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무 Reigen

분류없음 2008/07/10 08:29

아르투어 슈니츨러 Arthur Schnitzler (오스트리아, 1862~1931) 
아르투어 슈니츨러(Arthur Schnitzler, 1862∼1931)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부유한 유태인 의학교수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그 역시 의학을 공부한 의사였다. 1886년부터 병원에서 일했으며 1893년부터 개업했으나, 생의 대부분을 작가로 활동했다. 작가 초기에는 주로 희곡을 집필했으며, 휴고 호프만슈탈(Hugo von Hofmannsthal, 1874∼1929)과 친구였고, 스스로 자신의 ‘정신적 도플갱어’라고 부르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적 기법을 많이 사용했다. 대표적인 희곡으로는 <아나톨(Anatol)>, <사랑의 유희(Liebelei)>, <윤무(Reigen)>, <광활한 땅(Das weite Land)>, <베른하르디 교수(Professor Bernhardi)>를 들 수 있다. 만년에는 희곡보다 소설을 썼으며 대표적인 단편소설로는 <구스틀 소위(Leutnant Gustl)>, <엘제 양(Fräulein Else)>, <야외로 가는 길(Der Weg ins Freie)> 등이 있다.

 그는 오랫동안 도나우 왕정의 퇴폐를 묘사하는 작가로 낙인 찍혔으며 모든 작품에서 당시 세기말 빈의 분위기를 묘사하고 있어 풍속 묘사가로, 그의 문학은 오락문학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슈니츨러의 문학에 대한 이러한 평가절하는 무대를 사회비판의 장으로 바꾸어놓기는 하지만 구체적으로 사회변혁을 추구하고 있지는 않다는 인식 때문이다. 1960년이 지나서야 슈니츨러는 사회전통의 압박, 소외, 고독, 자유와 헌신, 거짓과 실제에 대한 갈등을 예리하게 분석하는 작가로 평가되었으며 체호프처럼 위대한 인간묘사가의 한 사람으로 인식되었다.

 1914년까지 슈니츨러는 오토 브람(Otto Brahm)의 연출로 빈 부르크테아터뿐만 아니라 베를린극장에서도 가장 많이 상연된 희곡작가에 속한다. 슈니츨러는 1931년 사망할 때까지 멸망한 사회의 연대기 작가로 평가받았는데 이는 그가 뒤늦게 단편소설 쪽으로 방향을 돌렸기 때문이다. 1960년경에야 비로소 극장 감독으로 활약하고 있는 아들 하인리히 슈니츨러의 도움으로 슈니츨러의 르네상스가 시작되었다.

 

해설         
국내 최초 번역입니다.
이 작품은 원전의 분량이 많지 않으므로 발췌하지 않고 모두 번역하였습니다.

이 책은 피셔(Fischer)출판사에서 2000년에 나온 ≪Reigen, Liebelei≫ 23∼102쪽을 옮긴 것입니다.
작품해설을 위해서는 귄터 륄러(Günther Rühler)와 리하르트 알레빈(Richard Alewyn)의 글을 참조했습니다.

<윤무>는 1897년에 완성되었으며 창녀와 군인, 군인과 방 청소하는 하녀, 하녀와 젊은 남자, 젊은 남자와 젊은 여자, 젊은 여자와 남편, 남편과 귀여운 소녀, 귀여운 소녀와 작가, 작가와 여배우, 여배우와 백작, 백작과 창녀라는 10개의 대화로 구성되어 있다. 슈니츨러는 1900년에 이 작품을 자비로 200권을 인쇄하여 비매품으로 친구들에게 나누어주었고 친구들은 이 작품에 대해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한다. 루돌프 로타어(Rudolf Lothar)는 이 작품의 은밀한 매력을 열렬한 기쁨으로 읽었으며, 사랑의 헐떡거림에서 인간본성의 비꼬임을 재빨리 간파한 알프레트 케레(Alfred Kerre)는 이 작품의 ‘야릇한 힘’을 슈니츨러의 새로운 문학경향으로 보았다. 원래 이 작품은 <사랑의 윤무>였는데 케레가 <윤무>라고 하는 게 좋다고 해서 제목을 줄였다고 한다. 케레는 슈니츨러의 이 작품을 ‘소 데카메론’이라고 명명하기도 했다.

1903년 빈에 있는 한 출판사에서 이 <윤무>를 초판에 4만 부나 찍어 슈니츨러를 유명하게 만들었으나, 새로운 오해에 처하기도 했다. 펠릭스 잘텐(Felix Salten)은 ‘아르투어 슈니츨러와 윤무’라는 글을 썼는데 슈니츨러는 이 친구의 글에서 자신이 대중작가로 평가받은 사실에 분노했다. <윤무>는 1904년 독일에서 출판 금지되었으나 출판 금지 후 은밀하게 전파되어 <윤무>에 대한 패러디까지 나오면서 ‘알려지지 않은 유명한 책’이 되었다. 오스트리아 빈에서는 1908년부터 벤야민 하르츠(Benjamin Harz)출판사가 <윤무>를 다시 출판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검열 규정이 오스트리아보다 엄격한 독일에서는 어느 출판사도 이 책의 출판을 시도하지 않았다. 1931년에 와서 피셔출판사가 이 책을 출판하게 되었으며, 101번째로 출판된 이<윤무>는 작가의 서문 없이 출판하도록 압력을 받았다. 이 작품에 대한 슈니츨러의 해설이 민족사회주의로 인해 강력해진 반유태주의를 자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이는 <윤무>의 공연사와도 연관이 있었다. 비매품으로 찍어 친구들에게 준 작품에 대한 논란 때문에 1897년 슈니츨러는 자신의 <윤무>는 상연할 수 없는 것이라고 선언했다. 1903년 6월 25일 독일에서 처음으로 이 책을 공식적으로 구할 수 있게 되자 뮌헨에 있는 아카데미 드라마협회는 4·5·6장만 상연했으며, 1912년에 비로소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헝가리어로 초연을 할 수 있었다. 1918년 이후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검열이 사라졌으나 자칭 ‘도덕 방어자’라는 사람들의 반대는 사라지지 않았다.

검열의 종말과 함께 ‘은밀한 스캔들 작품’의 상연권을 얻기 위하여 지원자들이 줄을 섰는데 막스 라인하르트(Max Reinhardt)가 그들 중 한 사람이었다. 트리아노 극장, 야한 프랑스 해학극을 상연하는 극장도 이 극을 원했는데, 이는 <윤무>의 딜레마를 보여주는 점이다. 라인하르트는 1920년 초 이미 베를린을 정리하고 가을에 빈으로 갔으며, 베를린에서는 게르트루트 아이졸트(Gertrud Eysoldt)가 이 극의 상연권을 가지게 되었다. 책이 출간된 지 23년 만인 1920년 12월 23일, 베를린 국립음악대학 내의 샤우슈필하우스에서 처음으로 독일어로 공연되었다. 그러나 배우 아이졸트가 보여준 용기는 그 대가를 톡톡히 지불해야 했다. 이날 오후 대학본부는 이 건물 안에서는 “도덕적 종교적 정치적 혹은 예술적인 이유에서 자극적인 작품은 상연할 수 없다”는 대관 계약조항을 내세웠고, 대법원은 텍스트의 도덕성 때문에 공연을 금지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이날 오후 극장주인 막시밀리안 슬라데크 (Maximilian Sladek)와 여배우 아이졸트는 6주 구금이라는 위협에도 불구하고 공연을 강행했으며, 공연 자체는 방언으로 쉽게, 분위기는 안전하게, 방해자들에게는 어떤 반격의 빌미도 제공하지 않았다. 이 공연에는 국립재판소의 재판관과 지방재판소의 고문들도 참석했으나 이들조차 이 공연이 도덕성을 망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이 작품은 1921년 1월 3일 공연금지에서 풀려났으며 공연 마지막 날까지 매일 공연을 볼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이 초연이 있은 후 베를린 경찰청 음란 방지를 위한 핵심 자리에 있던 독일 민속학 교수 에밀 브루너(Emil Bruner)는 이 작품을 베를린 검찰청에 고발했다. 그는 이 상연을 하나의 스캔들로 간주했으며 이렇게 형사소송이 시작되고 ‘윤무 소송’이라는 이름과 함께 이 작품의 공연 역사가 시작되었다.

 이와 더불어 오스트리아에서도 심한 반대를 가져오게 되었다. 도덕성에 대한 염려로 인해 새로이 검열위원회가 소집되었고 시험공연이 있었다. 1921년 2월 1일 빈에서 시험공연이 있을 때 슈니츨러도 만족감을 보였고 비평가들은 비도덕성에 대해 아무런 반론도 제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집권당인 기독교사회당은 유태인 문학의 영향에 대하여 언급했으며 이 작품을 결국 ‘사창가 작품’이라고 명명했다. 가톨릭 단체는 ‘반 윤무 위원회’를 소집했으며 공연에 대해 경고했다. 2월 16일 공연에는 극장 내에서 반대파들과 이를 보려온 사람들 사이에 충돌이 있었고 마침내 공공의 안정을 위하여 공연금지라는 조치가 뒤따랐다. 1922년 3월 7일 <윤무>는 경찰청의 보호 하에 공연이 재개되었으며 6월 30일 마지막 공연을 마쳤다.

1921년 베를린의 <윤무>에 대한 형사소송은 무죄로 판결이 났으나 빈 극장에서 난투극을 직접 체험한 슈니츨러는 자신의 작품이 오해를 받는다는 사실과 반유태적 증오감을 불러일으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1922년 모든 공연을 거부했다. 저작권 때문에 그 후 <윤무>는 어느 무대에서도 공연될 수 없었다. 슈니츨러가 사망한 후 아들 하인리히는 이를 유언처럼 받아들였고 <윤무>는 1982년 1월 1일에 비로소 무대에 올려질 수 있었다. 이후 새로운 연출이 쌓이고 쌓였으며 <라 롱드(La Ronde)>라는 제목으로 프랑스에서는 영화화되기까지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2006년에 <라 롱드>라는 제목의 뮤지컬로 공연되었다.



차례         
해설
지은이에 대해

본문

옮긴이에 대해

 

본문중에서   
Der junge Herr:
Das Leben ist so leer, so nichtig―und dann,―so kurz―so entsetzlich kurz!
Es gibt nur ein Gĺück… einen Menschen finden, von dem man geliebt wird―

젊은 남자:
삶이란 이렇게 공허하고 이렇듯 허무하고 그리고 이렇듯 짧고-이렇듯 끔직하게 짧소소!
단 하나의 행복만 존재하지… 사랑해 줄 사람을 발견하는 일-

 

나오는 사람들  
창녀
군인
하녀
젊은 남자
젊은 여자
남편
귀여운 소녀
작가
여배우
백작



출판사서평   
<윤무>가 1921년 오스트리아에서 초연됐을 때 외설 혐의로 재판에 회부됐을 만큼 등장인물들은 노골적이고 원색적인 대사를 주고받는다. 하지만 이 작품이 당시에 그토록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이유는 작품의 외설시비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을 묘사하는 정확성 때문이었다. 독자들은 실낱같은 사랑의 희망을 때문에 끊임없이 다른 누군가를 찾아 헤매는 열 쌍의 연인들의 모습을 통해서 현대인이 가진 불안과 모순, 섹스로의 도피를 폭로하는 그 묘사의 정확성에 감탄하게 될 것이다.

 


옮긴이    
최석희는 대구가톨릭대학교 독어독문학과에 재직 중이다. 저서에는 ≪Die unverkaufte Braut≫, ≪그림동화의 꿈과 현실≫, ≪독일어권 여성작가≫(공저), ≪독일문학 그리고 한국문학≫이 있으며 역서에는 ≪힌체와 쿤체≫, ≪오를레앙의 처녀≫, ≪겐테의 한국기행≫, ≪메시나의 신부≫, ≪늑대가 돌아온다≫, ≪내 동생≫ 등 다수가 있다.



별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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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뒤렌마트Friedrich Dürenmatt (독일, 1921~1990)
프리드리히 뒤렌마트(1921∼1990)는 스위스 태생의 독일어권 작가로서 전후 가장 위대한 드라마 작가로 평가된다. 뒤렌마트의 작품은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영화화 되는 등 세계적인 성공을 거두었으며 사무엘 베케트나 오이게네 이오네스크와 더불어 현대 속의 고전 작가로 인정받는다.

뒤렌마트는 희비극의 장르를 발전, 정착시켰으며 신과 인간 구원의 문제, 자유와 정의의 문제 등 철학적 테마를 독특한 드라마 기법을 사용해서 지속적으로 분석하고 실험한 작가다. 뒤렌마트는 자신이 관찰하고 성찰한 것을 그로테스크, 패러독스, 풍자와 아이러니, 유머를 통해 희극화 함으로써 관객의 쓴 웃음과 성찰을 자아내는 데 특별한 기량을 보였다. 그는 어떤 영웅적 결단도 내릴 수 없는 현대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반성 외에는 없다는 신념의 소유자였다. 뒤렌마트는 항상 작품을 통해서 시대의 문제에 정열적으로 반응했고, 시대를 비추는 거울을 받쳐 드는 비평가적인 면모를 보여 주었다.

뒤렌마트는 매 작품마다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기발한 착상으로 관객과 독자의 흥미와 긴장을 고조시키는 데 탁월한 역량을 보였다. 로마를 멸망시키기 위해 집권한 로무르스, 장님만이 볼 수 있다고 주장하는 장님 공작, 자신이 발견한 과학 원리를 은폐하기 위해 정신 병원에 입원하는 물리학자, 자살을 기도하지만 죽지 못하는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결혼에 대해 살인죄의 형량을 내리는 검사, 정의를 돈으로 사겠다는 노부인, 환경 미화원이 되어버린 헤라클레스 등등의 역발상들은 유머와 결합되어 관객이나 독자들의 통념적 사고의 틀을 깬다.

1940년부터 뒤렌마트는 집필 활동을 시작했으나 1947년에야 본격적인 작품 활동의 소산인 드라마 <쓰여져 있느니라>를 출간했다. 그 후 <장님>(1948) <로무르스 대제>(1949), 범죄 소설 ≪판관과 형리≫(1951) ≪혐의≫(1952)를 발표했다. 1952년에는 기독교 신앙의 코메디라고 불리는 <미시시피 씨의 결혼>을 발표했다. 그가 독자들의 호응을 받은 작품들은 <로무르스 대제>나 <미시시피 씨의 결혼>과 같은 문학적 가치가 높은 작품이 아니라 그의 탐정소설이었다. 경제 사정이 악화되자 쓰기 시작한 탐정소설들은 미국과 영국에서 많은 인기를 끌었으며 교과서에 실리기까지 했다. 1953년에 <천사, 비빌론에 오다> 를 발표한 이후 1956년에 상연된 <노부인의 방문>은 뒤렌마트에게 세계적인 성공을 안겨 주었으며 영화로 만들어 지기도 했다. <프랑크 5세>(1959)이후에 발표된 <물리학자들>(1962)은 <노부인의 방문>과 더불어 세계적인 성공을 거두어 뒤렌마트에게 세계적인 작가로의 기반을 굳혀 주었다. 이후 뒤렌마트는 브레히트 이후 가장 뛰어난 독일어권 작가로 인정받게 된다. 이미 1954년 라디오 드라마로 발표되었던 <헤라클레스와 아우기아스의 외양간>을 1963년에 연극 대본으로 개작해서 무대에 올렸다. 드라마 외에도 뒤렌마트는 <이중인간>(1946) <경멸받는 인간과의 밤의 대화>(1952), <고장>(1955)등 여덟 개의 방송극을 집필했다.

1970년대에 나온 대표작으로는 <지구의 초상화>, <공범>, <유예>등의 드라마가 있다. 1977년 이후 뒤렌마트는 자신의 이념을 표현하기에 드라마가 적합한 수단이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해서 드라마 집필을 중단하고 주로 산문 작품에 몰두해서 <사법기관>(1985), <주문>(1986) <헝클어진 골짜기>(1989)등을 집필했다. 특히 1970년대에 그의 작품들은 독일어권 국가에서 베스트셀러의 자리를 꾸준히 유지했으며 특히 독일에서 무대에 가장 많이 오르는 작품으로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또한 문학계는 뒤렌마트를 현대의 고전작가로, 60세에 신화가 되어버린 존재라고 최고의 찬사를 던졌다.

작품 활동 외에도 뒤렌마트는 핵무기를 반대하고 고르바초프의 개방정책을 지지하는 등 세계 평화 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1990년 12월 14일 노이샤텔에 있는 저택에서 심장마비로 영면했다.



해설         

이 작품은 원전의 분량이 많지 않으므로 발췌하지 않고 모두 번역하였습니다.
이 책은 디오게네스 출판사가 출간한 ≪Herkules und der Stall des Augias≫(1980)을 원전으로 사용하였습니다.

뒤렌마트는 1954년 라디오 드라마로 발표했던 <헤라클레스와 아우기아스의 외양간>을 1963년에 연극 대본으로 개작해서 무대에 올리고 다시 1980년에 개작해서 발표했다. 이 책은 1980년에 개작되어 디오게네스 출판사에서 출판한 개정판을 완역한 것이다.

이 작품은 헤라클레스의 열두 개의 노역 가운데 다섯 번째에 해당하는 아우기아스의 외양간지기에 관한 패러디가 주요 내용이다. 그리스 신화의 등장 인물 중 지상에서 가장 힘이 센 영웅으로 알려진 헤라클레스는 제우스 신과 인간 알크메네 사이에서 태어난 반신반인(半神半人)이다. 헤라클레스는 그가 행한 열두 개의 노역(勞役)으로 유명한데 그가 왜 노역을 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신화학자들 사이에 이견이 있다. 그러나 헤라클레스의 노역의 배경에는 제우스의 아내인 헤라의 간계가 작용했다는 점은 신화학자들의 공통된 견해이다. 헤라는 남편인 제우스와 다른 여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헤라클레스를 용납할 수 없었다. 헤라가 헤라클레스에게 한 복수는 그녀가 제우스의 혼외자식에게 했던 복수들 중에서 가장 치열하고 집요한 방식이었다.

뒤렌마트는 이 작품에서 전 그리스인의 경탄과 찬사를 받았던 헤라클레스를 몰락한 소시민적 부르주아로 탈바꿈시킨다. 헤라클레스는 일반 시민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생업에 종사하는 직업인일 뿐이다. 이 작품 속에서 헤라클레스의 노역은 그리스의 신화와는 정반대로 하나도 성취되지 못한다. 신화에 나오는 노역은 일감, 직업과 동일시되며 헤라클레스는 사례금을 받아 아내를 부양해야 하는 가장으로 등장한다. 헤라클레스는 부채를 갚기 위해 엘리스 국의 쓰레기를 치우는 노역을 하게 된다. 쓰레기 치우는 일 따위는 수치스럽게 생각하는 헤라클레스가 외양간지기가 되기로 결심을 한 이유는 애인 데이아네이라가 빚을 갚기 위해 매춘을 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쓰레기에 매몰되기 직전인 엘리스국은 쓰레기 처리를 위해서 헤라클레스를 고용한다. 돈을 벌기 위해서 쓰레기 처리에 나선 헤라클레스는 쓰레기를 강물로 쓸어버리려고 하지만 수자원국이 제동을 건다. 헤라클레스에게 엘리스 인들이 계속 관청의 허가를 받을 것을 요구하자 의욕을 상실한 헤라클레스는 결국 쓰레기 처리에 실패한다. 이렇게 뒤렌마트는 제도와 규제에 얽매어 아무 것도 성취할 수 없게 만드는 관료주의의 병폐를 풍자한다.

이러한 풍자는 쓰레기 문제를 논의하는 시의회 장면에서 의원들이 각자 상이한 의견과 주장을 내놓자, 그 주장과 의견을 검토하기 위해서 또 다른 위원회가 구성되는 부분에서 절정을 이룬다. 또한 하나의 목표를 세웠으나 다양한 이유로 그 목표를 포기해버리는 민주 국가체제에 대한 풍자도 엿볼 수 있다. 민주주의 체제가 복지부동의 관료주의 체제로 경직되면 결국 공허한 토론과 아무런 성과도 이루지 못하는 행정체계를 존속시킬 뿐임을 보여준다. 인간이 만들어 낸 제도와 기구를 인간이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제도와 기구가 인간을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또 아우기아스를 통해 법치국가에 대한 풍자가 드러나는데 아우기아스는 목표 달성과는 상관없이 오직 민주국가의 법을 준수하는 것이 최우선임을 강조한다. 따라서 상황의 개선이나 목표 달성과는 배치되는 법치민주주의 원칙만을 고수 하려는 것이 얼마나 모순인가를 보여준다.

쓰레기 처리의 실패로 더욱 궁핍하게 된 헤라클레스는 서커스에서 힘 자랑으로 돈을 벌려고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다. 헤라클레스는 강한 육체적 힘을 가졌지만 정작 그 힘은 빚을 갚고 생계를 유지하는데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한다. 기술 자본주의 경제 체제하에서 그의 육체적 힘은 효용가치를 잃었다. 총알 하나가 헤라클레스의 힘을 대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엘리스의 대통령인 아우기아스는 여러 면에서 뒤렌마트의 또 다른 희극 <로무르스 대제>의 로무르스를 연상시키는 인물이다. 로무르스가 로마를 멸망시키기 위해 양계(養鷄) 외에는 어떤 일도 하지 않으려는 현자이듯이 아우기아스는 감춰진 영웅으로서 자신의 영토 내에서 개인이 이룰 수 있는 최상의 것을 성취하는 뒤렌마트적인 용감한 인간이다. 아우기아스는 인간으로 가능한 것을 개인적 영역에서 쓰레기 더미를 자신의 정원으로 만들면서 성취한다. 아우기아스는 쓰레기 더미가 된 국가는 더 이상 변화하거나 개선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사적인 영역에서 스스로의 노력으로 작은 파라다이스를 건설한다.

이 작품 속에는 법치국가와 관료주의에 대한 풍자 외에도 학벌, 통신 기밀, 흥행 산업 등 현대사회의 제반현상에 대한 풍자가 나온다. 헤라클레스의 비서인 포리비오스는 헤라클레스의 폭력으로 세 번이나 사지가 부러진 경험이 있지만, 헤라클레스의 곁을 떠나지 못하고 그의 비서직을 수행한다. 왜냐하면 포리비오스는 대학 졸업장이 없어서 다른 곳에 취직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생명을 잃을지언정 직장을 그만둘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를 통해 뒤렌마트는 학벌 위주의 사회를 풍자한다.

이상 언급한 모든 풍자는 결국 영웅을 풍자하기 위한 배경적인 것이고, 근본적인 풍자는 영웅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영웅에 대한 풍자를 통해 영웅이 몰락하고 소멸할 수밖에 없는 시대가 왔음을 강조한다. 힘과 영웅은 시대와 더불어 변화한다. 헤라클레스의 무서운 괴력은 기술 자본주의 산업시대의 직업인에게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헤라클레스가 물리쳐야 할 거대한 괴물들은 환경보호제도에 맡겨졌으며 도둑 기사들은 정치계에 유입되었기 때문에 헤라클레스는 직업의 근간을 잃게 되고 엘리스 국의 청소나 스팀팔리엔의 새 떼 소탕작업에 투입된다.

이 작품의 드라마적 구상은 뒤렌마트 자신의 세계관의 시적 표현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는 세계 자체를 하나의 괴물로 생각했다. 따라서 극 속에 등장하는 쓰레기, 관청, 인간들은 헤라클레스가 극복해야 할 괴물들이다. 괴물의 하나인 쓰레기를 처치하려는 헤라클레스의 노력은 또 다른 괴물인 관청과 새로운 것에 두려움을 갖는 인간들에 의해 좌초된다.

영웅은 뒤렌마트적인 용감한 인간으로 대체되고 아우기아스처럼 쓰레기 더미 위에 정원을 만드는 일이 뒤렌마트적 용감한 인간의 과업이다. 뒤렌마트는 용감한 인간형을 제시하는 것을 그의 작품의 중요한 과제로 삼아 반 영웅의 시대에 영웅을 대체하고 있다. 뒤렌마트의 용감한 인간은 무의미로부터 의미를 산출해서 인간의 가슴 속에 세계 질서를 다시 세우는 사람이다.

 

차례         
해설
지은이에 대해

헤라클레스와 아우기아스의 외양간

옮긴이에 대해

 

본문중에서   
Die Gnade, daß unsere Welt sich erhelle, kannst du nicht erzwingen, doch die Voraussetzung kannsr du schaffen, dasß die Gnade-wenn sie kommt- in dir einen reinen Spielgel finde für ihr Licht.

우리의 세계를 밝혀줄 은총을 너는 강요해 받을 수 는 없다. 하지만 은총이 내려온다면 네 속에서 빛을 위한 순수한 거울을 발견할 수 있도록 적어도 전제조건은 만들어 놓아야 한다.

 

나오는 사람들
헤라클레스: 민족 영웅
데이아네이라: 헤라클레스의 애인
포리비오스: 헤라클레스의 비서
아우기아스: 엘리스국의 대통령
필로이스: 아우기아스의 아들
이올레: 아우기아스의 딸
캄비세스: 외양간 머슴
리카스: 우편배달부
탄타로스: 서커스 단장
열 명의 의원들
두 명의 무대 인부들


출판사서평  
38만 청년 실업시대, 신화 속 영웅 헤라클레스도 취업난을 피할 수 없다. 실직자가 된 그는 빚을 갚기위해 동분서주한다. 외양간 쓰레기 치우기, 서커스에서 차력쇼 하기, 새떼 쫓기 등 가리지 않고 닥치는대로 일하지만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뒤렌마트는 신화 속 인물들을 처절하고 남루한 현실로 끌고 들어옴으로써 존재하기 위해 투쟁해야 하는 현대인의 지친 삶을 풍자한다.


옮긴이       
황혜인은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독문과를 졸업하고 독일 마인츠 대학에서 독문학마기스터 학위를 취득했다. 마인츠 대학을 졸업한 후에 독일 본 대학교에서 독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동국대학교 독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요 저서와 논문으로는 ≪뒤렌마트의 희비극≫(자연사랑, 2004), <알프레드 되플린과 헤르만 카삭 비교연구>, <그릴팔쪄 연구>, <괴테와 쉴러>, <레씽의 에밀리아 갈로티 연구>, <브레히트의 갈릴레이의 생 연구> 외 다수가 있다. 역서로는 ≪천사 바빌론에 오다≫(책세상, 2007), ≪사포≫(박이정, 2005), ≪메데아≫(박이정, 2007)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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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자 미상 (한국, ? ~ ?) 

 
해설         
이 책은 1905년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되는 국립도서관 소장 완판 <심쳥젼> 71장본을 원전으로 하여 현대문으로 고쳐 썼습니다.
 
장황한 사설이나 삽입 가요의 일부를 축약하거나 생략한 것 외에는 원문을 그대로 살려 적었습니다.

 
1.<심청전>은 어떤 작품인가?
<심청전>은 <춘향전>과 함께 많은 독자들에게 사랑을 받으며 읽혀졌던 고소설 작품이다. 그런데 이 작품의 작자는 알려져 있지 않다.

이 작품의 주인공 심청은 가난한 심 봉사의 딸로 태어나서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눈먼 아버지의 보살핌으로 자란 뒤에 아버지를 지성으로 모셨다. 심청은 공양미 300석을 부처님께 바치면 아버지가 눈을 뜰 수 있다는 말을 듣고, 항해의 안전을 기원하는 제의의 제물로 자기 몸을 팔았다. 심청은 인당수에서 물에 빠졌는데, 심청의 효성에 감동한 용왕은 심청을 연꽃에 태워 다시 인당수로 보냈다. 그때 마침 이곳을 지나던 뱃사람들이 이 연꽃을 임금님께 바쳤다. 연꽃에서 나온 심청은 왕과 혼인하였다. 왕비가 된 심청은 고향을 떠나 떠도는 아버지를 찾기 위해 맹인 잔치를 열었는데, 맹인 잔치에 온 아버지는 딸을 만나자 반가움과 놀라움에 눈을 떴다.

 <심청전>에서 아버지를 위하여 자기의 모든 것을 바친 심청의 효성은 많은 사람을 감동시켰다. 그리고 하느님과 부처님·용왕을 감동하게 했다. 그래서 이적(異蹟)이 일어나 죽었던 심청이 다시 살아나고, 왕비가 되어 눈을 뜬 아버지와 행복을 누린다. 이 이야기에서 효는 사람이 지켜야 할 최고의 도덕적 가치로 여겨지고, 이를 실천하면 사람과 신은 물론 동식물까지도 감동하게 된다. 그래서 이적을 일으켜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믿는 한국인의 의식이 바탕에 깔려 있다.

 이 작품은 조선 후기에 형성되어 많은 독자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이 작품은 지금도 고소설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널리 읽혀지고 있다. 이 작품은 우리의 민족 예술이라고 하는 판소리로도 불려진다. 또 창극, 영화 등으로 재구성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이 작품은 여러 외국어로 번역되어 다른 나라에도 널리 알려졌다. 1972년에는 독일에서 <오페라 심청전>이 공연되어 절찬을 받기도 하였다.

 
2.<심청전>은 어떻게 전해오는가?
<심청전>은 필사본(筆寫本), 판각본(板刻本), 활자본(活字本)으로 전해오는데, 모두 80여 종이 된다. 판각본은 ‘한남본 계열’, ‘송동본 계열’, ‘완판본 계열’로 나눌 수 있다.

‘한남본 계열’은 간소한 내용을 단순하고 차분하게 구성하였다. 문체는 간결하고 소박한 산문체로 되어 있다. 배경은 명나라 시대의 남군 땅으로 되어 있다. 등장인물 중 심 봉사의 이름은 ‘심현’, 그의 처는 ‘정씨’라고 하였다. 한남본 계열의 이본에는 장 승상 부인, 뺑덕 어미, 안씨 맹인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다.

‘송동본 계열’은 문장이 율문체로 되어 있다. 배경은 송나라 시대의 황주 도화동으로 되어 있다. 심 봉사의 이름은 ‘심학규’, 그의 처는 ‘곽씨’라고 하였다. 여기에는 곽씨 부인이 아기를 갖게 해달라고 비는 이야기, 심 봉사가 순산과 아기의 장래를 축원하는 이야기, 뺑덕 어미 이야기, 안씨 맹인 이야기 등 한남본 계열에 없는 내용이 첨가되어 있다. 이런 내용은 뒤에 나온 완판본과 활자본에 그대로 들어 있다.

‘완판본 계열’은 내용이나 문체 면에서 송동본과 대체적으로 같으나 몇 가지 차이점도 있다. 첫째, 완판본 계열에는 송동본에 없는 삽입 가요(揷入歌謠), 잔사설, 고사성어(故事成語), 한시(漢詩) 등이 많이 나온다. 둘째, 송동본에 없는 장 승상 부인 이야기가 나온다. 셋째, 심청이 배를 타고 인당수에 가기까지의 항해 경로와 오래전에 죽은 유명한 사람의 영혼을 만나는 이야기가 첨가되어 있다. 넷째, 맹인 잔치에 가는 심 봉사가 목동과 방아 찧는 여인을 만나고, <목동가>와 <방아타령>을 부르는 이야기가 첨가되어 있다. 다섯째, 심 봉사가 눈을 뜰 때 모든 맹인이 함께 눈을 뜨는 이야기, 심청이 아버지를 만난 후 행복하게 사는 이야기가 첨가되어 있다.

필사본 중에는 위에 적은 세 계열 중 어느 하나와 관련이 있는 이본도 있고, 두 계열의 내용이 함께 들어 있는 이본도 있다. 그런가 하면, 어느 한 계열과도 깊은 관련을 맺지 않은 이본도 있다.

활자본을 보면, 1912년에 <강상련(江上蓮)>이 나왔다. 이것은 이해조가 완판본의 문장을 다듬고, 내용을 덧붙이거나 빼면서 신소설처럼 바꿔서 출판한 것이다. 1913년에는 신문관에서 <심청전>이 나왔다. 이것은 한남본의 문장을 부분적으로 손질하고, 송동본의 뺑덕 어미 이야기를 첨가하여 간행한 것이다. 그 후에 여러 출판사에서 <심청전>이 나왔는데, 대체적으로 <강상련>을 약간씩 손질하여 간행하였다.

이처럼 <심청전>은 여러 이본이 전해온다. 그런데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완판본의 내용이다. 그동안 중학교 교과서에 <심청전>의 일부분이 실렸는데, 그것은 이해조가 완판본을 고쳐 쓴 <강상련>이다.


3.<심청전>의 배경 설화 및 형성 과정
고소설 작품 중에는 당시에 민간에 전해오던 설화를 수용하여 구성한 작품이 많이 있다. <심청전> 역시 당시에 전해 오던 설화를 배경으로 하여 형성되었다. <심청전>의 여러 이본이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내용 단락과 그 단락을 구성하는 데에 배경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하는 설화를 적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심청의 출생 : 태몽(胎夢) 설화
② 심청의 성장과 효행 : 효행 설화, 인신공희(人身供犧) 설화
③ 심청의 죽음과 다시 살아남 : 재생(再生) 설화
④ 심청의 아버지 만남과 아버지의 눈 뜨기 : 개안(開眼) 설화

‘태몽 설화’는 부모가 이상한 꿈을 꾸고 주인공을 낳는다는 내용의 설화다. 태몽 설화는 역사적으로 유명한 인물과 관련되어 많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효행 설화’는 여러 유형이 있다. 그런데 주인공이 지성으로 부모를 섬기자 이적(異蹟)이 일어나 효를 성취하고, 잘 살았다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인신공희 설화’는 마을의 평안과 풍요를 기원하는 제의에서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내용의 설화이다. 이 설화는 우리나라는 물론 다른 나라에서도 전해온다. ‘재생 설화’는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나 생명을 연장한다는 내용의 설화다. 재생의 양식으로는 부활(復活)과 환생(還生)이 많이 나타난다. ‘개안 설화’는 앞을 못 보던 사람이 눈을 뜬다는 내용의 설화다. 이 설화에서 장님은 아들·딸·며느리의 효성에 의해 눈을 뜬다. 이들 설화는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전해오는 이야기로, 한국인의 다양한 의식을 잘 드러내고 있다. <심청전>의 작자(누구인지는 모르지만)는 이 작품의 각 단락을 구성하면서, 그 단락의 기능을 수행해 줄 수 있는 위 설화를 수용하여 작품의 효과를 올리도록 구성하였다. 그래서 이 작품은 우리의 문학적 전통 위에서 작품의 효과를 거둘 수 있게 되었다.

이 작품은 위에 적은 설화를 배경으로 하여 한남본이 먼저 형성되고, 이것이 판소리와 관계를 맺으면서 송동본, 완판본으로 변화하였을 것이다. 활자본은 그 뒤를 이어 나온 것이다.

 

4.<심청전>의 구조
<심청전>의 내용 중 심청의 일생을 위에 적은 내용 단락을 중심으로 살펴보겠다.
① 심청의 출생 단락에서 심청은 본래 천상계의 선녀였는데, 이 세상으로 귀양 왔다고 했다. 이것은 심청의 전신(前身)이 선녀로, 비현실계의 존재였음을 말해준다.
② 심청의 성장과 효행 단락에서 심청은 현실계인 이 세상에서 부친의 양육으로 자라난다. 철을 안 뒤부터는 동냥, 품팔이를 하여 아버지를 봉양하다가 공양미 300석에 몸을 팔았다. 심청이 산 곳은 이 세상, 즉 현실계다.
③ 심청의 죽음과 다시 살아남 단락에서 심청은 항해의 안전을 비는 제의에서 해신(海神)에게 바치는 제물이 되어 인당수에 빠져 용궁으로 갔다. 심청이 간 용궁은 사람이 마음대로 갈 수 없는 비현실계다.
④ 심청의 아버지 만남과 아버지의 눈 뜨기 단락에서 심청은 이 세상에서 왕비가 된다. 그리고 뒤에 아버지를 만나 행복하게 살았다.
이처럼 심청은 비현실계의 존재인 선녀가 현실계인 지상으로 와서 심 봉사의 딸로 태어나서 자란다. 그리고 다시 비현실계인 용궁에 갔다가 다시 현실계로 돌아와 행복을 누린다. 그래서 <심청전>의 배경 공간은 ‘비현실계→현실계→비현실계→현실계’로 바뀌어 순환한다. 그래서 이 작품은 심청의 일생을 중심으로 보았을 때 현실계와 비현실계가 서로 바뀌어 순환하는 순환구조를 보이고 있다.

이 작품의 내용을 심 봉사의 일생을 중심으로 하여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 심 봉사는 어진 아내와 살면서 딸 심청을 낳아 그런대로 행복하게 살았다.
㉯ 심 봉사는 아내를 잃고, 딸마저 잃은 뒤에 슬픔과 고통의 나날을 보냈다.
㉰ 심 봉사는 왕비가 된 딸을 만나 눈을 뜬 뒤에 행복하게 살았다.

위에 적은 ㉮ 단락의 행복은 불완전한 것이다. ㉯ 단락에서 심 봉사는 아내의 죽음, 딸과의 이별 등 거듭되는 사건으로 더할 수 없는 슬픔과 고통을 받게 된다. 심 봉사의 슬픔과 불행은 매우 심각한 것이어서 이것이 변할 가망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 단락에서 심 봉사의 불행은 끝이 나고, 행복한 생활이 계속된다. 이처럼 이 작품은 ㉮의 행복이 ㉯의 고난으로 바뀌고, 이것이 다시 ㉰의 행복으로 극복되어 행복한 상황이 지속될 때 끝을 맺는다. 그래서 행과 불행이 어느 한 상황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두 가지 상황이 서로 바뀌면서 순환하는 순환구조를 보이고 있다.

이 작품에 나타나는 ‘현실계와 비현실계의 순환’, ‘행과 불행의 순환’은 모두 불행한 현실을 없애버리고, 행복이 가득한 새로운 현실을 만들려고 하는 의식을 바탕으로 하여 꾸며진 것이다. 한국인은 오늘의 고난과 불행이 내일에는 극복되어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기대와 믿음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이런 작품을 만들어 즐기면서 내일의 행복에 대한 희망과 기대를 확인하고 다짐하였던 것이다.


5.<심청전>의 배경이 된 곳
<심청전>의 배경이 된 곳이 어디인가를 알려면, 심청이 나서 자란 곳과 죽었다가 살아난 곳이 어디인가를 살펴보면 된다. 심청이 나서 자란 곳과 죽었다가 살아난 곳은 이본에 따라 다르지만, 대체적으로 ‘황주 도화동’과 ‘인당수’로 되어 있다.

심청이 나서 자란 ‘황주’는 중국의 황주일 것이라는 의견도 있지만, 우리나라의 황해도 황주로 보는 의견이 대부분이다. 심청이 빠져 죽었다가 살아났다고 하는 ‘인당수’는 어디일까? 황해도 서쪽 해안의 북위 38도 조금 위쪽에 서쪽으로 길게 뻗은 곶이 있는데, 이곳이 장산곶이다. 장산곶에서 남쪽으로 약 17km 떨어진 곳에 백령도가 있다. 장산곶과 백령도 중간쯤 되는 바다는 물살이 세기로 이름난 곳인데, 여기가 인당수다. 우리나라가 남북으로 갈라지기 이전에 이곳을 오가며 물고기를 잡던 어부들이나 뱃사람들은 예전부터 물살이 세기로 이름난 이곳을 인당수라고 불렀다고 한다.

백령도를 비롯한 대청도와 소청도 주민들 사이에는 오래 전부터 “효녀 심청이 인당수에 빠졌다가 연꽃을 타고 물 위로 떠올랐는데, 그 연꽃이 남쪽으로 떠내려 오다가 백령도 남쪽에 있는 바위섬인 연봉바위에 와서 걸려 있었다. 이를 뱃사람들이 보고 임금님께 바쳤는데, 연꽃에서 나온 심청이 왕비가 되었다”는 내용의 <심청 전설>이 전해온다. 6·25 전쟁이 시작된 뒤에 남쪽으로 온 사람들 말에 의하면, 이 전설은 지금은 북한 지역인 황해도 옹진, 장연 지역에서도 전해왔다고 한다.

<심청전>에서는 심청이 나서 자란 곳이 황해도 황주이고, 물에 빠진 곳이 백령도와 장산곶 사이에 있는 인당수라고 한다. <심청 전설>에서는 심청을 태운 연꽃이 연봉바위에 걸려 있었다고 한다. 이 둘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심청전>의 배경이 된 곳은 황해도 황주, 장산곶과 백령도 사이의 인당수, 그리고 백령도 남쪽의 연봉바위를 잇는 지역이 된다. 그런데 황해도 황주는 지금 북한 지역이어서 마음대로 갈 수 없고, 백령도는 우리가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다.

백령도는 행정구역상으로 인천광역시 옹진군 백령면으로 되어 있다. 옹진군에서는 백령도가 <심청전>의 배경이 된 곳임을 기리고, 효행을 권장하는 뜻에서 진촌리 뒷산에 ‘심청각’을 세우고, <심청전>과 관련된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이곳에서 북쪽을 보면, 바닷물이 유난히 넘실거리는 인당수가 보이고, 남쪽에는 연봉바위가 보인다. 그리고 서쪽에는 심청을 태운 연꽃이 떠내려 와서 바닷가에 연밥을 떨어뜨렸는데, 그 연밥이 싹이 터서 지금도 연꽃이 핀다는 연화리가 보인다. 심청각은 이곳 주민은 물론, 이곳을 찾는 많은 관광객들에게 백령도가 <심청전>의 배경이 된 곳임을 알려주는 한편, 심청의 지극한 효성을 본받을 것을 일깨워 주고 있다.

 

차례         
해설

선녀가 심청으로 태어나다
곽씨 부인이 산후병으로 세상을 떠나다
심 봉사가 젖동냥으로 심청을 기르다
심청이 동냥과 품팔이로 아버지를 봉양하다
장 승상 부인이 심청을 수양딸 삼으려 하다
심 봉사가 공양미 삼백 석 시주를 약속하다
심청이 몸을 팔아 공양미 삼백 석을 시주하다
심청이 인당수로 떠나다
심청이 인당수에 몸을 던지다
용왕이 심청을 용궁으로 모셔 들이다
심 봉사가 뺑덕 어미와 살며 재산을 다 없애다
연꽃을 타고 돌아온 심청이 황제와 혼인하다
심청이 맹인 잔치를 열다
심 봉사가 황성 맹인 잔치에 가다
심청이 아버지를 만나고, 심 봉사는 눈을 뜨다
심청 부녀가 부귀영화를 누리다

옮긴이에 대해

 

본문중에서   
황후 버선발로 뛰어 내려와서 부친을 안고,
“아버지, 내가 과연 인당수에 빠져 죽었던 심청이오!”
심 봉사 깜짝 놀라,
“이게 웬 말이냐?”
하더니, 어찌나 반갑던지 뜻밖에 두 눈이 갈라 떨어지는 소리가 나면서 두 눈이 활짝 밝았으니, 만좌(滿座) 맹인들이 심 봉사 눈 뜨는 소리에 일시에 눈들이 헤번덕 짝짝, 갈치 새끼 밥 먹이는 소리 같더니, 뭇 소경이 천지 명랑하게 되었다.


옮긴이       
최운식은 서울교육대학교 및 서경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성균관대학교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경대학교와 한국교원대학교 교수, 한국민속학회 회장·국제어문학회 회장·청람어문교육학회 회장을 역임하고, 현재 한국교원대학교 명예교수로 있다.

저서에는 ≪심청전 연구≫, ≪한국 고소설 연구≫, ≪한국 설화 연구≫, ≪한국 서사의 전통과 설화문학≫, ≪전래동화 교육의 이론과 실제≫, ≪한국인의 삶과 문화≫, ≪함께 떠나는 이야기 여행≫, ≪다시 떠나는 이야기 여행≫, ≪한국의 민담≫, ≪옛날 옛적에≫, ≪가을 햇빛 비치는 창가에서≫등 40여 권이 있다.

 

별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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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럴드 이니스 Harold A. Innis (캐나다, 1894-1952)
해럴드 이니스는 1894년 캐나다 온타리오 주의 농가에서 태어났다. 그는 캐나다 맥매스터 대학에서 수학했으며, 시카고 대학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고 토론토 대학 정치경제학부 교수가 되었다. 그의 초기 연구는 캐나다 문화와 경제가 모피, 어류, 목재, 밀, 광물, 연료 같은 원자재의 개발과 수출입에 의해 형성되었다는 주장이었다.

정치경제사를 전공한 그가 커뮤니케이션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토론토 대학 동료 매클루언과의 만남을 통해서였다. 그 후 이니스는 커뮤니케이션 미디어가 사회 형성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연구했고, 그 연구 성과는 잇달아 나온 ≪제국과 커뮤니케이션(Empire and Communications)≫, ≪커뮤니케이션 편향(The Bias of Communication)≫ 두 권의 주저로 집약되었다.

이니스는 캐나다인으로서의 관점이 분명한 사회과학의 기초를 놓았다. 그는 대학들이 캐나다와는 역사와 문화가 다른 영국이나 미국에서 교육받은 교수들에게 계속 의존하지 않도록 캐나다 학자들 중심의 학회와 재단을 설립했다. 특히 그는 대학이 정치적․경제적 압력에 휘둘리지 않도록 하는 데 힘썼다. 그는 비판적 사고의 중심으로서 ‘독립적인’ 대학이 권력 지향적이고 광고 의존적인 미디어에 의해 훼손된 서구 문명의 존립에 필수적이라고 믿었다. 그는 1952년 암으로 사망했다.

주요 논문 및 저서로는 ≪A History of the Canadian Pacific Railway≫(1923), ≪The Fur Trade in Canada: An Introduction to Canadian Economic History≫(1930), ≪The Cod Fisheries: The History of an International Economy≫(1940), ≪Political Economy in the Modern State(1946), Empire and Communications≫(1950), ≪The Bias of Communication(1951), Changing Concepts of Time≫(1952)이 있다.

 

해설         
이 책은 해럴드 이니스의 ≪Empire and Communications≫(Oxford, 1950)를 저본으로 번역하고, 2008년 1월에 완역으로 출간한 ≪제국과 커뮤니케이션≫(커뮤니케이션북스)을 토대로 2분의 1정도를 발췌한 것입니다.

캐나다 출신 경제사학자 해럴드 이니스는 맥매스터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시카고 대학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토론토 대학 정치경제학부 교수가 되었다. 그의 초기 연구는 캐나다 문화와 경제가 모피, 어류, 목재, 밀, 광물, 연료 같은 원자재의 개발과 수출입에 의해 형성되었다는 내용이었다. 그런 그가 커뮤니케이션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토론토 대학 동료인 마셜 매클루언과의 만남을 통해서였다. 1950년 출간된 ≪Empire and Communications≫는 이니스의 커뮤니케이션 연구의 첫 번째 성과이며, 이듬해 이를 이론적으로 정리한 ≪The Bias of Communication≫이 출간되었다.

≪제국과 커뮤니케이션≫은 많은 역사적 사례를 통해 제국 형성과 문화 발전 과정에서 커뮤니케이션 미디어의 역할을 탐구한다. 그러나 단순히 미디어에 의해 역사가 결정된다는 단선적인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다. 이니스는 정보나 지식을 통제하는 방식과 그 지배적 방식의 변화에 대응하는 태도, 매체를 통해 재편된 지식 독점 양상의 결과가 제국의 흥망성쇠의 요인이라고 주장한다. 문명의 몰락과 존속은 특정 매체를 사용했기 때문이라기보다 변화하는 매체 환경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상황을 그 문명이 어떻게 수용하고 대응했는가에 달려 있다고 보는 것이다. 즉 매체는 ‘역동적인 과정’이며 이 움직임 가운데 어떤 것의 ‘궁극적인 원인’이 아니다.

시간과 공간의 관계성, 무거운 매체와 가벼운 매체의 대조는 ≪제국과 커뮤니케이션≫의 주요 패턴이다. 이니스는 서양 문명사를 시간의 ‘연속성’을 강조하는 매체와 공간의 ‘이동성’을 강조하는 매체의 충돌과 경쟁 속에서 변화해 왔다고 보았다. 매체 형식과 사회 현실이 상호 작용하는 가운데 특정 매체가 지배하는 ‘편향’이 일어난다. 편향은 매체의 물리적 속성뿐 아니라 매체를 전유하는 과정에서 형성되는 관계망의 양상, 그리고 가치 체계를 함축하는 것이다.

오늘날 ‘지구촌’이라는 ‘제국’을 형성할 수 있었던 것은 인터넷이라는 커뮤니케이션 매체를 통해 가능했다. 인터넷은 이니스가 말한 시간 편향과 공간 편향을 극복하고 실시간성과 동시성, 편재성을 획득한 것이다. 해설을 쓰고 있는 이 시간, 광화문에서는 양손에 각각 촛불과 핸드폰을 든 시민들이 광장 아고라에서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를 위한’ 마흔여섯 번째 촛불 집회를 하고 있다. 집회 참여자 모두는 촛불 시위 현장의 기자고 사진사이며 디자이너다. 그들은 인터넷을 통해 소통하고 광장 아고라에 모여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전통을 만들어내고 있다.

‘평범한 사람의 것이라도 목소리는 비범한 사람의 글보다 더 강렬한 인상을 준다.’ 이니스는 구술 전통의 생명력의 회복을 바랐다. ≪제국과 커뮤니케이션≫과 ≪커뮤니케이션 편향≫ 출간 이후 반세기 동안 매체 환경은 급변했다. 20세기에 독점적 권력을 소유한 신문과 방송은 인터넷의 강력한 도전을 받게 되었다. 우리는 지금 역사상 가장 합리적인 정치 형식으로 여겼던 대의민주주의가 시민들의 직접민주주의로 상쇄되고 있음을 목도한다. 개개인의 느슨한 연대를 통한 공동체의 탄생, 새로운 정치 세력의 출현, 이는 정치사회 전반에 커다란 변화를 일으켰다. 뉴스 생산자와 소비자의 경계 또한 허물어지고 있다.

매클루언이 ‘지구촌’이나 ‘미디어는 메시지다’와 같은 아이디어를 만들어낸 것은 이니스의 영향이 컸다. 매클루언은 이니스의 커뮤니케이션 연구 개척에, 이니스는 그의 저작을 요약하고, 종합하고, 대중화한 매클루언의 능력에 서로 빚을 졌다. 그렇지만 매클루언이 조명되고 많은 연구가 이루어진 데 비해 이니스의 커뮤니케이션에 관한 국내 연구는 부진한 형편이다. 이는 이니스의 국내 번역서가 없던 탓이 클 것이다. 오늘날 개인의 목소리, 분권화된 매체 환경에 조응하는 이니스의 빛나는 통찰이 ≪제국과 커뮤니케이션≫의 번역 출간과 함께 활발하게 조명되기를 기대한다.

 

차례         
해설
지은이에 대해 

제국과 커뮤니케이션
머리말
이집트
바빌로니아
구술 전통과 그리스 문명
문자 전통과 로마 제국
양피지와 종이
종이와 인쇄기

옮긴이에 대해

 

본문중에서   
Large-scale political organizations such as empires must be considered from the standpoint of two dimensions, those of space and time. Empires persist by overcoming the bias of media which overemphasizes either dimension. They have tended to flourish under conditions in which civilization is offset by the bias of another medium towards centralization.

제국 같은 거대 정치 조직은 시간과 공간 두 차원의 관점에서 고려되어야 한다. 제국은 두 차원 중 어느 하나를 과도하게 강조하는 매체 편향을 극복함으로써 존속된다. 제국이 번영하는 경향을 보인 것은 문명이 한 가지 이상의 매체의 영향력을 반영하고, 지방분권 지향의 매체 편향이 중앙집권 지향의 매체 편향으로 상쇄되는 조건에서였다.


출판사 서평 
제국의 흥망성쇠와 커뮤니케이션 미디어의 발달을 논리적으로 연결한 이니스의 이론이 흥미롭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대규모 상업 활동이 시작되면서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사람이 많이 필요했다. 따라서 읽고 쓰는 수고를 덜기 위해 복잡하고 어려운 언어들이 점차 간소화되고 체계화되었다. 이처럼 수많은 역사적 사례를 통해 제국 형성과 문화 발전 과정에서 커뮤니케이션 미디어의 역할이 어떻게 진화되어 왔는지 탐구하고 있다.



옮긴이       
김문정은 이화여자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신문방송학과를 수료했다. 옮긴 책으로는 ≪제국과 커뮤니케이션≫(커뮤니케이션북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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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7/17 08:4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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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zmanz 2008/07/18 10:42