생에서 기자(祈子) 정성이나 태몽이라든가 천상인의 하강과 같은 모티브가 전연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른 대부분의 군담소설들이 발단부에서 하나의 투식으로 기자·태몽이 제시되고, 주인공의 신분이 고귀하고 그 능력이 초월적임을 예시하기 위하여, 천상 선관 또는 ‘아무 별[某星]’의 적강(謫降)을 보이는 데 대하여, ≪조웅전≫에서는 이것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은 작가의 의도적인 배려인 것처럼 보인다. 그 의도적인 배려란 조웅의 비범한 능력이 선천적인 것이 아닌 후천적인 것이라는 강조이겠다.

≪조웅전≫의 전개 방식이 다른 군담소설류와 다르다고 할 수 있는 것은 그 편년체적 서술 방식을 들 수 있겠다. 물론 거의 모든 고전소설이 어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현대소설에서와 같이 역시간적(逆時間的)인 구성 방법을 취하고 있는 경우란 드물어서 보통 순행적인 전개 방식을 취하므로 이것은 엄격히 말하면 편년체적인 구성 방법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편년체적 서술 방식이라 함은 간지(干支)로써 시간의 경과를 나타내고 있는 경우만을 말한다. 고전소설에서 이처럼 간지를 써서 사건의 진행을 나타내는 작품은 ≪화사≫와 같은 역사체 소설을 제외하면 찾아보기 어려운 것인데, 이와 같은 특징적인 수법을 작가가 쓰고 있는 것은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사기≫와 같은 역사서로부터 작가가 의도적으로 차용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군담의 묘사에 있어서도 다른 군담소설에서와 같은 바람과 비를 부르고[呼風喚雨] 또는 범과 표범으로 변하는[作虎作豹] 것과 같은 도술전(道術戰)이 거의 거세되어 있어 덜 환상적이다. 요컨대 이상에서 말한 역사적 기술 방법인 편년체의 차용, 주관적인 작자의 목소리의 제거, 도술전의 제거 등은 ≪조웅전≫의 작가가 비교적 객관성을 유지하려 노력하였음을 말해주는 것이겠다.

≪조웅전≫에 나타나는 군담을 살펴보기로 하자. 완판본 권상에는 군담이 전연 없고, 권2에는 조웅과 장소저의 기연(奇緣) 및 태자와의 상봉담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어서 군담으로는 번왕과의 싸움이 약간 보일 뿐이고 권3에 가서야 비로소 군담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그러므로 ≪조웅전≫에서 군담이 차지하는 분량은 전체의 약 3분의 1가량 되는 셈이다. 일반적으로 대다수의 군담소설이 그러한 것처럼 ≪조웅전≫의 군담은 구체적ㆍ사실적인 전쟁 모습을 보여 준다기보다는 실전 양상과는 거리가 먼 추상적ㆍ설명적 군담으로 되어 있다. 공식적인 대결 양상에서 우리가 개성이 있는 장수의 모습이나 특징적인 전법의 모습을 찾는다는 것은 헛일이 아닐 수 없다. 또한 모사의 등장이 없으니 지혜 싸움도 나타나지 않는다.

≪조웅전≫의 군담에서 좀 특이한 점을 찾는다면, 진법의 사용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과 도술전이 거의 없다는 점일 것이다. 이미 월경도사와 철관도사로부터 신통한 술법을 배운 조웅이 그 기이한 술법을 별로 전장에서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상한 느낌이 들 정도다.

그리고 ≪조웅전≫에서 또 하나 특이한 점은 항복한 장수에 대한 처리 문제라 하겠다. 조웅은 위국을 침범하였던 번왕을 사로잡아 송나라 조정에 대한 충성을 다짐받고 놓아주었다. 그러나 다시 반기를 들었으므로 조웅은 이와 다시 대결한다. 결국 번왕은 재차 사로잡혔으나 조웅은 이번에도 관대히 용서하고 놓아주었다. 반면 이두병 일파에 대해서는 가혹하리만치 항복을 용납하지 않았다. 태수 태원·장덕·최식·황덕 등의 인물들이 모두 목숨을 애걸하였으나 가차 없이 참수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이는 조웅의 잔인성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지만, 실은 이두병과 같은 역신에 대한 본보기요, 또는 부친의 원수에 대한 보복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조웅전≫의 내용상의 주요한 특징으로 들 수 있는 것은 애정담 및 삽입 가요다. ≪조웅전≫의 애정담이 특이한 것은 작중 남녀 주인공, 즉 조웅과 장소저가 다른 고전소설에서처럼 숙세(宿世)의 인연에 의한 중매로 만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자유 결혼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더구나 작자가 유교적 이념에 충실하면서도 이와 같은 혼전 정교를 대담하게 묘사했다는 것은 어찌 보면 배리(背理)로도 보여지나, 이 작품이 독자들에게 그처럼 인기가 높았던 것은 이런 자유분방한 결연 형식에도 원인이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차례         
해설
지은이에 대해
본문
옮긴이에 대해



 

본문중에서 
십년 경영하여 천문을 배운 뜻은, 월궁에 올라 항아를 보렸더니, 은하에 작교 없어 오르기 어렵도다. 소상의 대를 베어 퉁소를 만든 뜻은 옥섬을 보려 하여 월하에 슬피 분들 뉘 능히 지음하랴. 두어라, 알 이 없으니 수회를 풀리로다.



출판사서평 
≪조웅전≫은 춘향전에 이은 고전소설의 베스트셀러다. ‘1조웅(一趙雄) 2대봉(二大鳳)’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한국문학사상 의의가 깊다. 조웅이 번왕, 이두병과 대립하는 내용을 편년체로 서술하고 도술전을 제거해 객관성을 유지하려 한 것이 특징이다. 이 책은 경판본 조웅전의 결정판이며 첫 주석서로서 의미를 지닌다.



옮긴이      

조희웅은 1943년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문학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한양대학교 전임강사와 국민대학교 교수, 미국 하버드(Harvard)대학교 객원교수, 일본 규슈대학 객원교수를 지냈다. 국민대학교 문과대학 학장과 대학원장으로 활동하였으며, 한국구비문학회 회장과 한국고전문학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구비문학 개설≫(공저, 1971), ≪조웅전≫(1978), ≪한국구비문학대계≫[1-1 서울 도봉구 편(1980), 1-4 경기 의정부 남양주군 편(1981), 1-6 경기 안성군 편(1982), 1-9 경기 용인군 편(1984)], ≪조선 후기 문헌설화의 연구≫(1980), ≪설화학 강요≫(1989), ≪이야기문학의 모꼬지≫(1995), ≪한국설화의 유형≫(1996), ≪고전소설 이본목록≫(1999), ≪고전소설 작품연구 총람≫(2000), ≪고전소설 문헌정보≫(2000), ≪Korean Folktales≫(2001), ≪경기북부 구전자료집 I≫(2001), ≪고전소설 줄거리 집성 1․2≫, (2002), ≪편옥기우기≫(공저, 2002), ≪영남 구전자료집 1-8≫(공편, 2003), ≪영남 구전민요 자료집 1-2≫(공편, 2005), ≪고전소설 연구보정 上·下≫(2006) 등이 있으며, <원생몽유록 작자 재고>(1963) 이후 현재까지 약 100여 편의 논문이 있다.




별점        

사용자 삽입 이미지
 

본 포스트의 저작권은 편역자와 출판사에 있으므로, 무단 전재나 재배포를 금지합니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zmanz

댓글을 달아 주세요

청옥당 靑玉堂(조선후기의 이름 모를 학자들)

<동상기>에 대한 관심은 우리 소설사를 처음 쓴 김태준이 그의 ≪조선소설사≫에서 이 작품을 희곡으로 언급한 데서 비롯된다. 그는 이 작품을 “문양산인농제(汶陽散人弄題)의 동상기”라 언급하면서 이것이 이덕무(李德懋)의 저작인지는 확신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그가 ‘문양산인의 동상기’라 한 것도 현전하는 이본 4종 가운데 국립중앙도서관본과 한남서림본에서만 나타나고 있으므로 그는 이 두 가지를 참고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근래에 들어서 이옥(李鈺)의 작품일 것이라는 주장이 여러 논자들에 의해 제기되고 있다. 그것은 이 작품의 작자로 거론된 ‘매화치농’, ‘매화탕치농’이 이미 매화와 유관한 별호를 사용한 이옥과 관련이 있다는 점, 그리고 제사(題辭)의 내용에서 학질을 언급한 내용에서 작자가 학질에 걸린 적이 있었던 인물이라는 점, 그리고 역시 같은 제사의 내용에서 신해년 유월에 과거 공부 중이란 점이 그와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이 작품의 범위나 성격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일치된 견해를 보지 못하고 있다.



해설         

이 책은 원전의 분량이 많지 않으므로 발췌하지 않고 모두 번역했습니다.

≪동상기≫는 우리나라 최초의 고전 희곡이다. 노처녀 노총각을 조정에서 결혼시켜 주는 내용으로, 18세기 후반 조선시대의 서울 사회를 그리고 있다.
이 책에서는 현재 전하는 이본 4종의 원문을 대조하여 번역했다. 여러 이본 중에서 굳이 ‘청옥당 제칠재자서 동상기’를 기본 텍스트로 고른 이유가 있다. 이 자료가 그만큼 본 작품을 바라보는 역자의 의도를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계급이 맞지 않고 빈부가 맞지 않아 짝을 찾지 못하는 결혼의 풍습이야 오늘날과 다를 바 없지만, 이런 다양한 자료가 남아 있게 된 이유나 생각보다 심한 각 이본 간의 오·탈자 문제를 이해하려면 이보다 더 좋은 자료를 찾기 어려울 것이다.
변혁기에 접어든 조선 후기 사회가 고착된 집권 노론층의 정국 운영으로 더 이상 변화의 물꼬를 트기 어렵게 될 즈음, 수백 년 전통의 가례를 거부하고 중국으로부터 천주교 세례를 받고 돌아온 사람까지 나타나고, 폐쇄된 상층부 자체에서도 전통적인 성리학 지식 습득에 안주하기보다 역동적인 하층부의 문화에 관심을 갖는 쪽이 늘어나면서 오히려 패사소품 서적을 탐독하는 이들까지 생겨났다. 이렇게 되자 국왕 정조는 이런 원인이 명·청 소품문의 유입에 있다며 문체를 바로잡으려는 정책을 펼친다. 그리하여 몇몇 인사들이 쓴 불순한 문체를 순정한 쪽으로 바꾸도록 명한다. 문체가 시대를 반영한다며 뒤숭숭한 시대 분위기를 일신코자 한 이 사건을 우리는 문체반정이라 일컫는다. 그래서 조정 관료나 유생들이 쓴 글을 검열하는데, 남공철·김조순·이상황·박지원·이덕무·김려·이옥 등이 견책을 당한 당시 선비들이다.
지금으로서는 구습을 벗고 시대에 맞는 문체를 사용한 것 같은 이 사건이 어떤 연유로 발생되었을까? 지금도 이견이 분분하다. 이 책이 이 의문을 모두 해결할 수는 없지만, 그 정황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게 할 것이다.
단지 소품체 어휘 몇 단어 때문에 이들이 견책을 당했다기보다 훨씬 더 백화투에 다가선 것이 이유일 것이라 믿는다. 이 책에 실린 이옥의 <김신부부사혼기>를 보면 그 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고문 작가로서는 정상적으로 읽을 수 없는 생경한 문체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 한 사람인 이덕무는 자송문도 작성하지 못한 채 곧 세상을 떠났고, 이옥은 충청도 정산현에 충군되었다가 나중에는 경상도 봉성(현재 합천군 삼가면) 땅에 가서 118일간 귀양살이를 한 뒤 고향으로 돌아가 생을 마감한다. 귀양살이의 긴 사연은 친구였던 김려에 의해 ≪봉성문여≫란 글로 편찬되었고, 역자는 ≪봉성에서≫(국학자료원, 2001)라는 책으로 세상에 내놓은 바 있다. 이것이 조선 선비의 삶이었다.



차례                   

해설 ·······················9

청옥당제칠재자서
동상기(靑玉堂第七才子書東廂記)

동상소지 ····················37
東床小識 ····················39
김신부부전 ···················41
金申夫婦傳 ····················56

동상기 ·····················69
제1절 ·····················70
제2절 ·····················82
제3절 ·····················94
제4절 ····················108


東床記 ····················120
第一折 ····················121
第二折 ····················131
第三折 ····················141
第四折 ····················153

참고문헌 ····················163
역주자에 대해 ··················166



본문 중에서       


冬月明, 雪裏人嫌冷,
秋花姸, 春去誰稱美?
一叢香愁, 令人脹死,
不問可知.
蠶老了猶能室,
花老了尙能子,
處女老了奈爾何?


겨울 달이 밝으나
눈 속에서는 사람들이 추위서 싫다 하고,
가을꽃이 아름다우나
봄 지난 뒤 누가 아름답다 하리오.
한 떨기 향내도 근심 되면,
사람을 창증에 걸려 죽게 한다는 것은
불문가지라.
누에가 늙으면 오히려 고치라도 되고,
꽃은 지면 그래도 열매라도 생기지만,
처녀가 늙으면 무얼 하겠느뇨?




옮긴이           

정용수는 성균관대학교 한문교육과를 거쳐, 동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고전문학 전공으로 문학석사 및 문학박사 과정을 수료했고, 2000년부터 U. C. Berkeley, Institute of East Asia Studies에서 1년간 객원교수(Visiting Scholar)를 지냈다. 현재 동아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재직하고 있다.
역서로 ≪후탄선생정정주해 서상기≫(국학자료원, 2006), ≪剪燈新話句解≫(푸른사상, 2003), ≪봉성에서≫(국학자료원, 2001), ≪고금소총 명엽지해≫(국학자료원, 1998), ≪국역 소문쇄록≫(국학자료원, 1997) 외에 다수의 논문이 있다.

본 포스트의 저작권은 편역자와 출판사에 있으므로, 무단 전재나 재배포를 금지합니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zmanz

댓글을 달아 주세요

볼테르 Voltaire(프랑스, 1694~1779)


빠리의 평민 가정에서 출생한 그의 본명은 프랑수와 마리 아루에(F. M. Arouet)이고, 볼떼르라는 이름은 1718년에 비극 ≪오이디푸스≫를 발표하며 사용하기 시작한 필명이다. 젊은 나이에 일찍 사교계에 진출하였고, 당시의 많은 젊은이들이 그랬듯이, 희곡으로 명성을 얻고자 하는 야심에 들떠 있던 그는 주로 희곡 집필에 몰두하였다. 그의 첫 소설 ≪쟈디그≫를 발표한 것이 1747년이니, 나이 오십이 넘어서이다. 또한 기지 발랄한 사람들이 대개 그러하듯, 그가 처한 사회에서 비방의 대상이 되고 박해를 받기도 하던 그는 잠시 영국으로 피신하기도 하는데(1726∼1729년), 그 시절이 그에게는 영국에서 이미 자리 잡은 정치적 자유주의나 존 로크(J. Lock, 1632∼1704년) 같은 학자의 경험론을 접할 수 있게 된 호기(好機)였던 것 같다. 영국에서 돌아온 후에도, 당시의 정치체제 및 지배 종교와 끊임없는 갈등 관계에 있던 그는, 고향인 빠리에 머물지 못하고, 샤뜰레 부인이나 프러시아의 후레데릭 II세 등과 같은 후원자(지지자)들에게 의지하며 전전하다가, 나이 육십이 넘어서야 스위스와의 국경 근처에 있는 작은 산골 마을 훼르네(Ferney, Gex 지방)에 정착한다. 그는 황량한 그 마을에 토지를 일구어 경작지를 넓히는 한편 산업을 일으켜, 그곳에 머문 이십여 년의 세월 동안에 그 마을의 면모를 완전히 바꾸어놓았으며, 오늘날까지도 그 일은 그 고장의 전설이 되었다. 또한 ≪철학 사전≫을 비롯한 그의 가장 원숙한 작품들이 발표된 것도 그 시절이며, 영원한 기하학자이며 절대적으로 완벽한 조물주에 대한 신앙(le culte de l'Etre Suprême)이라는 그의 새로운 종교가 확립된 것도 그곳에서이다. 1778년 고향 빠리에 돌아와 타계하였다.



해설         



국내 최초 소개

 
∙이 책은 볼떼르의 5개의 작품을 싣고 있습니다.

≪쟈디그≫와 ≪깡디드≫ 등, 볼떼르의 대표적인 작품들뿐만 아니라, 그의 여타 단편들 속에서도 첫눈에 발견되는 것은, 이 세상의 모든 일이 절대자의 뜻에 따라 이미 치밀하게 기획되어 있다는 인식이다. 그러한 숙명론 내지 예정설이 그의 작품 세계에서 가장 선명하게 포착되는 라이트모티프이다. 따라서 어찌 보면 그를 가리켜 운명론자 내지 비관주의자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한 세계관을 가진 사람에게는 어떠한 사유(思惟)나 행위도, 나아가 존재니 비존재니 하는 구분조차도, 모두 무의미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에 대한 그의 관심은 지극히 첨예하고 집요하다. 기이한 현상이다. 특히, 선별적 구원론 내지 낙관주의에서 배태된 종교현상 및 그것의 폐해 등에 대한 그의 날카로운 관찰에서는(≪깡디드≫), 근본주의적인 혁신 의지마저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그가 인식하고 있는 인간과, 그 인간이 깃들이고 있는 지구의 실체는 비참하리만큼 초라하다. 지구라는 이 행성은 기껏 하나의 ‘진흙덩이’ 혹은 ‘진흙 원자’에 불과하다. 또는 하나의 ‘개미탑’이나 ‘두더지 흙두둑’일 뿐이다. 그리고, 광막한 우주 공간에서 그 ‘먼지 알갱이’ 표면에 기생하며 꺼떡거리는 우리 인간의 모습은 ‘벌레’나 ‘좀’의 꼴과 다름없다(≪쟈디그≫, ≪미크로메가스≫). 그렇건만, 그 무한히 작은 것이 무한히 거만하다. 심지어, 그 보잘것없는 주제에, 유독 자기들에게만 ‘영혼’이라는 것이 있다는 점을 무슨 특권처럼, 혹은 절대자가 내린 신표(信標)처럼 자랑스러워한다. 하지만 그 영혼이라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아무도 시원스러운 대답을 하지 못한다. 영혼이란, 소크라테스의 다이몬(daimon)이나 플라톤의 이데아 등이 그렇듯이, 그 실체가 규명되지도 정의되지도 않은, 순전한 몽상 내지 망상의 소산일 뿐이다. 물론 망상의 소산이라고 하여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우주에 존재하는 무한수의 생명체들 중 유독 자기들에게만 영혼이라는 그 입증되지도 않은 신표가 있다고 주장하는 일부 인간 집단의 몽상은, 또 하나의 불가사의이며 경이로운 현상이다. 물론 그 현상 역시, 소크라테스나 플라톤과 같은 몽상가들의 유산일 수 있으며, 그것이 아마 미신의 굴레를 완전히 벗어던지지 못한 ‘형이상학’이라는 아귀다툼의 실마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없는 성 아우구스티누스를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예수교의 존속을 가능케 한 자양을 공급한 이들이 그 두 몽상꾼 아닌가? 델포이를 비롯한 여러 곳 신전들의 신탁(信託, 점괘)과 ‘선지자’란 말은 무관한 것일까? 델포이 신전과 바티칸 신전이 전혀 이질적인 유물일까? 나아가, 프로메테우스와 크리스토스(메샤의 그리스식 명칭)는 전혀 무관한 존재들일까?

그 초라하고 우스꽝스러운 존재가, ‘느끼고 사유하며 말하는 피조물’이며, 상황의 변덕에 따라 일희일비하는(≪백과 흑≫) 덧없는 부유물이고, 그 ‘좀’ 속에 선과 악이 혼재(混在)한다는 볼떼르의 인간관이, 자신을 우주의 중심적 존재라고 믿는 ‘사각모 쓴 미물’(쏘르본느의 신학자, ≪미크로메가스≫)의 인간관보다는 더 그럴듯해 보인다. 그러나, 인간 속에 선과 악이 공존한다든지, 혹은 ‘하나의 선이나마 태어나게 하지 않는 악은 없다’느니(≪깡디드≫) 하는 등의 언급은, 자신에게 영혼이라는 신표가 있다고 우쭐대는 이들의 주장만큼이나 모호하다. 도대체, 광대무변하고 무시무종(無始無終)한 우주 속에서, 선이니 악이니 하는 개념의 구분이 성립한다는 말인가? 그가 인식한 조물주(demiourgos, 즉 건축가) 혹은 절대자(Être Suprême) 역시 가치중립적이며 무심한 존재이다. 즉, 우주를 주도면밀하게 ‘설계한’ 절대적 창조주가 악이라는 것을 만들었을 리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 선과 악의 대립적 구도, 그 유치한 갈등 관계를 탄생시켰을 리 만무할 것이다. 그러한 짓은 간사한 군주나 비열한 정파들의 전유물이다.

그러나 한편, 무한히 지속되는 연계 고리를 어찌나 완벽하게 창조하였던지, 그 연계 고리, 즉 ‘숙명’ 앞에서는, 창조주 자신조차도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 볼떼르의 주장이다. 피조물들은 말할 나위 없이, 창조주 역시, 자기의 지혜와 의지와 법칙과 속성의 ‘노예’일 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피조물이 조물주에게 무엇을 아무리 간절히 부탁한다 하여도, 그 소청이 가납될 리 없다. 만약 조물주가 그 소청을 들어준다면, 그의 창조 작업이 허술하였음을 시인하는 꼴이 될 것이다. 그러니, 절대자에게 무엇을 간구하는 행위 자체가 그에 대한 모독일 수 있다. 또한, 기도로 절대자의 뜻을 바꾸게 하려는 행위 못지않게 실례되는 짓은, 피조물들이 그를 찬양하노라 떠들어대는 일이다. 조물주가 피조물들의 찬사에 기뻐한다는 말인가? 그 절대자가, 로마 시민들의 칭송에 불쾌감을 감추지 못했다는 어느 황제만도 못하다는 말인가? 툭하면 동티나 일으키는 잡귀들과 그를 혼동한다는 말인가? 게다가, 피조물들에게, 조물주를 찬양할 자격이 있다는 것인가?

인간과 조물주의 관계가 그러한데, 그 실상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그것을 외면해 버리는 오만에서, 온갖 미신이 ‘종교’라는 간판을 내걸고 창궐한다. 그리고 각 종교는, 각개의 교리와 의식을 정비하고, 사제를 임명하며, 신당(전)을 마련한 다음, 세력 확장에 매진한다.

고금을 막론하고 종교가 그 과정에서 인간에게 참혹한 재앙을 가져다주는 양상과 핵심적 요소들, 그것들이 볼떼르의 소설들을 점철하고 있다. 뭇 종교의 근간인 복술(卜術) 혹은 예언, 사리를 밝히려는 이들에 대한 증오, 음모, 탐욕, 궤변, 위선, 사기, 협박, 광신주의, 종교재판, 말뚝형, 화형, 기타 가학적 처형 등, 이루 다 열거하기조차 민망스러우리만큼 추한 현상들이, 볼떼르의 작품 세계를 형성하는 주요 소재들이다. 그리고 그 모든 현상들의 핵심적 동인(動因)을 볼떼르는 광신주의에서 발견하는 듯하다. 광신주의란 하나의 종교를 지탱시켜 주는 필수 불가결의 에너지이며, 그 에너지의 생산자가 사제, 설교가 및 해당 종교 이론가들이다. 하지만 이론가들의 역할은 그리 크지 못하다. 그들은 비교적 사리 밝은 이들을 설득하는 역할을 맡았고, 따라서 그들의 말이나 글 자체가 상당한 합리성을 구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조로아스터가 어찌 페르시아 군대를 동원할 수 있었겠으며,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이나 ≪신의 나라≫를 읽었기 때문에 십자군의 일원이 된 자가 있겠는가? 또한 토마스 아퀴나스가 알비 성전(13세기 초에 프랑스 서남부 지방의 카타로스파를 잔혹하게 토벌한 전쟁)을 일으킬 수 있었겠는가?

하나의 종교에 그 지탱 에너지와 확산 에너지를 확보해 주는 첨병들은 사제 내지 설교가들이다. 그리고 그 에너지의 원천은 열광인데, 열광은 오직 광신(狂信), 즉 사리를 무시하거나 분별치 못하는 상태의 믿음에서만 가능하다. 그러한 맹신자들 내지 광신도들의 수효가 종교의 존속을 담보해 준다. 따라서 정치인들이나 연예인들의 경우처럼, 종교의 존속에 있어서 최대의 관건은 맹신자들의 확보이다. 맹신자들을 확보하는 방법들 중, 협박이라는 보편적 수단 이외에 가장 유구한 것이, 아마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며 그들의 피해망상증이나 열등감 등을 적당히 자극하는 행위, 즉 선동일 것이다. 또한 그 선동된 상태, 즉 그 열광 상태를 유지시키고 증폭시키는 촉매제 내지 흥분제들 중 가장 강력한 것이, 다른 개체나 집단에 대한 질투와 증오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그러한 질투와 증오를 존속 수단 내지 무기로 삼은 천한 종파나 정파는 이루 헤아릴 수조차 없을 만큼 많다. 또한 그것이 아직도 인류를, 특히 한국 사회를 짓누르고 있는 위험스럽고 추한 전염병이다.

볼떼르는 유럽인들을 일천 년 이상 혹독한 재앙 속에 처박은 원흉을 그러한 광신주의라고 여기는 듯하다. 뚤루즈의 늙은 상인이며 깔뱅(J. Calvin)파 개신교도였던 쟝 깔라스(J. Calas)가 이웃에 사는 카톨릭교도들의 무고로 인해 차형(車刑)에 처해지고 그 가정이 파괴되자, 그 사건에 뛰어들어 깔라스의 무죄를 밝히고, <관용론(Traité sur la tolérence)>을 집필한 것 또한 그러한 시각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그렇다 하여 물론, 그가 <관용론>에서 어느 특정 종파를 두둔하거나 나무라지는 않는다. 그의 여러 소설에서처럼, 숱한 종교전쟁이나 종파들 간의 학살 행위, 가학적 보복, 증오 등을 촉발시키는 광신주의의 실체를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카톨릭이나 개신교, 마호메트교, 조로아스터교, 힌두교 등 어느 종파를 막론하고, 그것들 속에서 배타적 광신주의를 발견한 그가 꿈꾸던 것은, 사랑도 질투도 노여움도 모르며, 인간의 변덕에 무심한 절대자를 숭배하는 종교(le culte de l'Être Suprême), 그 ‘영원한 기하학자’를 숭배하며, 열광이 아닌 이성과 양식에 기초한, 새로운 종교인 듯하다.

무수한 인물과, 사건, 고장, 시대, 풍습 등, 광대한 문학적 공간을 동원하여 펼친 그의 이야기들을 일관하는 주제는, 종교와 형이상학이다. 그러나 그가 작품들 속에서 비판하고 있는 형이상학의 속성은 대부분 종교의 속성과 다름없다. 즉, 형이상학자들은, 예를 들어, ‘신의 본질’, ‘영혼의 불멸성’, ‘영혼과 육체의 관계’ 등과 같은 것들을 문제라고 하며 제기하는데, 우선 그것들 중 대부분은 인위적으로, 때로는 사제들의 필요에 따라 만들어진, 영영 풀릴 수 없는 문제들이다. 즉 사이비(似以非) 문제들이다. 따라서 결국에는 그것들이 많은 사람들을 부질없는 고뇌에 빠지게 하고, 그들의 생명을 헛되게 소진시키며, 결국 자연스러운 삶에 등을 돌리게 한다. 예수교를 가리켜 ‘체념과 죽음의 종교’라고 한 미슐레(J. Michelet, 1798∼1874)의 시각 또한 같은 선상에 있다. 하지만 그것은 개인적인 위험에 불과하다. 더욱 심각한 위험은, 형이상학이 종교적 양상으로 변해, 언제든 광신적 배타성을 띠고, 결국에는 사회를 분열시키며, 집단과 집단 사이에 가학적 증오의 씨를 뿌린다는 사실이다.

한마디로, 볼떼르의 긴 생애를 사로잡고 있었던 중추적 주제는 종교 문제였던 것 같다. 그를 가리켜 흔히들 계몽 철학자 혹은 프랑스대혁명의 아버지라고 하는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일 것이다. 그러나 간과하지 말아야 할 점은 그의 모든 작품에 감도는 해학이다. 그의 작품들은 중세의 패설(稗說, fabliaux)들을 방불케 한다. 특히 디드로나 루쏘의 작품들과 비교할 때 그러한 특색이 더욱 두드러진다. 그의 어느 작품을 대하더라도, 경쾌하고 때로는 혹독한 해학적 풍자가 톡톡 튀고, 글의 행간에 어느덧 그의 미소가 어른거리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본다면, 비록 철학자이며 지칠 줄 모르는 논쟁꾼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프랑스의 가장 유구한 문학적 전통에 뿌리 내리고 있음을 즉각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중세의 패설들과 ≪여우 이야기≫를 지은 이름 모를 문인들이나, 뤼뜨뵈프, 뻬리에, 라블레, 샤를르 쏘렐, 몰리에르, 르 싸주 등으로 이어지는, 갈리아적 익살꾼들의 계보에 당당하게 오를 수 있는 것은 그의 작품들 속에 스며 있는 그러한 특색 때문이다.

이제 그의 작품 몇 편을 선정하여 소개하려는 뜻은, 흔히 사상가 혹은 계몽주의 철학자로만 널리 알려진 그의 다른 측면, 즉 진정한 이야기꾼의 측면을 드러내려는 데에 있다. 또한, ‘신들의 몫’이라고 하는 그 고귀한 웃음을 잃으신 분들에게, 작은 파적거리나마 찾아드리고 싶은 소박한 충동에 이끌리기도 하였다.



차례        

해설 

지은이에 대해

미크로메가스 

세상 돌아가는 대로

백과 흑

체스터휠드 백작의 귀

스카르멘타도의 유랑기

주요 작품 연보 


옮긴이에 대해 



작품 중에서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곳에 있던 사각모 쓴 미세동물이, 다른 철학자 미세동물들의 말을 끊으며 나섰다. (...) 그는 하늘에서 온 두 나그네를 위아래로 한 번 훑어보고 나서, 그 두 나그네들뿐만 아니라, 그들이 사는 세계, 그들의 태양들, 그들의 별들 등, 모든 것들이 오직 인간만을 위해 창조되었다고 주장하였다.

Mais il y avait là, par malheur, un petit animalcule en bonnet carré, qui coupa la parole à tous les animalcules philosophiques;(...) il regarda de haut en bas les deux habitants célestes; il leur soutint que leurs personnes,leurs mondes, leurs soleils, leurs étoiles, tout était fait uniquement pour l'homme.

옮긴이        

이형식은 1972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불어교육과를 졸업하고 1972년부터 1979년까지 빠리4대학과 빠리8대학에서 불문학 석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9년부터 지금까지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불어교육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저서로는 ≪마르셀 프루스트−희열의 순간과 영원한 본질로의 회귀≫, ≪프루스트의 예술론≫, ≪작가와 신화≫, ≪감성과 문학≫, ≪정염의 맥박≫, ≪루시퍼의 항변≫,≪현대 문학 비평의 방법론≫(공저), ≪프루스트, 토마스 만, 조이스≫(공저), ≪프랑스 현대 소설 연구≫(공저), ≪그 먼 여름≫(장편소설) 등이 있고 역서로는 ≪외상 죽음≫(쎌린느), ≪밤 끝으로의 여행≫(쎌린느), ≪미덕의 불운≫(싸드), ≪사랑의 죄악≫(싸드), ≪철부지 시절≫(까바니), ≪미소 띤 부조리≫(사바띠에), ≪여우 이야기≫(이형식 편역), ≪트리스탄과 이즈≫(베디에), ≪중세 시인들의 객담≫(이형식 편역), ≪요정들의 사랑≫(이형식 편역), ≪농담≫(이형식 편역), ≪롤랑전≫, ≪웃는 남자≫(위고),  ≪꼴롬바≫(메리메), ≪프랑시옹≫(쏘렐) 등이 있다.



편집자 리뷰    

<관용론>의 저자로 잘 알려진 볼떼르의 소설 묶음집이다. <미크로메가스>, <세상 돌아가는 대로> 등 볼테르의 작품들을 통해 그의 기막힌 문학적 상상력과 결합된, 흔히 계몽주의로 부르는 볼테르의 사상을 확인해볼 수 있는 귀한 작품집이다. 이 소설들을 읽어보면 볼떼르가 얼마나 놀라운 상상력과 함께 뛰어난 통찰력을 지니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옮긴이의 번역 또한 소설 읽는 재미에 한몫하고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본 포스트의 저작권은 편역자와 출판사에 있으므로, 무단 전재나 재배포를 금지합니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zmanz

댓글을 달아 주세요

드니 디드로 Denis Diderot(프랑스, 1713~1784)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미지출처]www.marxists.org


저자 드니 디드로는 1713년에 프랑스 샹파뉴 지방의 수도인 랑그르에서 태어나 1784년에 파리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그는 우선 철학자라고 할 수 있는데, ≪백과전서≫의 편집을 맡아 완성하였던 대표적인 계몽주의 철학자이다. 그는 이 ≪백과전서≫를 출판하며,≪회의적인 사람의 산보≫,≪고자질장이 보석≫,≪맹인서한≫,≪벙어리와 귀머거리에 관한 편지≫,≪자연해석론≫ 등의 철학적 저서를 작성한다.

이후 그의 관심은 연극 쪽으로 옮겨지며,<사생아>와 이어서 <도르발과의 대담>,<가장>,<극시론>등을 남기는데, 이러한 작품들은 디드로가 희곡 창작뿐만 아니라 연극 이론에도 많은 관심을 보인 것을 증명한다. 이러한 작품들을 통해 그가 우리가 ‘드라마’라고 부르는 새로운 장르를 창조하게 되는 것이다.

소시민 가정을 극의 대상으로 하게 되는 이 관심은 확대되어 소설 장르로 이어진다. 친구의 소개로 처음 시도하는 예술비평인 ≪살롱≫을 작성하게 되는 1759년을 즈음하여 그의 첫 소설인 ≪수녀≫의 작성이 개시되는 것으로 보아 그의 ≪살롱≫ 작성은 소설가로서의 그의 관심에 많은 영향을 미친 것 같으며, 어쨌든 이 두 가지 서로 다른 문학 영역은 그에게서는 서로 상호적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운명론자 자크≫, ≪라모의 조카≫ 등을 통해 19세기 소설의 시대를 예견하고 그 문을 연 선구자이다.

이외에도 그는 ≪기만≫, ≪나의 오래된 실내복에 대한 유감≫, ≪부르본느의 두 친구≫, ≪이것은 콩트가 아닙니다≫, ≪달랑베르의 꿈≫, ≪코미디언에 대한 역설≫, ≪그는 호인인가? 악한인가?≫와 같은 작품들을 작성하는데 열중했다.

오늘날 예술비평을 처음으로 문학의 장르에 도입시켰다고 평가받는 디드로의 ≪살롱≫은 22년 동안 아홉 번에 걸쳐 작성되는데, 네 번째 ≪살롱≫(1765년)에는 미술에 관한 그의 첫 총합적인 시도인 ≪회화론≫이 잇따르게 된다. 미술에 관한 그의 견식은 넓어지고, 1769년에는 러시아의 여제 예카테리나 2세를 위해 다섯 점의 그림을 사기 시작하는 등 본격적으로 미술품 매수에도 참여한다.

그는 예카테리나 2세와 친분이 두터워지고, 결국 네덜란드, 독일을 거쳐 러시아로 생전 처음으로 큰 여행을 하게 된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체류한 후 1774년, 다시 함부르크를 거쳐 헤이그로 여행한 후 파리로 돌아오게 되는데, 네덜란드에 있을 때는 꽤 부지런한 시간을 보냈다. 그는 ≪엘베씨우스의 반론≫에 열중하며,≪마레샬과의 대담≫,≪군주정치≫를 집필하며,≪나카즈에 관한 관찰≫과 ≪생리학요소론≫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1775년에는 ≪러시아를 위한 대학 계획≫이 작성되었으며, 에카테리나 2세는 11월 29일 ≪러시아 연구론≫을 받고 다음해 1월 20일 ≪대학계획서≫를 받게 된다. 디드로는 자신의 도서와 수사본을 러시아 왕립도서관에 팔게 된다.

말년에는 파리 근처 세브르 등에서 집필로 많은 시간을 보낸다. 1781년에는 고향 랑그르의 시청에 우동이 조각한 디드로 흉상이 놓이며, 또 그해 그는 스코틀랜드 고고학회의 명예회원으로 선출된다.

파리, 리슐리외 거리에 있는 브종 저택 이 층에 이사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하게 되는데, 예카테리나 2세는 디드로의 과부에게 1000루블을 주도록 허락한다. 1785년, 예카테리나 2세는 자기 아버지의 수사본 총 소장품을 헌납하는 마담 드 방될(디드로의 유일한 후손)의 편지를 받게 되고, 11월 5일 디드로의 도서와 수사본들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달한다.

해설              
 

본 개론은 그 작가가 계몽시대의 대표적 철학자라는 것과, 그가 미술가 또는 미술이론가가 아닌 문인으로서 회화를 접한 후 회화에 대한 총체적인 시각을 가져본다는 데서, 그리고 이 시각이 어떤 완성된 형태가 아니고 나름대로의 완성된 시각을 가지기 위해 나아가는 중 이루어진 중간 점검이라는 데서 의미가 크다.

17세기 중엽부터 프랑스 회화와 조각 아카데미는 왕궁이 베르사이유로 옮겨 비게 된 루브르에서 매년 혹은 격년마다 미술전시회를 개최하였는데, 루브르의 거실에서 열렸기에 ‘살롱’이라 불렀다. 18세기 철학자이자 문인인 드니 디드로(Denis Diderot)는 절친한 친구 그림(Grimm)의 권유로 1759년 살롱부터 미술평 《살롱》을 쓰게 된다. 그는 단 한 번의 기획으로 회화에 관해 일목요연한 작품을 시도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회화론》으로, 미술 일반에 대한 풍부한 명상이다. 디드로는 《1765년 살롱》에서 그 부록으로 따를 이 《회화론》에 대해 욕망을 피력한다. “우리의 판단에서 가질 수 있는 신뢰할만한 모티브들을 솔직하게 전시한다는 것은 아마도 우리가 여러 가지 작품들로 만들었던 엄격한 비평을 완화하는 하나의 방법입니다. 이 결과로 우리는 감히 한 편의 보잘것없는 《회화론》을 내놓을 것이고, 감히 우리의 방식과 인식을 통해 데생과 색조, 명암, 표현, 구성에 대해 말할 것입니다.” 이 개론은 1766년 7월에 완성되었으며, 《살롱》과 마찬가지로 〈문학통신〉을 통해 간행되었다.

문인이자 철학자인 디드로가 미(美)에 대해 고민한 이 《회화론》은, 그가 비록 회화의 순수하게 기술적인 부분에서는 완벽할 수 없다 할지라도, 문학자로서의 통찰력과 철학자로서의 심오한 성찰을 통해 예술을 대했음을 보여준다. 그의 명상(冥想)은 자연에 대한 모방, 미에 대한 사상, 정열에 대한 심오한 인식 위에서 펼쳐진다. 그런데 그것들은 사실 모든 예술의 기초이다. 문학에서의 기초인 것과 마찬가지로 회화와 조각에서의 기초인 것이다.

이 작품에 대해 먼저 독일에서 응답이 있게 된다. 괴테와 실러는 감탄하고 열광한다. 1796년 12월에 괴테는 《회화론》을 읽었다. 실러는 괴테에게 열광한 자신의 심정을 토로한다. “디드로는 참말로 나를 매혹하고 내 심령 밑바닥까지 움직이게 했습니다. (...중략...) 그의 경구들의 각각이 (...중략...) 예술의 신비스러운 심오함을 조명하는 하나의 섬광과 같습니다.” 괴테는 “예술가에게보다는 아마도 작가에게 더 호소하는 마술적인 책”이라고 답한다.

그러나 1797년 8월 7일, 실러는 자신의 열광을 재검토했고 디드로의 예술 인식이 너무 교훈적으로만 이끌려진다고 비판했다. “저의 기호에 따르자면, 디드로는 예술에서의 이상한 궁극원인들에 너무 골몰하고 대상(對象)조차와 실행에 불충분하게 주의합니다.” 괴테의 말에서도 그와 비슷한 변화가 있었다. “디드로는 예술의 결과가 되는 문화가 그 고유한 길을 가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기까지 발돋움할 줄 몰랐습니다.” 일 년 후, 괴테와 실러, 그들의 공통된 언급은 명확해졌다. 디드로가 고전적인 거짓, 즉 예술과 자연의 결합이라는 영원한 거짓에 속았다는 것이다.

그가 자연을 찬양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이유는 수법을 배척하기 위해서이다. 그는 충만한 대기(大氣), 빛, 육체와 하늘의 마술을 드러내기 위해 유파와 아틀리에를 비판했다. 우의적인 것에서는 멀어지고자 했다. 그러면서, 영혼에 투영된 풍경화들, 숲들과 건축물들의 일치, 폐허들과 무덤들의 은근한 상징주의를 유발했다. 디드로의 이 미학은 비극적인 경치를 감수했고 연극적인 장면에 얼마간의 애정을 지켰다. 다시 말해, 샤르뎅 스타일의 사실주의, 즉 물질적 세계를 재생하기를 주장하는 사실주의와, 그뢰즈의 작품에서와 같이, 결과에 대한 극적인 탐구 중에서 디드로는 어느 한 가지도 선택하지 않았다.

결국 일 년 후, 《1767년 살롱》에서 디드로는 회화가 시적(詩的)이고, “화가의 태양이 우주의 태양은 아니”라고 고백하게 된다. 이는 《회화론》이 디드로가 미를 경험하는 과정에 있고 미에 대한 그의 인식의 진보에 있어 중간에 놓여있다는 것이다. 이 개론 바로 다음에 올 《1767년 살롱》이 더없이 훌륭한 미에 대한 관찰이자 예술의 세계에 대한 직관과 성찰의 작품이라는 것이고, 지금의 이 개론은 이 영광을 향한 중간 길에 놓인 매우 중요한 시론을 포함한다. 최근에 이 개론을 편집‧소개한 뽈 베르니에르도 《회화론》은 디드로가 처음으로 행한 종합적인 시도일 뿐이지만, 그것은 그가 회화를 대하는데 있어 하나의 회의론적 위기이지 퇴보는 아니라고 확인한다.

천줄 발췌라는 의무조항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디드로의 훌륭한 문장들을 파괴해야 했다. 그러나 편집이 어떤 원칙도 없는 것은 아니다. 그의 논리 및 문맥만은 살린다는 기본적인 방침 위에서, 될 수 있으면 그가 예증하려는 문장들을 생략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본문에 등장하는 ‘당신’이나 ‘친구’라는 단어들과 그에 따르는 대화체는 원래 작가의 친구인 그림(Grimm)을 향한 것이다. 본 《회화론》이 《1765년 살롱》의 부록으로 따른다고 언급했는데, 그와 마찬가지로 〈문학통신〉을 통해 간행되었고 그 편집장인 친구 그림(Grimm)에게 향한 서한 형식으로 작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대화체는 전시된 회화작품에 대해 친구에게 솔직하게 자신의 감정을 내비칠 수 있고 마음대로 ‘지껄일’ 수 있는 동시에 다른 비평가들의 비난도 화가들의 아우성에도 아랑곳하지 않을 수 있는 방식이었던 《살롱》에서와 마찬가지로 매우 능란한 수법이다. 게다가 일반 독자를 향한 친밀한 감정을 비추는 데도 한몫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즉, 디드로의 독자는 친한 친구 독자 위에 우리와 같은 일반 독자로 형성되므로 겹겹이 층을 지어 이루어져있고, 바로 그것이 솔직한 생각의 표현과 독자의 이해 및 독자와의 소통에 도움을 주는 형태라는 것이다.

2004년 벽두에 우리는 본 《회화론》의 첫 번역을 내놓았다. 지금의 천줄 발췌 번역은 그것을 꼼꼼히 되돌아보게 했다. 첫 번역에서는 참으로 많은 부분들에서 착오, 오류가 발견되었다. 나름대로 단어 하나 놓치지 않으며 저자의 의도를 살리기 위해 노력했던 점은 가상하나 그것이 오히려 독이 되었던 것 같다. 우리 말 사용도 문제였다. 문맥상 엉뚱하다 싶을 정도가 있어 되새김질의 독서가 아니면 이해하기 힘들 곳도 많았다. 우리 말의 자연스런 흐름이 되지 않음은 당연했다. 심지어 유사한 단어 스펠링에 속아 엉뚱하게 번역한 단어도 한 개 발견되었고, 반대 의미로 번역한 부분도 한 군데 있었다. 결국 우리 말 구사능력 부족에다 프랑스어 해독능력 불능은 우리를 당혹스럽게 할뿐만 아니라 좌절감을 안겨주어 역자의 존재 가치까지도 의문시하게 했다. 이 자리를 빌려 그 책의 독자들에게 용서를 구하는 일이 가능할지 모르겠으나 가능하다면 꼭 그러고 싶다. 역자의 게으름에 대해 깊이 반성한다.


역자 소개        


백찬욱
은 1960년 대구에서 태어나 영남대, 경희대에서 수학하였으며, 프랑스 파리3대학-소르본 누벨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영남대학교 불어불문학과에서 부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저서로는 ≪노인의 문화적 정체성≫(공저) 등이 있고, 역서로는 카사노바 자서전 ≪불멸의 유혹≫(공역),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한영대조)≫ 등이 있다.

본 포스트의 저작권은 편역자와 출판사에 있으므로, 무단 전재나 재배포를 금지합니다
Creative Commons License

'쉽게 찾아보기 > 화제의 고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파시즘 세균 法西斯细菌  (0) 2008/05/02
실종자 Der Verschollene  (0) 2008/04/02
회화론 Essais sur la peinture  (0) 2008/02/22
살롱 Salons  (0) 2008/02/22
사생아 프랑수아 François le Champi  (0) 2008/02/22
아엘리타 Аэлита  (0) 2008/01/23
Posted by zmanz

댓글을 달아 주세요

드니 디드로 Denis Diderot(프랑스, 1713~1784)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미지출처]www.freewebs.com


저자 드니 디드로는 1713년에 프랑스 샹파뉴 지방의 수도인 랑그르에서 태어나 1784년에 파리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그는 우선 철학자라고 할 수 있는데, ≪백과전서≫의 편집을 맡아 완성하였던 대표적인 계몽주의 철학자이다. 그는 이 ≪백과전서≫를 출판하며,≪회의적인 사람의 산보≫,≪고자질장이 보석≫,≪맹인서한≫,≪벙어리와 귀머거리에 관한 편지≫,≪자연해석론≫ 등의 철학적 저서를 작성한다.

이후 그의 관심은 연극 쪽으로 옮겨지며,<사생아>와 이어서 <도르발과의 대담>,<가장>,<극시론>등을 남기는데, 이러한 작품들은 디드로가 희곡 창작뿐만 아니라 연극 이론에도 많은 관심을 보인 것을 증명한다. 이러한 작품들을 통해 그가 우리가 ‘드라마’라고 부르는 새로운 장르를 창조하게 되는 것이다.

소시민 가정을 극의 대상으로 하게 되는 이 관심은 확대되어 소설 장르로 이어진다. 친구의 소개로 처음 시도하는 예술비평인 ≪살롱≫을 작성하게 되는 1759년을 즈음하여 그의 첫 소설인 ≪수녀≫의 작성이 개시되는 것으로 보아 그의 ≪살롱≫ 작성은 소설가로서의 그의 관심에 많은 영향을 미친 것 같으며, 어쨌든 이 두 가지 서로 다른 문학 영역은 그에게서는 서로 상호적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운명론자 자크≫, ≪라모의 조카≫ 등을 통해 19세기 소설의 시대를 예견하고 그 문을 연 선구자이다.

이외에도 그는 ≪기만≫, ≪나의 오래된 실내복에 대한 유감≫, ≪부르본느의 두 친구≫, ≪이것은 콩트가 아닙니다≫, ≪달랑베르의 꿈≫, ≪코미디언에 대한 역설≫, ≪그는 호인인가? 악한인가?≫와 같은 작품들을 작성하는데 열중했다.

오늘날 예술비평을 처음으로 문학의 장르에 도입시켰다고 평가받는 디드로의 ≪살롱≫은 22년 동안 아홉 번에 걸쳐 작성되는데, 네 번째 ≪살롱≫(1765년)에는 미술에 관한 그의 첫 총합적인 시도인 ≪회화론≫이 잇따르게 된다. 미술에 관한 그의 견식은 넓어지고, 1769년에는 러시아의 여제 예카테리나 2세를 위해 다섯 점의 그림을 사기 시작하는 등 본격적으로 미술품 매수에도 참여한다.

그는 예카테리나 2세와 친분이 두터워지고, 결국 네덜란드, 독일을 거쳐 러시아로 생전 처음으로 큰 여행을 하게 된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체류한 후 1774년, 다시 함부르크를 거쳐 헤이그로 여행한 후 파리로 돌아오게 되는데, 네덜란드에 있을 때는 꽤 부지런한 시간을 보냈다. 그는 ≪엘베씨우스의 반론≫에 열중하며,≪마레샬과의 대담≫,≪군주정치≫를 집필하며,≪나카즈에 관한 관찰≫과 ≪생리학요소론≫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1775년에는 ≪러시아를 위한 대학 계획≫이 작성되었으며, 에카테리나 2세는 11월 29일 ≪러시아 연구론≫을 받고 다음해 1월 20일 ≪대학계획서≫를 받게 된다. 디드로는 자신의 도서와 수사본을 러시아 왕립도서관에 팔게 된다.

말년에는 파리 근처 세브르 등에서 집필로 많은 시간을 보낸다. 1781년에는 고향 랑그르의 시청에 우동이 조각한 디드로 흉상이 놓이며, 또 그해 그는 스코틀랜드 고고학회의 명예회원으로 선출된다.

파리, 리슐리외 거리에 있는 브종 저택 이 층에 이사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하게 되는데, 예카테리나 2세는 디드로의 과부에게 1000루블을 주도록 허락한다. 1785년, 예카테리나 2세는 자기 아버지의 수사본 총 소장품을 헌납하는 마담 드 방될(디드로의 유일한 후손)의 편지를 받게 되고, 11월 5일 디드로의 도서와 수사본들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달한다.

해설             
 

18세기 프랑스를 대표하는 철학자 중 한 명인 드니 디드로(Denis Diderot)는 이 계몽시대의 가장 위대한 작품이라는 ≪백과전서≫의 책임 편집자로도 유명하다. 이외에도 그는 희곡작가, 연극이론가이자 ‘드라마’라는 장르의 창시자, 소설가, 콩트 작가, 예술비평가이다.

특히 그는 1759년부터 1781년까지의 미술비평작품인 ≪살롱(Salons)≫을 통해 ‘예술비평의 아버지’로 불리는데, 그것은 그가 예술비평이라는 장르를 처음으로 문학에 도입시켰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가 ≪백과전서≫의 철학적인 마지막 항목들을 완성한 1759년, 막역한 친구인 그림(Grimm)이 그에게 ≪문학통신≫에, 문학에서는 새로운 영역인 예술비평을 쓰도록 제안한다. 17세기 중엽, 프랑스 회화·조각 아카데미는 매년 또는 격년으로, 왕궁이 베르사유(Versailles)로 옮겨가 비게 된 루브르(Louvre)의 응접실에서 미술전시회를 열었다. 독일 출신으로 프랑스에서 활동한 철학·정치·문예지 ≪문학통신≫의 편집장 프리드리히ᐨ멜히오르 그림(Fridrich-Melchior Grimm) 남작은 이 전시회를 비평하다 별 신통치 못함을 스스로 깨닫게 되어 친구 디드로에게 이 일을 맡긴다.

디드로는 친구의 간청에 응하며 여태까지 누구도 해보지 않았던 시도인, 화가들의 말을 번역하는 실험을 해본다. 이 실험에 있어 우선 그림에 대한 묘사가 문제이다. 그림(Grimm)이 발행했던 ≪문학통신≫은 국외로 보내져야만 하는 것이었다. 삭스ᐨ고타의 공비나 러시아의 여제 예카테리나 2세 같은 유럽 왕궁의 사람들이 예탁했던 문예지였던 것이다. 다시 말해, 이것은 디드로의 그림묘사가 파리(Paris)의 루브르에 전시되는 그림들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는 의미이다. 글로 그들의 눈에 그림들을 전시해야 하므로 디드로는 그림들의 전체 효과를 그들의 시야에 펼치기 위해 그림 묘사를 일화, 여담, 희곡, 콩트, 편지로 만든다.

살롱(salon)은 큰 저택의 ‘응접실’이라는 뜻을 가진 프랑스어의 일반 명사이지만, 고유명사로서는 두 가지가 지칭되는데, 한 가지는 17세기와 18세기에 철학자, 문인, 학자, 예술가 등이 모여 대화와 토론을 나누었던, 주로 부인들의 응접실을 지시하고, 두 번째는 언급했다시피, 루브르의 응접실에서 열렸던 미술전시회를 가리킨다. 디드로도 간편하게 ‘살롱’이란 단어로 자기 글의 제목을 붙이고 있는데, 그것은 미술작품들에 대한 비평이기도 하지만 미술전시회에 대한 보고이기도 하여 저널(journal)적 성격을 지닌다. 그림들이 걸린 루브르의 입체적 공간에다 어떤 담소가 있는 공간이 포괄되어 암시되는 것이다.

이런 데서는 관람자들의 감동, 칭찬이나 비난, 날카로운 비평이 빠질 수 없다. 관람자들 중에는 애호가들뿐만 아니라 매우 전문적인 사람들도 포함된다. 화가들이나 그 보호자들 말이다. 디드로는 여담과 일화를 통해 그들 모두를 자신의 화평 속에 불러들여 자신의 독자들에게 루브르의 따분한 칸막이를 벗어나게 한다. 우리는 디드로의 ≪살롱≫을 통해 18세기 당시의 루브르와 이 전시회장을 둘러싼 온갖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관람자들의 느릿한 겉치레나, 또는 그들 의복의 매끄러운 비단과도 같이 작품들을 대하는 냉담한 모습을 접할 수 있다. 또 혹은 안절부절못하거나 일부러 초연한 태도를 보이는 예술가들과도 만날 수 있다.

당시는 17세기에 아카데미의 원장이었던 르 브랭이 만들었던 화가의 구별 규정을 지키고 있었다. 역사화가와 종교화가는 아카데미 교수나 교장이 될 수 있다. 이와는 달리 풍경화가나 정물화가와 같은 풍속화가가 될 수 있는 최고의 지위는 루브르 전시회에서 그림들의 위치를 선정하는 데 대한 전권을 가진 ‘타피스리 제작자’이다. 1761년부터 타피스리 제작자는 샤르댕이었는데, 그는 좋은 그림을 살리고 나쁜 그림을 죽이는(?) 데 능했던 그림 위치 선정자였다. 디드로는 자신의 ≪살롱≫에서 샤르댕의 이 안목을 지극히 능란하게 활용한다.

디드로는 ≪살롱≫을 통해 화가 라 투르의 성격이 급했고 경멸적이었다는 것까지 알려준다. 또 루브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